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증

2003.04.14 07:57

조정희 조회 수:1223 추천:96

단편소설 4 (Short 4)
       운전 면허증
1. 아버지의 날개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L.A.에 비가 오는 토요일이다. 아침에 민 선생으로부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받은 후로는 아버지는 민 선생 댁에 가야 한다면서 아들에게 차 열쇠를 달라고 졸랐다.
  민 선생은 오랜지 카운티 애나하임 시에서 시계 업을 하고 있는 분이다. 보석상에서 시계 수리를 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때가 되어 자신의 시계 방을 차리는 게 염원이었다.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아무리 거리가 멀더라도 민 선생 가계에 가서 운영 방식과 시계 수리에 있어 새로운 기계도입을 알아 볼 겸 자주 가곤 했다.
"아버지, 가시더라도 다음 날 가세요. 오늘은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단 말입니다."
"오늘 오라고 했는데. 아까 그 전화에서 민 선생이 나보고 오늘 오라고 했어. 내가 절대로 속력 내지 않고 쉬엄쉬엄 갔다 오마. 푸리웨이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고 제일 바깥 길로만 갈 테니까 염려 말고 내 보내주렴. 너의 어머니하고 얼른 다녀올게"
  시부모는 아들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어느새 외출복 차림을 하고 거실로 나와 있었다.
"아, 글쎄 다른 날 가시라는데 왜들 이렇게 고집이세요? 아니, 어머니까지 이렇게 나서면 어떡합니까?" 아들의 말에 대꾸도 않고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자세였다.
  남편은 어느 때 보다도 부모님이 운전하는 것을 말렸다. 어쨌든 운전 면허도 있는데 너무 한다 싶어 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여보, 열쇠를 드려요. 우리가 곧 이곳을 떠나게 되니까 부모님의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내 말을 듣고 수궁이 가는지 차 열쇠를 아버지 손에 건네 드렸다.
  '여긴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이라서 모든 운전자들이 비에 서툴거든. 교통 사고는 자기만 잘 한다고 안 생기는 건 아니잖아? 괜히 운 나빠서 사고 나면 어떻게 해. 고속도로에서 사고 나면 몇 대가 겹쳐서 충돌하는데.....' 남편은 계속 걱정이 되는지 부모님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잡지 못했다.
  왠지 불안하고 선뜻 부모님을 내 보내고 싶지 않은 남편의 예감을 존중했어야만 했다.
남편의 느낌을 따라서 나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 시부모의 외출을 부추기지 말았어야 했다. 시부모는 자동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 가운데 기다림은 피가 마르는 것 같다.
  아파트의 드라이브 웨이로 불빛이 환히 비추이면, 남편은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버지가 모는 차는 아니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으나 기다리는 부모님의 차는 들어오지 않고, 적막하고 깊은 한 밤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벨소리는 요란하다 못해 망치로 머리를 치는 듯한 전율이 전해오는 소리였다. 나는 전화 바로 옆에 있었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밖만 내다보고 있던  남편이 전화기를 들었다.
"네. 맞습니다. 네? 그래요? 두 분 다 다쳤습니까? 어디요? L.A. 카운티 허스피털? 네. 곧 가겠습니다." 이상의 말들이 내가 남편 옆에서 들은 말이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 얼굴이 허옇게 질리더니 입술과 턱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손도 부들부들 떨었다.
  5번 프리웨이에서 비에 미끄러져 몇 중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새벽 1시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래층 3호실 총각 미스터 김의 방문을 두드렸다.  새벽 깊은 잠에 빠졌던 총각은 놀라고 무슨 영문인지 모를 표정에 머리도 만지지 못한 채 순순히 운전을 해 주었다. 얼떨떨하고 경악된 기분인 세 사람은 L.A.카운티 병원이기도 한 U.S.C. 메디컬센터로 달려갔다.
  병원 응급실엔 각종 사고 낸 환자들과 가족들로 한 낮을 방불케 번잡스러웠다. 병원에서만 나는 야릇한 약 냄새가 코를 찌르다 머리까지 올라가 현기증이 나기 직전이었다. 응급실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다. 어머니는 10분전에 중환자 실로 옮겼다하고 아버지는 어떻게 됐는지 그 당시는 아무도 모르는 듯 싶었다.
  남편은 여기저기 수소문 해 보더니, 턱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백인 의사와 심각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내게는 기다려라 혹은 따라 오라 등의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의사를 따라갔다. 나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속수무책으로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에 남편은 무엇인가 들어있는 하얀 비닐 백을 들고 그 닥터와 함께 나타났다. 나는 빨리 일어나 남편에게서 백을 빼앗아 내용물을 드려다 봤다. 거기엔 아버지가 집을 나설 때 입고 나간 옷들과 구두와 안경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활짝 웃고 찍은 사진이 붙어있는 그의 운전 면허증도 함께 있었다.
