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젖게 한 선물

2013.12.30 03:10

노기제 조회 수:388 추천:104

20131220                가슴 젖게 한 선물

        사랑은 주는 것, 줄 때 더 기쁘다 한다. 아니 나도 경험하고 인정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인정 했던 사실을 부인하려 한다.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어왔을 때, 엄청나게 놀랐기 때문이다. 어디에 선가로부터 사랑을 받아 보니, 줄 때의 그 기쁨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없다.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내 앞에 눈을 부라리며 다가와 서 있음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선물을 받고 뜯어보던 순간에, 심장이 머물 것 같은 희열을 느꼈노라고 표현을 할까? 줄 때 느끼던 잔잔한 기쁨과는 비교가 안 되는 희열.
        혼자 일 수 있는 공간을 작업실이라 칭하고 이곳에서 얻게 된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느긋한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소음이 머리칼을 세운다. 마치 목욕실에, 나 아닌 누군가가 있어 사람 소리를 내는 듯이 가까이서 나는 소리다. 심한 무서움 증에서 해방된 줄 알았는데 또다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지병이 도진 듯해서 그게 더 무섭게 생각되는 순간이다. 숨을 죽이고 확실하게 들으려 귀를 세워 본다. 안 들린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식사를 끝내면서, 여전히 물러서지 않는 두려움을 노려본다. 가라. 난 더는 두려움 같은 쓰레기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가라. 썩 물러가란 말이다.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조심스레 식탁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다 문 밑으로 밀려들어 온 하얀 봉투를 발견했다. 어? 뭘까? 아하, 아까 그 사람 소리의 주인공이구나. 어휴, 목욕실에 누가 있는 게 아니구나.
        겉봉이 분명하게 내 이름과 내 방 번호가 정교하게 쓰여 있으니 내게 온 것이 확실하다. 빨간 모자에 긴 목도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선, 눈사람 씰로 봉인된 카드 겉봉을 찢어지지 않게 뜯었다. 크리스마스카드와 함께 25불 슈퍼마켓 상품권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운영진들인 수녀님들과 매니저의 사인이 선명하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어 졌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특별한 사랑 받을만한 사람이었나?
        이렇게 좋을 수가! 누군가 나를 생각 해 주고, 정성스레 내 이름을 쓰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내 방 앞까지 와서 살짝 밀어 넣어 주기까지의 시간, 성의, 물질 등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되짚어 본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이지 싶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시간 중에 얼마나 많은 이런 일들이 있었을까. 그때마다 난 오늘처럼 감동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사하게 받았었나?
        기억나는 기쁨들의 밀도가 어쩐지 엉성하다 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 번도 이런 사랑을 못 받았을지도 모른다. 줄 때의 기쁨을 독차지하려고, 받는 일엔 극구 사양하며 고집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요즘의 내 상황에 부족한 구석이 있어서일까?
        물론 물질적으로 부족하다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지내는 이 공간에서는 뭔가 2% 정도는 허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에 전혀 개인적 감정이 섞이지 않은 작은 선물이 부족한 2%를 넘치도록 채워 준 것이다.
        결코, 큰 액수는 아니다. 그러나 나에겐 가슴이 꽉 채워지는 그 이상의 포만감을 준 선물이다. 벅찬 기쁨으로 눈물이 났다 하니 의아한 눈초리로 시큰둥한 반응들을 보이는 다른 입주자들. 별것 아닌 걸로 웬 호들갑이냐 란 표정들이다. 누구에게나 다 준 것이니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이론인가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비록 내가 다니지 않는 마켓의 선물권이라 불편한 점이 있긴 해도 가슴 뜨거워지는 선물임엔 틀림없다.
        깨달은 점이 있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베풀었던 사랑에, 누구 하나 이번의 나처럼, 깊은 감동과 뜨거운 감사를 느꼈던 사람이 있었겠냐 라는 확신 없는 질문이 생겼다는 거다. 말끔히 잊었어야 하는 베풂을 돌아보는 것이 어리석음이지만, 그들도 나처럼 이리 기뻐하고 가슴 뜨거워지고 감사해 했었다면 아주 좋을 것 같다.
        감동 없이 귀한 줄 못 느끼고, 그러려니 습관적으로 받고들 있다면, 아쉬움이 포장된 서글픔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베풂은 이어져야 하는 현실이다. 베풀면 따라오는 기쁨이 욕심나기 때문이다. 혹여 나처럼 이리 깊게 감동하며 행복해 할 사람 있을 거라고 희망을 품어 보는 것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상품권을 챙겨 들고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춤을 추듯 리듬을 탄다. 얼굴엔 환하게 번지는 미소. 그리고 가슴은 뿌듯하다.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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