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이주자들의 틈새를 보는 여성적 시선

2003.11.15 02:15

조정희 조회 수:925 추천:112

경성 대학 조갑상 교수의 소설 '그네타기' 서평
서평을 다시 보냅니다.




                [안정된 이주자들의 틈새를 보는 여성적 시선]


간단하게 소개된 작가의 약력이나 드물게 작품에 나타나는 이주의 첫 모습으로 헤아리건 데 조정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편을 따라 19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쯤에 이주했으며 아이들의 교육이 다 끝났을 무렵 소설쓰기를 했다고 보여진다. 그가 늦게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건 정착 초기의 어려움이나 아이들 키우기에서 오는 갈등이 끝난 뒤의 일이라는 것, 학창시절 가졌을 수도 있는 작가에의 꿈을 이 삼십대로 바로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수 있게 한다. 작가의 이러한 프로필은 그의 글쓰기의 내용과 양식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네타기}가 보여주는 세계는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곰삭은 이주자들의 삶이다. 열 편의 수록작품 어디에도 정착의 고통이나 불편한 한국에서의 시간이 지금의 삶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과거와 연결된 [바다와 목마]나 [사막에도 별은 뜨는데]의 경우에도 그 시간들은 현재의 삶을 어떤 차원으로든 승화시킬 뿐 땀흘리게 하지는 않는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지나지 않지만, 안정된 삶의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음은 등장인물들의 나이와 성(性), 그들의 직업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은 대개 중년을 맞이했거나 그보다 조금 위의 세대이며 여성들이 주인물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의사나 공인회계사 남편을 두고 있으며 미혼일 지라도 신문사 기자([꿈꾸는 티아레])거나 교직([그네타기])에 종사한다. 외로운 미망인([겨울비])이나 병든 남자([그 후에 내린 비])도 경제적인 어려움에서는 일단 벗어나 있다. 그들은 [겨울비]의 인혜처럼 <목요회>라고 불리는 명상집회에서 상류층인사들과 교류하고, [꿈꾸는 티아레]의 혜리는 여가 삼아 화랑을 운영하며 [여행 파트너]의 지나는 별거한 남편의 생활비로 여행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는 못하다.
성공한 남자들도 그들이 지적이나 경제적으로 도달한 만큼의 행복지수에는 도달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후의 언덕]에서는 신경쇠약을 앓는 아내 때문에, [마리아의 꿈]에서는 재혼까지 했지만 안정을 찾지는 못한다.
결국 조정희는 오랜 이민생활 끝에 여유 있고 안락하게 보이는 인물들의 뒤에 숨겨진 크레바스 찾기를 그의 소설세계로 한다.
그의 소설에는 체류 신분의 문제라거나 이주자들이 필연적으로 겪는다고 볼 수 있는 이세들의 문제가 주요갈등이 되지 않는다. [운전면허증]에 나오는 아들은 시아버지 이야기를 위해 등장할 뿐이며, [마리아의 꿈]에 나오는 닥터 김의 아이들도 갈등의 핵심에서는 비켜나 있다. 한국적 가족 제도의 모습은 아들 내외가 다른 지역으로 떠난 뒤의 형편이 고려된 [운전면허증]과 고부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된 [그 후의 언덕]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인과의 교류도 자연스럽다. [마리아의 꿈]에 나오는 마리아는 비록 가정부지만 준가족에 가깝고, [그 후에 내린 비]의 '나'는 잭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이고 인간적인 교류를 나눈다.
  {그네타기}는 실로 미주이민 100주년이라는 만만찮은 세월이 문학의 소재와 주제의 측면을 어떤 지점에 이르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한국소설사에서 '망명지소설'이라는 고통스런 역사현실을 껴안은 채 시작된 미주이민문학이 이제 고향과 향수, 분단국가로서의 불안정한 한국의 모습과의 연계성을 떠나서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주한 땅에서의 묵은 삶의 기반 위에서 어떤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지를 {그네타기}는 따져보는 것이다.
최근 비평계에서는 재외한국인작가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편이다. 그 논의는 사용언어에 관계없이 '누가', '무엇을' 썼느냐에 중점을 두어 재외한국인 문학을 한국문학, 또는 민족문학에 포함시켜야 하며, 그런 틀에서 영어와 일어, 한글로 쓰여진 재외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루는 시각이다. 국적이 어디든, 사용언어가 무엇이든, 일세든 이세든 관계치 않고 눈여겨본다는 것은 디아스포라로서 '무엇을' '어떻게' 썼나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이주자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써야한다는 건 한편으로 부당한 면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재외작가들의 특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체성문제라든지, 문화적 충돌, 고향에 대한 또다른 시각 등은 조정희에게도 부여된 작가로서의 멍에일 것이다. 그것은 곧 두 개의 땅에서 보낸 시간으로 얻어진 나름대로의 의식과 시선을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 집요하게 투영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운전면허증]의 집요한 고집을 부리는 시어머니가 생생한 캐릭터로 다가오고, [그 후에 내린 비]의 잭과 제니와의 만남을 통해 고통을 나누는 설정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유상과 이주 이세로서 미국인으로 살면서도 한국말을 구사하는 수잔과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내용의 전달에 끝나지 아니하고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작가의 고통과 즐거움이 따르는 양식이다.
열 편의 작품은 묘하게도 일인칭의 세계와 삼인칭의 세계로 양분되고 있다. 그리고 일인칭이라 하더라도 내부시점의 우세보다는 외부시점이 우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서술의 방법에서 묘사에 의한 간접제시 보다는 직접설명이 많이 나타나며 심리상태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특징을 부여하는데, 그건 소설 내부의 긴밀성을 훼손하는 일이 있더라도 스토리를 끌어가는 서술자의 힘에 쓰기를 의존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서술자의 경륜이 요구하는 자연스런 조건이면서 잘 읽힌다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세밀히 말할 수 있다면, 3인칭으로 쓴 [바다와 목마]의 경우 지숙이라는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그 인물이 보고 생각한 걸 일관되게 쫓는 인물시점이 명백하게 효과적일 텐 데도, 부분적으로 박선생에게도 초점을 주어 작품이 온전하게 획득할 수 있는 힘을 반분시키는 점등은 지양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울러 단편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단일성과 통일성에서 여로형 구조의 장단점에 신경을 쓸 필요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세계를 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정희의 첫 창작집은 그런 면에서 '쓸 수 있는 것'을 썼다고 보여지며 바로 그 지점에서 이민소설의 영역을 한 단계 확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재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가능성을 작품 곳곳에 -[바다와 목마]의 4.29폭동에 대한 재기는 물론 재혼을 유예하는 [겨울비]의 기다림까지도- 열어둠으로써 이민사회의 정신적 양식으로 소설을 자리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조갑상(소설가. 경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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