  넋 나간 듯이 서있는 남편에게 차마 상황을 물어볼 수 없어 그의 옆에 서있는 닥터에게 시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는 병원에 옮겨지자마자 숨을 거두었습니다. 뇌출혈은 없는 것으로 보아 심장마비로 숨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그의 와이프는 지금 중환자 실에 있는데 속으로 출혈이 심해서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버지를 뵐 수 있을까요?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요."
"보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당신의 남편이 다 확인했으니까요."
"그럼, 어머니라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녀는 아직 의식 불명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의식이 회복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사라지자, 남편은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지 흑흑 느끼다 못해 나중에는 꺽꺽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나는 남편의 넓데데한 등을 쓰다듬으며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았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 이 바로 나라는 느낌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눈의 눈물은 피가 나는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동이 훤히 터 올 무렵 5시경에 어머니 마저 운명하셨다. 기어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숨을 거뒀으니,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버지와 같이 눈을 감은 셈이다.
  겨우 두, 석 달 타자고 그렇듯 아버지를 못살게 굴어 운전면허를 받게 했는지? 운전하는 남편 옆에서 고작 2,3 개월 살자고 매일같이 운전면허 타령을 하며, 아버지의 위신을 그렇게 짓밟았는가 생각하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살아있는 게 산 것이 아니다. 죽음을 등에 질 머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자기네 갈 때는 아직도 먼 양 죽은 자들을 보내며 울고 또 운다.
  나는 왜 그다지 시아버지의 운전면허를 위해 교양이나 인격마저 저버린 행위, 자칫 발각되면 이 나라에서 추방당할 지도 모르는 속임수를 써가면서 까지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는지 후회막급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운전면허가 남편을 졸지에 고아로 만드는데 오히려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시부모의 참담한 교통사고는 내가 운전 면허를 받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리게 했다. 자동차는 생명을 내놓고 타야하는 괴물인 것처럼 느껴져 안 탈 수 있으면 안 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하이오 주에 가서도 아이를 둘을 낳을 때까지 운전면허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운전을 못해서 아이들에게 오는 불이익을 알게 될 때는 목숨을 내놓고라도 면허를 따야겠다는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2. 아들의 아이디(I.D.)

  파사데나 시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장은 글렌데일 시에 비해서 덜 붐볐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고, 시험관들은 맘씨 좋은 표정에 훨씬 여유가 있어 보여 우선 내 마음이 놓였다. 나 보다 더 아들, 스탠의 심리를 편케 해준 것은 그 도시의 거리가 한적하고 운전하기에 편토록 넓으면서 곧은길이란 점이다.
'스탠리 홍, 자동차를 이리로 가져오세요.' 아들의 이름을 부른 시험관은 키가 작은 여자였다. 남자 시험관이 아닌 것도 다행인데, 웃는 낯의 상냥한 여자를 만난 것은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스탠은 시험관의 인상이 일단 마음에 들었는지 잔뜩 굳어있던 얼굴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3주 전 글렌데일 시에서 시험을 칠 때보다는 긴장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떨리는지 엄마인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 불안이 서렸다.
  다시 한번 나를 뒤돌아보며 근심에 찬 눈빛을 남기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스탠은 열 여섯 번째 생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학교에서 운전교육 학과를 택할 수 있는 연령이 되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 교육을 받는 그 학과를 이수하게 되면 운전 실기를 할 수 있는 허가증(Permit)을 받는다. 그 후에 이 허가증을 갖고 운전학교를 가거나 부모 혹은 친척 친지로부터 실기를 습득한 다음 시험을 치르게 된다. 운전 실력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시험에 응시하게 되지만, 첫 번에 합격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십대 청소년들에겐 후에 운전하는데 조심을 기하기 위해 시험관들이 더 까다롭게 점수를 메긴다고 들었다.  거의가 다 처음 시험을 치를 때는 심리적으로 긴장하고 초조한 상태에서 임하기 때문에 본의 아닌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내 아들 스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열 여섯 살이 된 스탠은 갑자기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말끝마다 나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다라는 말을 강조할 뿐 아니라 엄마와 아빠의 대화에 참견을 하거나 끼어 들기를 원했다. 그 때마다 나도 조금만 있으면 운전면허도 받게 되는 어른임을 앞세웠다. 그런가하면  엘에이 타임즈를 읽고는 시사에 열을 올리기도 하는 전에 하지 않던 짓으로 성인이 다 됐음을 나타내려 애썼다.
  십대의 아이들에게 운전면허증은 새로운 세계로 접하게되는 열쇠를 소지하는 것과 같다.
적령기가 도달하기가 무섭게 운전면허를 취득하려고 애쓴다. 이 일은 옛날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것 같아서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과 흡사하다. 여기 애들은 운전을 함으로 자기네들이 어떤 변신이나 하는 것처럼 흥분하고 가슴 설레어 한다.
