재상봉 단상

2005.10.18 02:27

노기제 조회 수:668 추천:111

080805      재상봉 단상
                                        박 기순

헤쳐,     떨어진 구령에 어느길을 택했나
더러는 제 맘대로 원하는 길이었고
더러는 뜻이 꺽여 고삐 꿰어 끌려다닌 길
사십년 세월이 흘러간 이 시간
모여,    떨어진 구령에  달려와 보니
나의 길도 너의 길도 걸을만한 길이었네
이제 잠시 모여 앉아
수줍음도 망서림도 퇴색해 버린
잔잔한 열림이 이어지고
폭풍이 휩쓸고 간 가슴이라해도
따사한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사대부고 17,     맑고 정한 시내에서 함께 발 담구고
밝은 햇살 흠뻑 받아   강한 정기 받은 친구들
사십년 후 이 자리에
생소한 이름, 생소한 얼굴이 있다해도
닫힌 가슴 열려 지나온 자욱 내 보인다
이렇게 만난 이 순간의 우리 모습이
세찬 물살에 깨지고 깍여 볼품 없이 작아진
조약돌의 모습이라 해도
우린 넉넉히  사랑할 수 있다.
여기까지 함께 오지 못한 먼저 간 친구들
가슴이 찢기는 아픔 때문에라도
함께 한 우린 뜨겁게 서로를 반기고 있다
쉽지 않은 인생길을 지나옴에 힘찬 갈채를 보낸다
남겨진 황혼길을 걸어야 함에 강한 용기를 주고 싶다
당신, 사대부고 17  팻말 아래 모인 바로 당신에게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재상봉이란 이벤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30주년 때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서먹하니 자신을 감추려던  모습들을 보았는데, 모르면 모르는대로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데, 샐쭉하니 먼저 말 걸고 싶지도 않았는데, 아니, 아예 참석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10년 세월을 더 해보니 덧 입었던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린 모습이다.
40년 전 그때 그모습에 이름표를 읽으며 아스라히 배어 있는 기억을 꺼낸다. 행여 들킬새라 조심스레 품었던 사모했던 마음도 함께 튀어 나온다. 한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채, 졸업하고 헤어져, 40년 세월 흘려 보냈지만 이젠 환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그 때, 내가  너 많이 좋아 했었는데…..
성냥불 잠간 그어 댄 듯, 순간으로 묻힌 함께 했던 시간들.  어쩜 너도 잊고 나도 잊었던 그 시간들을 확대경 아래 놓고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리가 품었던 크고 작은 꿈들이 보인다. 더러는 그 꿈을 잘도 피워 냈고, 더러는 그 꿈이 담긴 상자를 아직도 소중하게 갖고 있다. 기회를 잡지 못해 뚜껑을 열지도 못한 꿈도 있다.  혹은 피우려 안 간 힘을 쓰다  끄트머리에 이뤄내지 못하고 접힌 꿈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다 내어 보인다. 허허허 허한 웃음 뒤에도 사력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귀한 흔적이 있다. 내가 느끼고 네가 느낄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고귀함. 이제 우리 둘러 앉아 다시 얼굴을 익히자. 앞으로 우리가 지나야 할 황혼길에 서로의 언덕이 되어 보자. 이 지점까지 함께 뛰지 못한 친구들. 그들의 일찍 꺽인 생애를 아파하며 기억해 본다. 그들도 오늘 이자리를 흠모 했을터.
아무것도 내세울 건 없다. 오직 하나 사대부고 17, 거기에 속한 우린 그로 인해 서로가 자랑스럽고, 그로 인해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영원히….영원히…..



                                                
2005년 10월 3일 WILSHIRE GRAND HOTEL에서 열린
서울사대부중고 40주년 재상봉 뱅큇에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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