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정 고운 정

2011.06.01 00:41

김수영 조회 수:659 추천: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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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 고운 정                                                  金秀映     


   우리나라 속담에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깊다.’란 말이 요즈음 나에게 이토록 실감이 날 줄 몰랐다. 딸이 사는 북가주 새크라멘토에 와서 꼬마 숙녀들이 다 되어 있는 두 손녀를 보면서 어릴 적 키울 때 고생스럽던 기억은 다 사라지고 자란 모습에 마음이 얼마나 흐뭇한지 감격 속에서 함께 며칠을 보냈다.     

   나는 사 년 동안 두 외손녀 딸을 키우면서 정이 듬뿍 들었다. 말 잘 안 듣고 속 썩일 때도 미운정이 들었고 고분고분 말 잘 들을 때는 귀여워 고은정이 들었다. 큰 손녀가 세 살 때, 작은 손 녀가 한 살 때 애들을 좀 키워 달라는 딸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앞이 난감했지만 멀리 미시간 주에 사는 딸을 옆에다 두고 보고 싶은 생각에 그만 승낙을 하고 말았다. 손녀들이 귀여운 맛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쾌히 승낙하고 보니 나의 공적 사적 생활은 완전히 접어두어야 하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베이비 시터에게는 못 맡기겠다는 딸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의 고난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는데 한 살배기 손녀딸은 온 얼굴에 태열을 뒤집어쓰고 있서 병원부터 데리고 다녀야 했다. 세 살배기 손녀딸은 너스리스쿨(Nursery School) 에 등록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차 태워 주는 일도 나에겐 벅찬 일이었지만 기쁨으로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두 손녀를 데리고 코스트코에 쇼핑을 갔다. 차에서 내려서 두 손녀가 걸어서 주차장을 빠져나오기가 쉽지가 않았다. 두 살 난 손녀딸을 빈 카트 앞 높은 부분에다 앉히고 카트를 끌고 코스트코 입구를 향해 큰 손녀딸과 함께 걸어갔다. 차가 빨리 못 달리도록 만들어 놓은 속도 범퍼 (Speed Bump)에 카트가 걸리는 순간, 카트가 심히 아래위로 흔들리자 손녀딸이 그만 튕겨 나와 주차장 콩크릿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손녀딸이 뇌진탕으로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새파랗게 질려 손녀딸을 재빨리 끌어안자 그때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손녀가 기절을 했다가 끌어안는 순간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가 깨진 줄 알고 머리를 살펴보아도 피가 안 흐르고 온몸을 살펴보아도 뼈가 부러진 것 같지 않았다. 정말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 달려오는 소동을 피웠지만,   조용히 무마하고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끝내고 집에 오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래도 병원을 데려가야 하는지 걱정이 되어 딸에게 사실을 알려 의논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은 깜짝 놀라면서 얼마나 놀라셨느나며 나를 오히려 위로해 주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기가 그만하기를 천만다행이라며 자기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하루 견디어 보고 의사에게 가보자고 해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경 끼도 안 하고 잠을 잘 자는 모습을 보고 안심할 수가 있었다. 정말 천사들이 보호해 주었구나 생각하면서 그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소름이 끼쳤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는데…..,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연발 나왔다.     