  자식들이 운전하는 날부터 부모들은 차를 마련해줘야 하고 보험을 들어줘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에 시달려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 뿐인가. 엄청난 교통량 가운데 속력을 마구 낼 수 있는 이곳 프리웨이에서 청소년들이 기분 내고 얼마든지 달리게 마련이니, 사고를 낼 확률은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십대 애들이 있는 집의 차 보험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이런 저런 부모의 염려는 아랑곳 않고 스탠은 운전 시험 볼 날만 달력에 지워가면서 기다렸다. 그 즈음에 그의 나날들이 흥분과 기대 속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그의 여자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스탠의 어조나 대화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헤이 제니퍼, 다음 목요일에 내가 운전 시험을 보는데, 면허 따면 너를 태우고 제일 먼저 드라이브 시켜줄게. 아니 영화구경 가면 어떨까?' 저쪽에서 우선 면허나 받고 나서 결정하자는 지, '문제없어, 그건 피스오브 케익' 노 프러블럼.' 자신 있게 떠들면서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렇게 자신 만만해 하던 녀석이 운전 시험에 불합격을 했다.  운전 학과목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고, 실기도 정규 운전학교에서 12시간 이상 교육을 받았기에, 나도 스탠이 운전 시험에 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스탠의 성품이 그의 누이동생에 비해 침착하고
서둘지 않는 편이라 시험에 앞서 떨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갖고싶거나 도달하고 싶으면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듯이 스탠도 평소 같으면 절대로 내지
않을 실수를 만들고 말았다. 그는 시험관이 옆에 앉자마자 아무 생각도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앞이 깜깜했다. 안전벨트를 매야한다거나 뒤와 옆을 볼 수 있는 거울을 조절하는 것 등의 운전교사가 사전에 일러준 지시 사항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험관이 좌측 깜박이를 켜보라고 할 때 스탠은 잘 못 눌러 라이트를 깜박인 게 아니라 앞 유리에서 물이 마구 솟았다. 그 때 그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다리가 떨려 운전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핸들을 잡은 손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더 이상 악세레이터를 밟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운전시험은 보나마나 뻔했다.
  불합격한 시험지를 보니, 좌측으로 돌 때 너무 급작스럽게 돌았다, 건너편에서 오는 차량에 우선권을 주지 않고 그냥 돌았다, 이런 것들은 아주 기본적인 상식인데 점수가 감해졌다.
게다가 치명적인 잘못은 우측으로 도는데 너무 심하게 핸들을 틀어 도로의 커브로 차가 올라간 것이다. 시험관의 안색이 붉어졌다. '오늘은 이만 하지.' 하며 돌아가자고 했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나는 아들에게 할 말을 찾았다. 어쩌면 첫 번에 덜컥 합격하는 것보다는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게 여러모로 스탠에게 유익할 거라 여겨져 시무룩한 표정에 울상이 다 되어 나오는 그를 향해 말했다.
"스탠, 잘됐다. 한번쯤 떨어지는 경험을 해야, 후에 신중하게 운전을 하게된다. 그러니 좀 더 연습해서 다음에 잘 치도록 해라."
"엄마, 뭐가 잘됐다고 하는 거지? 떨어진 게 잘 됐단 말이야? 난 화가 나서 죽겠는데. 에잇 재수 없게 아주 까다롭고, 인정 없는 시험관을 만났어. 어떻게 3주나 더 기다리지?..."
"네가 잘못해놓고는 누구 탓을 해? 그래 시험관이 너보고 그렇게 하라고 시켰니? 못 된 것.  엄마는 세 시간이나 참고 기다려줬는데 내게 화풀이를 해!"
  나는 스탠의 등을 세게 한 대 갈기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이놈아, 너만 떨어지는 게 아냐. 뭐 그만한 일 가지고 사내녀석이 눈물까지 보여? 다시 치르면 되는 걸 가지고....."
  얼마나 원했던 면허증인가, 그리고 그것을 받은 후에는 친구들을 태우고 한바탕 으스댈 판이었는데 상상외에 불합격이니 스탠의 낭패감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킨다거나, 자길 위해 오랜 동안 기다려 준 엄마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을 잘못된 행위라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진 내 말을 듣더니 스탠은 금새 미안하고 무안한 듯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앞서서 걸어갔다.
  스탠은 운전시험을 첫 번으로 합격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수치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재시험을 치기까지 3주 동안은 외출도 하지 않았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차를 끌고 나가 한가한 길로 나가 운전을 익혔다. 첫 번엔 실패를 했으나 두 번 째엔 필히 합격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미리 운전 시험장을 다 돌아보며 사전 답사를 충분히 했다. 그 후에 알아낸 것이 글렌데일 시보다는 파사데나 시가 훨씬 길이 운전하기가 쉽고, 시험관들도 덜 까다롭게 군다는 사실을 먼저 시험을 치른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었다.

  수험생들이 차를 끌고 오는 길 제일 끝에 스탠의 진한 밤 색 혼다 아코드가 보였다.
