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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   


   오늘은 육이오가 발발한 지 59주년이 되는 날! 반세기가 훨씬 지난 세월의 무상함속에  눈시울을 적시며 남다른 감회에 젖어 드는데 그날에 너무 놀랐던 슬픔의 기억들이 책장을 한 장씩 넘기듯이 생생하게 하나하나 되살아나 내 시야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중학교 일학년 때 중학교 입학을 기뻐하며 처음 입어보는 교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냥 좋아하며 순진하게 숙녀 예비생이 된 기분에 흥분했던 나! 그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어린 나이에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비극을 겪었던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찬송가 대신 느닷없이 흘러간 옛 가요가 전파를 타고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는데 사회자가 오늘은 육이오 특집으로 그 당시 유행하던 가요를 들려준다며 서민들의 고달픈 애환을 그린 많은 노래 가운데 ‘미아리 고개’를 방송해 주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향수에 젖어 노래를 들으면서 그 당시 피난민 시절과 폐허 위에서 전쟁의 상흔을 딛고 재기를 꿈꾸던 그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 왔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소파에 앉아서 그때를 상기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데 전쟁영화가 머리에 떠오르면서 이 전쟁영화를 인상 깊게 관람했던 그때의 추억을 더듬게 되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편 나왔고 외국 영화도 무척이나 많았다. 전쟁과 평화, 의사 지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콰이강의 다리,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 다 열거 할 수가 없다. 그 중에도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가 있는데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이다. 위에 열거한 노벨상을 탄 수상 작품들 보다도 더 나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지막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가슴을 파고드는 사랑의 애잔함과 배신의 아픔으로 그만 나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던 추억 때문에 명화중의 명화로 나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58년 작품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개선문'의 독일 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동부전선에 참전한 한 독일 병사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허무함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이다.    

   한 독일병사가 겪는 힘든 전투 상황과 휴가지 후방에서 겪는 회의감, 반나치 혐의로 희생된 스승의 딸과의 사랑과 결혼, 원대복귀 후 가슴 아픈 전사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참으로 진솔하게 영상에 옮긴 가작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가슴이 찡한 장면으로 압권이었다.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데 그가 풀어준 빨치산 청년이 그를 쏜다. 그는 쓰러지고 편지가 손에서 떨어져 물에 흘러간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사랑하는 아내의 편지를 붙잡으려고 손을 애타게 뻗지만 그만 편지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흘러 가버리고 그의 손은 움직임을 정지하고 만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 날것인가? 마음이 무겁고 착잡해 옴을 나 어찌하랴! 이곳에 사는 1.5세대나 2세들은 태반이 넘게 육이오가 몇 년도에 발발한 지도 잘 모르고 있다고 한다.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 일세들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육이오를 겪었던 세대들은 각자가 나름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오늘날까지 살아온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로서도 슬픔이 어찌 없겠는가! 나는 아버지와 언니를 전쟁의 와중에 잃고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의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어린 자녀였던 나에겐 엄청난 비극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 가르쳐 주시던 중국 송나라의 시인 주희의 한시(漢詩)가 생각나 그 시를 읊조리다 보면 그래도 위로가 되어 나의 멘토가 되어 주셨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쉽게 슬픔에서 나를 추스를 수 있어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가 있었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經)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初夢)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주희-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려우니  한순간이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며 연못가에 핀 봄풀이 아직 꿈도 깨기 전 계단 앞의 오동나무 잎이 벌써 가을을 알리는구나”    

   나는 전쟁 중 겪은 잊히지않는 한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싶다. 전쟁이 발발하자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후퇴만 하고 있을 때였다. 원주까지 공산군이 쳐들어와서 아군이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을 때 미국의 B-29 폭격기가 안동을 원주로 착각하고 느닷없이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내 놀란 가슴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적군이 아닌 아군이 어처구니없이 안동을 폭격하기 시작 했을 때 우리 집에는 온 식구가 외출 중이었고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집에서 뛰쳐나와 앞 정원 울타리 주위에 심어둔 호박 넝쿨 밑에 몸을 감추고 오들오들 떨면서 숨어 있었다. 가족을 만나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박넝쿨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공습경보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잽싸게 거리로 뛰쳐나갔다. 나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다 영문도 모른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아군에 의한 오폭이란 것을 알고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 집은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안동이 불바다가 되어 훨훨 타고 있는 것을 한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으로 전국이 초토화되고 전쟁의 포화가 계속 울리고 있는 가운데  아닌밤중에 홍두께처럼 아군한테 뒤통수를 방망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참변을 당해야만 했던 사실이 어린 나이에 이해가 되지않아  큰 충격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다정다감했던 어린 시절 엄청난 전쟁을 뼈저리게 겪고 이젠 두 부모님 모두 이 세상 계시지 않지만 홀로 남아 우리 오남매를 훌륭히 키위 내신 어머님이 새삼 오늘따라 절절히 그리워진다. 전쟁의 고난 가운데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인내로 점철 된 평생을 사신 어머님의 일생이야말로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 파란만장의 삶을 사신 장한 우리 어머니였다. 창 넘어 뒤뜰에 핀 노란 장미가 유난히 오늘따라 내 마음을 조용히 바람도 불지 않는데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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