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

2013.01.05 07:13

노기제 조회 수:758 추천:161

20130104                위아래

        힘들었다. 막내에게 시집갔으니 서열이 맨 꼴찌다. 내 나이에 상관없이 시댁 형제들에게 깍듯이 윗사람 대접을 해야 한다. 남편의 바로 윗 형님의 부인이 나보다 한 살 아래여서 애기 이름을 붙여 희주 엄마라 불렀다.  당장 시누님의 가르침이 내려왔다. 형님이라 불러야 하는데 아니면 언니라 부르란다. 난 언니도 없이 자라서인지 언니 소리도 나오기가 힘들었다. 나이가 윗사람이면 언니라 못 부를 건 없겠지만, 나보다 어린사람에게 언니라니? 그러나 어쩌랴. 못 배운 티 내지 않고 좋아서 결혼한 남편과 살려면 고개  숙이고 납작 엎드릴밖에.

        남편 고교 산악회모임에 따라갔다. 학연으로 모인 자리에선 선후배 사이가 시댁 위아래 서열처럼 확실하다.  그러나 그건 졸업생들 사이에서의 서열이다. 따라 온 부인들끼리야 뭐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서열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자들끼리 모여서 조연급으로 적당히 즐기면 팍팍한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별로 따라다니고 싶지 않지만 다들 부부동반이라니 홀아비처럼 혼자 가게 하는 것도 잘하는 처사는 아니다. 무난한 대화로 서로 예의 지키며 가끔은 남편 흉도 봐가면서,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란 걸 깨닫고 돌아오면 간단하다. 구태여 서열을 따질 것도, 나이를 따질 것도 없이 예의상 누구에게나 존댓말로, 가능하면 칭찬으로 대화의 방향을 잡으면 기분 좋은 만남으로 가끔 만나고 싶은 사이가 된다.

        그렇게 분위기가 잡혀 갈 즈음, 맨 나중에 들어선 부부는 남편보다 3년 선배이며 산악회에서 중추적 역을 하시는 정말 괜찮은 선배님의 출현이다. 그 부인은 몇 해 전 캠핑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부인을 어찌나 살갑게 챙겨 주시던지 존경심이 절로 생기던 선배다. 반면에 그 살가운 대접을 받는 부인은 완전 천방지축. 그런 남편에게 톡톡 쏘아대고 투덜대고 불평이 끊임없다. 곁에 있는 우리가 민망 할 지경이었다.

        선입견이 있으니 그 부인을 보는 내 눈이 곱지 않았다. 이미 시작 된 식사에 합석을 하더니 이런저런 하는 말마다 꼬리를 자른다. 도대체 이 여자가 몇 살이나 먹었기에 이리 나오나 싶어 짱구를 굴렸다.
        “저기요. 아빠랑 나이 차가 얼마나 되세요?”
        “우리? 일곱 살.”
        그날따라 숫자 계산이 빨리 되지를 않아, 다시 물었다.
        “사실은 나이 계산을 해 보려고 짱구를 굴리는데 잘 안되네요. 그럼 몇 년도 생이세요?”
        “나? 48년생.”
        “ 어? 그러면 아빠랑 일곱 살 차가 아니죠.”
        “응? 내가 내 나이를 잊어버려서.”

        아무리 존댓말로 묻고 응수를 해도 계속 반말 짓거리다. 은근히 부아가 난다. 근사한 남편이 공주 모시듯 받들어 주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퇴퇴 거리는 모양이며 한참 대화를 주고받아 봐도 뭐 하나 내 맘에 윗사람으로 대접할 이유를 못 찾겠다. 게다가 나 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 않나.

        남편이 그리 잘 해주는 데, 도대체 왜 겁도 없이 남편을 구박하느냐 물었다. 결혼 전부터 남편이 요리하는 일을 도맡아 해서 꼴 보기 싫단다. 자기 나름대로 그건 여자인 자기 몫이라 생각하고 꿈을 키웠는데 결혼 후에도 줄곧 그 꿈을 방해하니까 정말 얄밉단다. 캠핑하면서도 부인은 늘어지게 늦잠 자고 남편은 아침밥 차려 텐트로 갖다 바치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속사정이 있구나 싶어 모인 여자들이 모두 부러운 표정으로 왕후마마가 따로 없다고 한 마디씩 덕담을 한다.

        이쯤 되고 보니, 철부지처럼 귀엽단 생각이 든다. 분명 여러 면에서 나보다 어린 티가 확실히 보인다.
        “그런데 자긴 왜 말꼬리를 그리 잘라먹지? 내가 줄곧 지켜보고 있는데, 이건 실수로 잠깐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계속 반말이네.”
        “다들 후배니까.”
        한 참 위 선배님 부인도 계신데 대강 다 후배니까 그냥 자기가 어른이라 생각 돼서 말을 놓는다는 변이다.

        “잠깐, 여기가 뭐 시댁인가? 남자들은 자기네들끼리 선후배 가리며 놀고, 여자들은 그렇게 묻어서 가는 건 아니지. 엄연히 나이가 있는데, 내가 46년생이니 자기보다 두 살이나 위거든. 그러니 앞으론 까불지 마. 안 봐 줄거니까. 남편 따라 가는 건 시댁만으로 족해.”

        주위에 까르르르 웃음보들이 터진다. 누가 옳고 그름을 가릴 필요도 없다. 그냥 박장대소 웃고 지나면 된다. 그래서 즐겁게 모였던 걸 기억하게 되면 좋은 일 아닌가. 비록 다음에 만나 다시 말꼬리 짧게 끊는 상황이 되더라도 우선 오늘 한바탕 웃고 나니 남편 따라 나서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마침 새해 인사를 할 때이니 한국에 계신 형님께 전화나 드려야겠다. 아직도 나이는 내가 위지만 40년 입에 붙은 형님소리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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