그의 앞으로 두 차가 시험관들을 태우고 길을 빠져나가자, 스탠의 차가 그 마음 좋아 보이던 시험관 앞에 스르르 다가와 멈췄다. 시험관이 운전석 옆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빌었다. 오늘은 제발 지난 번 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침착하게 아들이 잘 해 낼 수 있기를 바랬다.
  스탠과  시험관이 탄 차가 앞으로 직진해 교차로 지점에서 돌려고 오른쪽 깜박이를 키고 있다. 스탠의 차가 골목길로 꼬리를 감추자, 다 잊은 줄만 알았던 운전 면허에 얽힌 옛 일들이 너무나 선명히 살아났다.

3. 대리 시험

  나와 남편이 부모님과 함께 이민 왔을 때는 1969년도였다. 미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이곳 생활에서 발과 같은 거라서 운전을 못하게 되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불구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젊은 사람들이나 영어를 해독하는 층에겐 운전면허 받는 것이 별 문제가 안됐지만, 스탠의 조부, 홍석우씨에겐 커다란 난제였다. 우리가 이민 왔던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한국어, 중국어, 일어 등으로 운전시험을 치르지도 않았고, 외국어로 가르치는 운전학교는 한 군데도 없었다. 오직 영어로만 통하던 시기에 영어는 한마디도 구사 못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시아버지의 처지로는 운전면허증을 따내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했다.
  그럴 바엔 아주 운전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들 며느리의 차를 얻어 타거나 공중 교통을 이용하면 편할 텐데, 홍 노인 부부는 운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님은 단순한 성품이라 안 될 거라면 포기도 쉽게 하는데 반해 어머니는 남이 하는 일이라면 다 해야하고, 특히 자신보다 남의 눈에 비치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만큼 비교의식이 강했다. 50대 초반의 연령이었던 그분들이 영어를 배워 운전면허를 따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운전하기를 강요하는 습관은 매일의 일과처럼 반복되었다.
"당신보다 나이 많은 김 집사도 운전하고 다니는데,... 한 번 힘을 내 봐요."
".............."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한 번 타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머니의 입버릇처럼 나오곤 하는 이 말은 아버지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자존심을 긁어놓았다. 아버지는 부모를 잘 못 만나 중 고등 학교도 다니지 못해 영어는 알파베타도 모르는 자신의 형편을 늘 자조하며 지냈다. 학력이 없는 대신 아버지에겐 시계를 수리하거나 만질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닦아온 생활력, 무슨 일이 있어도 식구는 가장이 거두어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 때문에 한국 땅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용기와 또 고국을 등지고 미국 땅으로 이민 올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배우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아 아들만큼은 최고학부를 나올 수 있게끔 뒤를 밀어줬으며 평생 밥걱정 않고 살기 위해서는 뭔가 특수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꼭 의과를 지망하기를 권했다. 결국은 의사가 된 아들을 앞세우고 미국 땅으로 왔더니 이젠  우리말 아닌 영어가 막혀서 아내에게 무시를 당하는구나 생각하니 아버지는 자신의 상황이 형편없이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운전을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랄까, 위축감은 일요일에 더욱 심했다. 한국인들만 모이는 한인 교회는 일주일 동안 서투른 영어로 직장에서 통하다가 마음놓고 조국어로 지껄이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영어를 일상 용어로 써야하는 고충은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 한인 교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면서도 모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공동체였다.
"홍 장로님, 한국서 운전을 배우고 오셨지요? 그럼 필기 시험만 치르면 되는데....시험 용지를 얻어다 아들에게 한글로 번역 해 달래서 달달 외우는 도리밖에 없어요. 자식 차도 노상 타기는 눈치가 보이지요. 여기서 운전을 못하면 발이 없는 거나 만찬가지입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지 점점 힘들어져요."
"그럼요. 아드님 내외한테 애라도 생겨봐요? 언제 부모 태우고 다닐 수 있나요. 자기 코가 석잔데..."
