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꼬인날

2009.09.01 03:27

노기제 조회 수:675 추천:227

20090828                        어떤 꼬인 날

        언제나 아름답게 시작하고 싶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은. 언제나 평안하게 열고자 하는 또 다른 날이다. 여느 날과 똑 같이 하루의 시작을, 내가 소망하는 모양새의 하루로 꾸미고자 짧은 기도로 일상에 임한다.

        어쩐지 소망대로 안 된다. 강아지와 나가는 아침 산책길에 뭔가 공사중인 차량이 길을 막았다. 좌우 오가는 차 살피며 공사차량을 피해 옆으로 빠르게 길을 건너는데 시끄럽던 공사 소음이 딱 멈추며 늙스구레한 얼굴이 고개를 들며 하는 말.
“What’s matter old lady?”
   그냥 힐긋 뒤 돌아 보곤 아무 소리 안 하고 걷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속이 불편하다. 뭐야? 올드레이디?

     혼자 말싸움이 시작 된다. 내가 왜 올드레이디냐? 넌 나 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인다. 이왕 밖으로 내 보내는 말. 이쁜 말로 하면 누가 세금 더 내라나? 나 같으면 young lady, beautiful lady, 얼마든지 기분 좋게 해 주는 말을 쓰겠다. 자기 딴엔 위험을 느꼈기에 공사를 잠시 중단까지 하며 놀란 끝이라 그랬겠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 말에 내 심기가 불편하단 말이다.

     아니 그런데 내가 벌써 이런 소리 들을만큼 자태가 변했단 말인가? 몸매도 아직은 봐 줄만 하구만. 더구나 미국 할아버지 눈에는 동양 할머닌 아직 아가씨처럼 보일텐데. 첫 눈에 알아버렸다니, 이거야 원. 아님, 그냥 아무 뜻 없이 던진 한 마디에 내가 너무 예민 반응인가?   요즘 얼마 사이, 나두 느낄 만큼 내가 세월을 덕지덕지 버겁게 덧 바른 얼굴로 보인다. 사람은 어느 순간 갑자기 늙는다더니. 내가 바로 그 어느 순간을 통과한 모양이다.

     그 공사지점을 다시는 통과하지 않으려 돌아오는 길을 딴 동네로 잡아 들어섰다. 땅에 내리 꽂은 시선. 시끄럽게 말싸움에 열중인 마음을 들으며 걷다가 순간 위험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제법 빠른 속도로 차고에서 길 쪽으로 후진하는 차를 보곤 가슴이 쿵 떨어진다. 내 왼발과 강아지 머리가 거의 차와 동일선상이다. 얼른 강아지를 잡아 당기고 멈췄다. 운전석을 들여다 보니 내쪽은 둘러 볼 생각도 않고 저쪽만 살피며 빠른 후진을 계속 한다.

     그 쪽에서 오는 차량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내 쪽을 향하며 차를 인도에서 차도로 방향을 잡는다. 놀란 가슴 쓸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큰 일 날뻔 했다는 혼잣말 같은 안도의 몸짓이랄까. 그 차의 앞 부분을 지나는데 갑자기 그 차가 전진을 시도 한다. 다시 한 번 소스라쳐 놀라 운전자를 보니 손가락질이다. 역시 나보다는 위로 보이는 할머니다. 뭔 점잖지 못한 손가락질씩이나 싶어. 차를 돌아 창가로 바짝 귀를 대니 창문을 열며 버럭 소릴 지른다.
“I don’t like shaking your head.”

     어쩌라구? 내가 좀 놀라서 그리 표현 한 건데. 이 할머니 귀가 어두운가,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않구 마구잡이로 언성이 하늘을 찌르게 높아진다. 저쪽에서 오는 차량을 분명히 살피고 후진을 했다는 둥, 넌 이쪽에서 왔으니 네가 잘 보고 다녀야 했다는 둥. 아 글쎄. 누가 뭐랬냐구요. 나두 넘 놀라서 그리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라구요. 혹시 내 몸짓에 미국사람들은 다른 뜻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얼굴에 악이 가득해서 일그러지는 할머니의 눈빛을 받으며 그냥 돌아섰다. 가세요. 가려던 길 그만 가시라구요. 나두 갑니다. 그러면서 속이 또 시끄러워진다. 이거 뭐야 오늘. 시작이 만만찮네.

     집에 돌아와 다음 일과를 생각하니 그 두 사람 얼굴이 스친다. 순식간에 콧물이 주루룩. 이건 또 뭐야? 알러지 현상인가. 몸도 슬슬 쑤시는 것 같다. 다 접고 누워버려? 어떤 험악한 인물이 세번째로 등장할런지 두려움까지 엄습한다.

     뭔 엄살을 이리도 심하게 부리고 있나. 이런 경험을 했으니 씩씩하게 밖으로 나가 내가 당한 싸가지 없는 말들을 난 사용하지 말아야지. 그 반대말들, 즉 들어서 기분 좋은 말들, 마음이 흐믓해 지는 말들, 고운 말들만 골라 입 밖으로 내 보내며 내가 있으므로 기쁨이 가득, 행복이 흥건한 공간을 만들어야지. 머리 싸매고 방에 박혀 피하려 말고, 힘차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자.분명 그 누군가 기대하지 않던 나의 한 마디 따스한 말에 용기 내고 그의 꼬인 하루 풀어 가리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180 당신과 함께 한 노기제 2013.07.10 586
179 인기 짱 된 사연 노기제 2003.03.23 588
178 수입상과 거짓서류 노기제 2004.08.09 591
177 상처 아물리기 노기제 2008.05.02 594
176 아이 하나 노기제 2007.06.12 595
175 내가 아파지는 이유 노기제 2013.12.30 604
174 내 목숨 그대에게 노기제 2012.06.19 606
173 미운 시선 풀고 보니 노기제 2005.01.21 608
172 포기, 그리고 용서의 다른점 노기제 2011.07.05 608
171 관광회사 광고문 노기제 2003.03.23 610
170 승마장 가는길 노기제 2003.02.02 611
169 우울증, 그 실체 노기제 2011.07.04 614
168 유성비 노기제 2006.12.28 617
167 먼발치 노기제 2007.04.26 618
166 황혼의 데이트 노기제 2003.02.16 619
165 억울한 사연 노기제 2004.11.22 620
164 내가 먼저 물어볼걸 노기제 2004.04.20 621
163 인라인 클럽 노기제 2004.08.10 625
162 이젠 내 차례 노기제 2013.03.20 625
161 새벽에 울린 전화 노기제 2004.05.02 626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96,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