   큰 손녀가 유치원(Kinder-garten) 과정을 끝내고 초등학교 일 학년에 입학하면서 하루에 두 번 왕복 차를 태워 주어야하는 번거로움이 계속되었다. 기쁨으로 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년이 수일같이 생각되면서 돌보았다. 하루는 큰 손녀가 감기가들어서 학교를 쉬게 되었다. 학교에다 전화를 걸어서 감기로 학교 못 간다고 통고를 하고  손녀가 기침이 너무 심해서 기침약을 사러 코스트코에 가야 하는데 집에는 마침 손녀들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큰 손녀딸에게 밖에 나 가지 말고 집 안에만 있으라고 부탁했다. 누가 문을 두드려도 문 열어 주지 말고 전화가 와도 절대로 받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했다. 미성년자들을 혼자 집에다 내버려 두고 집을 비우면 법망에 걸려 부모의 책임을 물어 처벌을 받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기약을 사러 가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손녀딸들을 집에 내버려 두고 한 시간 내로 빨리 갔다 올 생각으로 총총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조바심이 나서 약만 사서 허겁지겁 애들 걱정이 되어서 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어떤 여자가 현관 문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은 벌어졌다고 하는 생각이 번갯불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큰 외손녀 담임 선생이었다. 집에다 병문안 전화를 했는데 애들만 집에 있다고 큰 손녀가 말을 해서 놀라서 달려왔다며 캘리포니아 법을 알고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자기가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린 손녀딸들을 아무도 없는 빈집에다 내버려두고 무슨 불상사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위험한 일을 저질렀느냐고 힐책을 했다. 지금 경찰을 부를테니 이곳에 꼼짝 말고 서 있으라고 해서 너무 놀랐다. 미국에 삼 십여 년을  살았지만, 법을 잘 준수하고 살았는데 이 무순 날벼락인가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녀가 전화기를 들고 경찰에다 신고하려고 번호를 누르려 할 때 나는 담임선생께 내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간절히 구했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안 일어 날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이번이 처음이니 한 번만 봐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눈물을 글썽이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마음이 동했는지 전화기를 내리면서 한 번만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인정사정없이 경찰에 고발할 테니 정말 조심하라며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담임선생께서 큰손녀에게 빨리 쾌유하여 학교에 나오라고 말을 전하고 사라졌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There is no rule but has its exceptions)’를 생각하면서 미국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것을 재삼 깨달으면서 손녀 담임 선생께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미국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곤 했다. 정직은 최상의 정책(Honesty is the best policy.)이니 거짓말을 하지말고 솔직하고 정직해야 된다고 누누히 말을 해 왔다. 

   그러던 내가 큰 손녀에게 전화 오면 전화 받지 말라고 정직하지 못한 말을 하고 말았다. 손녀딸은 전화가 오니 안 받을 수가 없어 할머니 부탁은 아랑곳 하지않고 전화를 받고 선생님이 묻는 말에 정직하게 사실대로 고 해 받쳤던 것이다. 나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손녀 딸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정직도 늘 일상생활에서 정직한 말과 행동을 하는 훈련을 쌓아두어야 습관처럼 정직이 저 절로 배어나오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훈련이 얼마나 잘되어 있었나 나 자신을 저울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손녀딸에게 정직을 배운 것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암 워즈워스의 시(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가운데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란 말이 이때처럼 절실히 생각날 때가 없었다. 두 손녀딸을 키우면서 이런저런 일 등 가슴을 태운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두 손녀딸을 만나보니 얼마나 크고 의젓해졌는지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손녀딸을 키우느라 고비마다 어려움을 겪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루하루 이들과 함께 지나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형언키 어려웠다. 매일 애들을 데리고 주위 공원에 두 마리 개를 데리고 호숫가로 산책하러 나갔다.     

   손녀들은 할머니와 함께 살든 어린시절을 추억하면서 "할머니 사랑해.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 할머니 언제 또 와?"하면서 천사처럼 웃는 얼굴이 어찌 그리도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지 손녀딸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딸도 어머니가 손녀들을 키우시느라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아름다운 곳으로 관광을 많이 시켜 주어서 아름다운 추억을 안고 돌아가게 되어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엠트랙 기차에 몸을 싣고 14시간을 달리는 동안 미국와서 처음 장시간 기차여행을 하는 즐거움도 만끽했다. 태평양 연안 아름다운 바닷가를 차창 밖으로 내다보면서 어릴 적 바다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면서 놀던 아련한 추억들이 안개꽃처럼 곱게 피어올랐다. 그 꽃 가운데 두 손녀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떠오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예쁘게 수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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