  교회에 가서 이런 얘기를 듣고 온 날은 틀림없이 부모님은 언성을 높여 다퉜다. '자기네 걱정이나 할 것이지. 남보고 운전하라 말라  걱정도 팔자여. 참 아니꼬워서....' 퉁명스럽게  내뱉는 어머니의 말을 아버지는 이렇게 받았다. '다, 우리 생각해서 하는 얘기인데, 뭘 그렇게 신경 쓰나? 내가 모자라서 못 하는 걸 누구 탓 할 수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버님은 점점 위축되어갔고 운전에 대해서는 죽어도 못할 것처럼 포기해버린 표정이 되어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더 한층 기가 나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당신이 뭐가 부족해요? 다리가 없어요? 팔이 없어요? 당신만 못한 김 집사도 사방 팔방 다 돌아다니는데, 사지육신 멀쩡한 당신이 왜 운전을 못해요?' 어머니가 아버님과 비교해서 못하다고 하는 김 집사란 사람은 무슨 연유인지 다리를 약간 절었다. 그러나 그는 옛날에 전문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영어를 읽고 쓸 줄 알고 발음이 딱딱하고 어색한 억양이라 할지라도 하고싶은 말을 다 구사 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김 집사 얘기만 나오면 아버지는 영어를 배우지 못한 자신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투정은 그녀가 아침에 바느질 공장으로 출근을 하면서 시작되곤 했다. '아유 이 년의 팔자는 무슨 팔자 길래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바느질을 해야하나. 그것도 버스 타고 다녀야 하니... 미국은 괜히 왔지. 한국에 있었으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아도 되는데... 오늘도 버스 안에서 각종 인종에서 나는 냄새 맡으며 정신 나간 듯한 늙은이들의 중얼거림을 들어야 하는 이 년의 신세가 참 볼 만 하구나.' 야유와 자조 섞인  어머니의 넋두리를 들으면서도 아버지는 여유 있게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아, 에어콘 씽씽 들어오는 시원한 버스가 얼마나 좋아? 차가 커다라니 부딪쳐도 다칠 우려 없고, 내가 운전하며 신경을 안 써도 되니 금상첨화지. 안 그래?' 눈을 찡긋 하면서 어머니를 웃음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훌쩍 아파트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했던 것은 나도 마찬 가지였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을 매일 아침 깨워서 운전을 부탁하느니, 차라리 조금 일찍 나가 내 마음대로 걷거나 버스를 타는 편이 편했다. 나야말로 아버지 말처럼 내가 운전하면서 사고 낼까봐 신경 쓰느니 속 편히 걷거나,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싶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운전하라고 졸라대는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나도 남편이 운전을 못 한다고 생각하면 어머니의 처지를 조금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운전하고 내가 못하는 것은 운전을 전혀 할 가망이 없는 어머니가 남편, 아버지를 운전하도록 부추기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늙어가면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남편이 남들 다하는 운전을 못해서 우린 여생을 병신처럼 살아야한다고 훌쩍훌쩍 우는 날도 더러 있었다. 이상할 만큼 남편이 운전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처지가 제일 안타까운 지경에 처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머니는 아무리 봐도 지나쳤다. 또한 아내 눈치만 살피느라 떳떳이 가장 행세 한 번 못하는 아버지가 나는 더 민망스럽고 안됐었다. 미국 오기 전 까진 그래도 30년이 넘게 가족을 부양한 사람이 아닌가. 그 정리를 생각한다면, 운전쯤 못하는 것 가지고 그토록 못 살게 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죄로 그가 치르는 노력은 대단했다. 날이 어둑어둑 하도록 어머니가 귀가하지 않았을 때는 꼭 버스 정류장에 마중을 나간다. 한 달에 한 번씩 버스 패스권을  월말에 사야하는데 그 날짜를 어기는 법이 없다. 그 뿐 아니라 영어도 모르는 분이 어떻게 그리 버스로 선을 소상히 알고 있는지, 몇 번 버스를 어디서 타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갈아타야 하면 어느 지점에서 무슨 버스를 타야하는지를 다 꿰뚫고 있었다. 주말엔 아버지가 운전은 못 하지만 버스를 타고 엘에이 다운타운까지 가서 어머니와 함께 일본 영화도 보고, 간단한 쇼핑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끔 신경을 쓰고 배려를 했다. 그런 정도면 애쓰는 남편의 수고를 고맙게 받아주고 더 깊은 애정을 느낄 법도 한데, 어머니는 전혀 달랐다. 꼭 아버지가 할 수 없는 상황을 끄집어내서 그의 속을 긁어놓곤 했다.
'이 집사는 운전하고 빅베어 산에 가서 고사리를 많이 따 왔대요. 나도 한 번 가고 싶은데..'
'그럼, 따라가지 그랬어?'
'남의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말이죠. 그 집 마누라 눈치 살피면서요. 세상에 자기 영감이 제일 잘 난 것처럼 우세를 떠는 꼴이란 아니꼬워서 볼 수 없을 정도라고요. 이 집사처럼 양순한 사람이니 그런 여편네 데리고 살지, 아마 당신 같으면 벌써 갈라서자고 했을 걸. 미국에 오니 뭐니뭐니 해도 영어 할 줄 알아야 하고 운전 할 줄 알아야 사람 구실 하는 거지.' 어머니의 푸념은 끝이 없었다. 내가 듣기에도 거북스러웠는데, 그녀의 마침표 없는 바가지는 결국에 아버지의 심지를 흔들어놓고 말았다. 참고 참아왔던 화의 불씨를 건드린 것이다. '아 그렇게 운전하는 남정네가 좋으면 나가서 그 사람하고 살아! 난 아무래도 운전은 못하겠으니. 원 하구한날 운전 타령이 입에 붙었으니 이 여자하고 못 살겠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나잇살이나 든 양반이. 어떻게 잘 해보자고 하는 얘긴데.. 왜 그렇게 신경질 조로 말해요? 사지 멀쩡한 사람이 남 다하는 운전을 못해서 다리 병신모양 살아야 하니 화가 안나요?' 어머니는 턱을 치켜들며 아버지에게 달려들었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분노가 서리다 못해 서글픈 시선으로 변해 버린다.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를 나도 뒤따라갔다.
