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코스모스

2003.12.12 01:38

조정희 조회 수:992 추천:132

9월 말경 한국 여행을 계획하면서 당연히 낙엽을 볼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십 년만에 찾아가는 고국 방문이라 노랗게 물든 가로수 은행잎, 설악산을 화려하게 장식할 단풍잎을 그려보며  마냥 꿈에 부풀었는데, 서울에 있는 친구로부터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단풍을 보기엔 좀 이르고, 아마 코스모스는 실컷 볼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여기 엘에이에서도 교민들이 코스모스 씨를 심어서 가끔씩 그 꽃을 볼 수 있었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 얇은 홑겹 꽃잎을 피우면서 한들한들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애잔한 그리움과 옛 기억을 불러오곤 해서 바라보는 마음이 흐뭇했었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소슬하게 불기 시작해 하늘이 높아져 맑은 구름아래 피어있어야 제격인데, 여기서 피는 코스모스는 철없이 아무 때나 피어나 보는 이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뜨거운 여름철이나 비가 내리는 겨울철에도 마다 않고 피어서 나약한 멋을 뽐내지만, 전혀 가을 기분이 나질 않았다.
  기찻길 옆이나 들녘 길가가 아니고, 강렬한 햇볕이 내려꽂히는 대낮, 엘에이 전형적인 납작한 집 앞뜰에 핀 코스모스는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코스모스 같지 않아 많이 낯설었다. 그런 낯 섬 속에서도 그 꽃은 언뜻 언뜻 스치는 벗들의 웃음소리와 오래 전의 추억들을 내 눈앞에 재연시키곤 했기에, '아 하, 이래서 비록 사막의 땅이라 할 지라도 코스모스 씨를 옮겨다 심은 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씨를 심고 물을 주어 키우는 수고를 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꽃을 보게 되었다.

  섬진강은 전라 남북도의 동부 산지를 관류하는 강으로 진안군의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임실, 남원, 구례마을을 지나 경상남도 하동을 거쳐 남해에 이르게 돼 있다.
  지리산에서 하룻밤을 지나고 다음 날 새벽 동틀 무렵부터 화엄사로 산길을 따라 올랐다. 좁은 등산로로 절에 이르는 길은 양쪽에 나무들이 우거져 신록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친구의 말대로 한여름처럼 녹음이 짙푸른 색을 띄고 있을 뿐 낙엽이 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리산의 구월은 아직 가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나는 고향의 가을다운 참 모습을 놓치는 것 같아 자꾸 아쉬움만 남아 돌아온 길을 연신 뒤돌아보았다.
  '너무 일찍 와서 고국의 가을을 못 보고 가는구나' 하는 후회가 들 즈음, 내 눈앞에는 섬진강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강 뒤로는 겹겹이 이어지는 산지들이 참으로 정겹고 아기자기 한 모습으로 산야를 이루고 있는 것이 내가 동양화의 캔버스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강변으로 각가지 색상으로 피어난 코스모스들이 빽빽하게 줄을 지어 나풀거리고 있는 게 마치  힌 나비, 분홍 나비들이 화려한 춤을 추는 무도회장 같았다. 이 환상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순간을 가슴에 담아가기로 했다. 전에도 후에도 이와 똑같은 시간은 없을 줄 알기에,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야 한다고 맘먹었다.
  매화마을이라 불리는 구례에 이르기까지 줄곧 코스모스가 핀 섬진강 강변도로가 이어진다. 이른 봄 철엔 여기는 매화꽃으로 하늘을 뒤덮는다고 한다. 연분홍 매화꽃 잎이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상상하면서 매화 마을에 들러 매실주도 마셔보고 매화 향기 그윽한 차도 맛보며 구례를 떠나 왔다.
  섬진강 강변에 핀 코스모스는 내게 고국의 가을의 멋을 한껏 안겨주었다. 누군가가 씨를 구해서 사막 땅 엘에이에 심은 코스모스가 주던 왠지 아쉽고, 억지로 낸 듯한 가을 기분이 아니라 소녀 시절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 다발 꺾어 책상에 놓고 맘껏 행복해 하던 똑 같은 느낌을 전해주었다.
  섬진강에서 본 코스모스는 낙엽을 못 보고 가야만 한다는 안타까움을 가라앉혀 주었고, 가을을 실어오는 프레리우드 멜로디처럼 몸을 스치고 마음을 건드렸다.
  우리 나라의 강과 산들이 세계의 어디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뿌듯한 자부심마저 심어준 고국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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