"아버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뭔데?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되겠냐?" 그는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버님, 운전 면허 따도록 하십시오. 제가 도와드릴게요. 운전 실기는 한국서 많이 해서 자신 있다고 하셨지요? 그럼 필기 시험은 제가 대리로 쳐드릴게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아버지를 향해 좀더 자신 있게 힘주어 말했다.
"제가 운전 시험장에 가 보았는데요, 얼마든지 대신 칠 수 있게 돼 있어요. 시험을 앉지도 않고 서서 치는데 줄로 막아놓았을 뿐 누가 딱 부러지게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제가 시험지에 아버님 이름을 쓰고 다 마친 다음엔 나오면서 옆으로 슬쩍 전해드릴 겁니다. 바로 근처에서 제가 시험 끝날 때까지 지켜보고 계시면 되요. 그 후에는 시험관 앞에서 시력 검사하는 과정만 남는데 거기에는 영어가 필요 없어요. 또 아버님은 알파베타는 읽으실 수 있으니까, 렌즈 안에 보이는 글자를 소리내어 읽으면 끝나는 거 예요."
  내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동안 아버님은 여러 번 얼굴빛이 달라졌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정말 해 낼 수 있겠느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생에 누구를 속인다거나, 일부러는 거짓말도 잘 못하는 성품이다. 아주 소심한 편인 그가 이런 속임수를 시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겁이 많은 여자인데 어떻게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에 발각될 경우를 생각했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텐데, 다만 운전 필기 시험을 못 쳐서 운전을 못하는 아버님의 딱한 처지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사기에 해당하는 불법을 해서라도, 운전면허를 아버님에게 꼭 안겨드려야 했던 것은 그 해 여름에 남편과 나는 엘에이를 떠나 오하이오 주로 이사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떠나고 없을 때에 어머니로부터, 또는 교회의 친구들에게 받을 아버지의 고충이 오죽이나 심할 까 싶은 마음에 겁 없이 저지른 엄청난 모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싫다거나 못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너만 믿는다'라는 호응 반 두려움 반이 뒤섞인 눈빛을 보이면서 대답을 대신했다.
  DMV(차량등록국)에서 캘리포니아 운전자들을 위한 교통법규 책을 구해 몇 번을 읽고 암기해야 할 것들은 모두 외웠다. 또한 먼저 운전 시험을 치른 사람들의 시험지를 얻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운전을 해 본 경험이 없던 내가 교통법규를 영어로 읽고 이해하자니, 용어들이 생소해서 얼른 뜻이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밤늦게까지 읽고 또 읽어서 거의 완전하다 싶게 익혔다.
  아버지와 내가 함께 시험을 보러가던 날은 2월 초 경의 어느 흐린 날이었다. 그 날 아침 어머니는 직장으로 나가면서 내게 '잘 해라. 침착하고. 우린 너만 믿는다.' 이 말을 하면서 내 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시어머니에게 받은 따듯한 말과 손길이었다.
  대리시험을 모의하면서 제일 조바심을 내며 마음을 조리는 사람은 역시 아버지다. 그 다음은 오히려 나보다 더 근심을 하고 이래도 되는 거야 하며 겁보 같은 눈망울을 굴리는 남편이다. 아버지는 원래 조급증이 나고 걱정거리가 있으면, 화장실을 자주 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도 소변이 아니고 대변이니 내가 염려스러운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혹시나 내가 시험 보는 동안에 애 태우다 바지에 용변이라도 보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몇 번이나 아버지께 볼일을 보시라고 채근을 하고 화장실을 다녀오도록 했다.
  할리우드에 있는 DMV(차량등록국)에 도착해서도 먼저 남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를  아버지에게 알려드렸다. 그 건물 안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완전히 몸이 경직되어 있는 듯 보였고, 얼굴은 허옇게 질려서 표정이 없었다. 그저 눈빛만 겁을 잔뜩 집어먹어 두려움의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아서도 나는 절대 떨고있음을 내 비쳐선 안될 것 같았다. 하다 들키면 사정 얘기를 솔직히 말하면 이해해 줄 거야 이렇게 맘을 정하고 나니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용해졌다.
  단층으로 넓게 퍼져있는 차량등록국 안은 분야별로 넘버가 붙어있었는데 운전면허를 위한 원서를 받는 곳은 9번 줄이었다. 원서를 받아서 거기에 아버지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등을 적어 넣었다. 잠시 눈을 감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속여서 시험을 치는 형편에 기도가 가당치도 않았지만 그 순간만은 운전면허 취득밖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아버님, 이 원서를 갖고 9번 줄로 가세요. 그러면 거기 사람이 아버지보고 여기 적혀있는 것들이 다 사실이냐고 물을 거예요. 하여튼 뭐라고 말하면 무조건 '예스'라고 말하십시오.
다음엔 이 돈을 내세요. 그러면 시험지를 내어 줄 거예요. 제가 바로 책상 옆에 서 있을 테니까, 그리로 오셔서 아무도 모르게 제 손에 쥐어주세요."
  내 설명을 듣기는 하는지 아버지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아버님, 마음 푹 놓으세요. 운이 나빠서 발각되면 그까짓 운전면허 포기하면 그만 이지요.
너무 걱정하시지 말고 어서 원서나 제출하세요. 그리고 제가 시험치는 동안에 화장실에 다녀오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움직이지 않을 듯이 무거운 아버지의 등을 9번 줄 쪽으로 떠다밀었다.
  결국 아버지와 나는 운전 필기시험을 성공리에 해냈다. 바지에 용변을 보는 실수도 없었고 대리시험을 치르면서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손에 땀을 쥐면서 부들부들 떠는 소심함을 지닌 분이 시력 검사까지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웠는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다 새어나왔다.
  분홍색 정사각형의 운전면허 허가증(Permit)을 받아 쥔 아버지는 꿈만 같다며 '아이고 네 덕에 해냈어. 이제는 운전만 익혀서 실기를 쳐야하는데 그 때 시험관의 말을 또 못 알아들을 테니 그것도 걱정이군.' 그러면서도 기쁜지 연상 웃음이 얼굴에서 떠날 새가 없었다.
  틈이 나거나 또 저녁상을 물린 후에는 어김없이 아버님은 남편과 함께 나가 한, 두 시간씩  운전 연습을 했다. 그의 운전 실력은 정말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능숙하다고 남편은 말했다. 한 주 정도의 연습으로도 충분했지만 허가증을 받고 한 달 후에나 실기 시험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넉 주나 매일 드라이브 연습을 했다.
  다시 운전 시험을 치기 위해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진땀나는 행보에 나섰다. 아버지가 영어를 못 알아들으니 시험관에게 내가 동석을 해서 통역을 해도 괜찮을지 물어 볼 참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제발 까다로운 여자 시험관이 아니고 맘씨 좋은 너그러운 남자 시험관을 만나야 할텐데.... 혹시 동석이 불가능해질 경우를 생각해서 운전 연습을 할 때마다  레프트 턴(좌측 돌기),  라이트 턴(우측 돌기), 라이트 스트레이트 (직진)등의 몇 가지 용어들을 거듭해서 알려드렸다.
  천만 다행으로 내 계획이 먹혀들었다. 우리의 형편을 말했을 때 시험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상부에 묻고 오더니 쾌히 승낙을 했다. 며느리가 뒷좌석에 앉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아버지로서는 마음을 푹 놓고 운전을 할 수 있었던 연유였는지 그 날의 운전 점수는 93점인 우수한 성적으로 우리 식구 중에 그런 점수를 받은 사람은 시아버지뿐이었다.
  그가 운전 면허를 받고 나서 일주일쯤 후, 토요일엔 우리 아파트 6호실에서는 굉장한 파티가 열렸다. 어머니가 평소에 차를 얻어 타면서 신세졌던 분들을 모두 청했다. 바느질 공장의 친구들, 교회의 집사, 권사들도 여러 명을 초대해서 좁은 아파트 거실은 터질 듯 만원이었다. 그 동안 눌려지내고 남편이 운전 못해서 생겼던 열등감을 이렇게 큰 잔치를 벌려서 지워버리려는지, 많이도 불렀고, 음식을 풍성히도 차렸다. 그 통에 나는 어머니를 돕는 조수에 불과했지만 며칠간이나 근육통이 따르는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받았다는 것만 생각하면 이쯤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가 운전하게 된 후로는 더 이상 어머니로부터 들볶이지 않아 내 마음이 기뻤다. 어머니는 옆에서 보기에 너무나 간사하다고 생각 될 만큼 아버지에게 잘 했다. 밥상에 오르는 메뉴도 달라졌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 잔심부름에 해당하는 일들을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
여자에게 이토록 이기적이며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내 보이는 얕은 구석이 있었나 싶다.
나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어머니와 같은 여성이라는 게 문득 부끄러웠다.

4.. 부모님의 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합동 작전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로는 집안의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큰 소리대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잘못을 지적하던 어머니의 가시 섞인 말투는
칭찬을 일삼는 덕담으로 변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자신감을 갖고 아내 앞에서 떳떳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으로 달라진 것이 제일 기뻤다. 내가 홍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한 일 중에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해낸 것 같아 그 즈음의 내 기분은 하늘로 날을 듯이 가벼웠다.
  남편이 운전하던 차를 대부분 아버지가 몰고 다녔다. 그러기 위해서 시아버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들의 직장까지 운전해주고 차를 가져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저녁에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것도 물론이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솔선해서 하는 기쁨으로 말이다. 우리 부부가 계속 남가주에 살 예정이었다면 차를 한 대 더 마련했겠지만 곧 이주를 해야했으므로 조금 불편한 점은 그런 대로 참았다.
  나와 남편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버지는 운전하기를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차를 몰고 싶어했다. 별로 살 물건도 없는데 슈퍼에 장보러 갈 일이 없느냐고 조를 때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주말에 놀러 야외에 나갈 때에도 차마 아들이 함께 가는데 아버지는 운전대를 잡겠다고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운전하고 싶어하는 표정은 역력했다. 때로 아들이 주말 당직을 하게되면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는 듯이 운전석에 앉아 아들에게 길을 묻고 지도 연구에 몰두했다.
  어머니는 그 전 날부터 김밥을 싸고 과일에 드링크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가 교회가 끝나는 즉시 바닷가나 산으로 나가 자연 속에 묻혀 저물어 가는 황혼기를 만끽했다. 정말 드라이브 라이센스는 그 분들의 발이자 미국에서 가슴피고 살 수 있는 자존심 같은 거였다.
늦게 배운 운전실력을 과시하며 돌아다녔다.
  남편과 내가 오하이오 주로 이사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대강의 짐들을 다 부쳤다. 짐이래야 두 사람의 살림뿐이라서 대부분이 남편의 책들이었고, 약간의 침구와 식기가 고작이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이민 와서 네 식구가 두 개의 방 달린 아파트에서 1년간을 같이 살았다.  이제 아들 며느리가 직장 때문에 당장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이사한다니, 본인들인 우리들보다도 시부모의 서운함이 말로 할 수 없이 컸던 모양이다. 받아놓은 날자는 더 빨리 가듯이 하루하루 떠날 날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안절부절 하는 조급증이 도지는 것 같았다. 집안에서도 뒷짐지고는 빙빙 돌며 단 30분도 느긋이 앉아있질 못했다. 틈만 나면 외출하려고 했다. 어디서 누가 오라고 하면, 늦은 시간이거나 거리를 가리지 않고 나서려했다.
  자동차 운전하는 동안은 말이 필요 없다.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고 할 줄 모르는 꼬부랑말을 하기 위해 혀를 굴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또 고속도로의 길은 너무나 잘 돼 있어 마음대로 속력을 낼 수 있다. 물론 제한 속도가 있지만, 아버지가 힘껏 밟아도 70마일을 넘지 않으니 프리웨이를 달리고 나면 속이 확 뚫리는 듯한 기분 나도 이해하고 그의 아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가시고 싶어하는 대로 내보낼 수도 없는 것이다. 혹시 교통순경의 지적을 받을 수도 있고, 교통 사고는 자신만 잘 한다고 안 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 상대방이 받아주는 접촉 사고도 있기 때문에 늦은 밤이나 일기가 좋지 않은 때는 가능하면 외출을 하지 말라고 아들은 권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 말을 듣지 않았다. 속이 답답해도 운전하려들었고, 기분이 좋아도 운전대를 잡으려고 했다. 운전은 아버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었다. 길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하늘을 향한 날개였다.

  운전시험을 보러 떠났던 스탠의 차가 차량 등록 국 쪽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의 옆에 앉은 시험관의 표정도 밝다. 시험은 합격한 모양이다. 의기양양한 스탠의 얼굴표정,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터질 듯한 웃음 담은 그의 얼굴이 합격임을 말하고 있다.
"엄마, 나 해냈어. 이것 봐요." 스탠은 합격한 시험지를 내게 흔들어 보였다. 그 노란색 시험지의 펄럭임은 20여 년 전 시아버지가 흔들던 분홍색의 운전 퍼밋(Permit) 같은 환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늘은 아버님의 손자 스탠이 캘리포니아 운전 면허를 받았습니다.'

April, 2003년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 다시 읽는 명작 조정희 2013.09.02 450
27 그 후에 내린 비 조정희 2002.12.23 733
26 그 후의 언덕 조정희 2003.02.17 802
25 여행 파트너 조정희 2002.11.17 812
24 안정된 이주자들의 틈새를 보는 여성적 시선 조정희 2003.11.15 925
23 섬진강, 코스모스 조정희 2003.12.12 992
22 새해님을 향해 조정희 2007.01.20 1091
21 통일 전망대 조정희 2003.12.12 1223
» 운전면허증 조정희 2003.04.14 1223
19 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조정희 2004.09.25 1245
18 베니스 해안에서 조정희 2004.06.28 1259
17 시인과 소설가의 차이 조정희 2004.05.26 1269
16 30년만의 겨울 조정희 2004.02.04 1316
15 새벽을 이렇게 조정희 2004.06.14 1386
14 두 목숨 조정희 2007.02.17 1391
13 인연 조정희 2007.01.27 1417
12 까치가 온다면 조정희 2007.01.20 1425
11 회전목마 조정희 2003.02.08 1438
10 시인의 봄날 조정희 2007.02.17 1485
9 아니, 벌써 2월. 조정희 2010.02.20 1509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16,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