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내린 비

2002.12.23 06:27

조정희 조회 수:733 추천:68

단편소설 1
그 후에 내린 비

장례식이 끝났다. 집례한 목사가 내려서며 띄엄띄엄 앉아있는 조객들을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하관식은 시간을 좀 미루겠으니 그냥 돌아들 가십시오. 일기도 고르지 못한데 참석해줘서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빠지자, 넓지도 않은 예배당 안이 금세 텅 빈 듯이 차갑고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파운데이션으로 두껍게 칠을 입힌 위에 볼연지까지 연붉게 발라놓은 고인의 모습은 잠시 잠을 자는 것 같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바라보니 살아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화사한 느낌을 준다.
비에 젖은 회색 하늘이 땅에 닿을 듯이 무겁다.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포레스트로운 묘지는 온통 빗물에 잠겨있다. 이따금 풀잎과 나뭇잎 위에 맺힌 물방울들은 바람에 진저리를 치며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바람이 잔잔해지자 다시 솔솔 내리는 부슬비에 초목들은 하얗게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자연은 이렇듯 생기를 되찾고 있는데, 그는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구나. 수액을 잔뜩 받아 파릇파릇 살아있는 잔디의 생명이 지금은 오히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질긴 것처럼 보인다.

싼타모니카에 위치한 다일러시스 클리닉(혈액 투석하는 병원)은 한 번에 네다섯 명이 다일러시스를 할 수 있도록 기계 설비가 돼있다.
나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피를 거르러 가게끔 스케줄이 짜여져 있었다. 같은 날 동시에 여러 사람이 서너 시간씩 혈액을 투석하는 일을 두 달이나 계속하면서도, 나는 옆자리 사람 얼굴조차 기억 못 할 정도로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투석이 시작되면 나는 팔뚝을 맡긴 채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가, 아니면 TV화면이나 쳐다보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었고, 그러다가 일이 끝나면 아무 말 없이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날도 나는 여느 날처럼 눈을 지긋이 감고서 투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이, 준호, 오늘도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 고맙지 않은가? 스마일, 스마일! 힘을 내라고."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구나 내 이름을 부르는데는 의외였다. 이곳에서 나는 누구와도 통성명을 해본 적이 없다. 처음 클리닉에 왔을 때 다일러시스를 도와주던 간호사 아가씨가 환자들 이름을 돌아가면서 소개했을 때 딱 한 번, 내 이름을 그 때 밝혔을 뿐이다. 그런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나는 너무 의외여서 반갑고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막상 내가 소리나는 쪽을 바라봤을 때, 웃고있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해 부끄럽고 미안했다.
"미안합니다. 전, 당신의 이름을 기억 못 하는데요."
"잭슨 리만, 그냥 잭이라고 불러요."
그는 제 이름을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혈액 투석 석 달만에 이렇게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별로 서로 사귀지 못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계속 주절거렸다. 잭이 쓰던 남부 사투리와 액센트는 내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웃음을 입가에 실실 흘리며 히히거리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대답하면서 노상 떠들었다. 나는 저 사람 머리가 좀 돌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다.
잭이 혼자 말하는 이야기는 주로 TV 시리즈의 여배우의 가십거리나 간밤 뉴스에서 들은 살인 사건 등이었다. 자기 아내의 살인범으로 혐의를 받고 쫓기던 O.J. 심슨에 관한 뉴스가 있던 그 주간에는 그는 무슨 신나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면서 나를 귀찮게 했다.
"준호, 너는 O.J.가 죽였을 것 같니?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두, 세 번을 물어와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자네, 혹시 혓바닥에 이상이 생겼나?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이 봐! 얼굴 좀 피구 살아. 매일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면, 우리 처지가 더 불쌍하지 않겠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준호나 나는 걸어다닐 수 있는 두 다리가 있고, 밝은 눈을 가져서 아직은 아름다운 자연과 보고 싶은 사람 얼굴도 볼 수 있지 않은가. 또 귀가 밝아 세상 돌아가는 소리도 다 듣지, 어디 그 뿐이야? 좋은 향기도 맡을 수 있는 코도 있지 않나?
그는 어느 날 내 우울한 얼굴을 보더니 마치 동생 타이르듯이 얼리는 말로 지껄였는데,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서 큰 소리로 응수했다.
"세상에 눈, 코, 귀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별것까지 다 감사합니다 그려. 당신이나 나나 피를 걸러내는 기구가 망가져 몸의 독소를 제거하지 못해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기계에 목숨을 의탁하고 살아가는 주제에 뭐 그리 즐거워할 일이 많소? 보고 싶은 사람 얼굴을 볼 수 있다고요? 그럼 그리운 사람이라도 당신 곁엔 있단 말인가요?"
흥분한 나머지 나의 음성은 높아지고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생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더니, 이 친구 이제 보니 말 잘하네. 그래, 그렇게 마음속에 있는 것 모조리 털어놔. 화풀이라도 좋으니 속 시원히 쏟아놓으라고. 내 다른 것은 못 해줘도
자네 말 들어 주긴 할 테니.... 보아하니 준호는 나보다 십 년은 어린 것 같은데....., 내가 잘 못 봤나? 앞으로 우리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세.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내 거친 반응에도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좋아하기만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보다 심 년쯤 연상이라고 했지만, 그는 사실 내 보기에 아버지뻘쯤 나이 들어 보였다. 반백이 넘은 머리카락과 커다란 키에 구부정한 어깨며, 그런 모습은 나보다 이십 년은 더 연장자로 보였다. 그런데도 내게 형제처럼 지내자는 말에 잠시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나는 그에게 유다른 정도 보내지 못했고, 별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제 그는 수선스런 목소리 기억만 남기고 그렇게도 무심한 척 했던 내 곁에서 떠나갔다.

관이 들어갈 자리는 움푹 파인 채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모조 잔디로 만든 플라스틱 담요가 덮여있다. 옆으로 쌓아놓은 흙더미는 끈질기게 내리는 비 탓으로 질은 흙으로 변해가며 어서 관이 묻히기만 기다리고 있다.
조객들이 보낸 딱 두 개의 화환이 초라했다. 사람들은 장례식 때 들어온 화환의 수로 고인의 삶이 성공적이었나를 가늠한다고 말한다. 누가 보냈는지 모를 빈약한 조화가 말해주듯, 그는 슬퍼하거나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이 쓸쓸하게 떠나갔다.
엷은 바람이 비를 안고 지나갔다. 흰장미, 노란 국화, 백합꽃들이 잎을 파들 거리다 잭의 관이 묻힐 자리 위로 하나씩 둘씩 떨어졌다. 나는 내리는 비에 상관없이 멍청하게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군요. 우산을 쓰던가, 안으로 들어가던가 해야지 옷이 다 젖겠어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뒤돌아봤다. 사십을 넘겼을 듯한, 흑인 여성이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니....? 잭이 보고싶어하던 그 여자. 눈이 있어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기에 감사한다던 제니, 그 여인인가? 검은 색 양복 윗저고리에 내려앉은 비를 툭툭 털면서 나는 그 여자가 펴든 우산 속으로 한 발짝 들여놓으며 생각한다.
"헬로우, 당신은 잭의 엑스 와이프, 제니 맞지요?"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내게 전화를 해준 미스터 김....?"
"그렇습니다. 장례식을 시작할 때부터 찾았는데 보이지 않더군요."
"시간에 맞춰오려고 노력했는데, 비행기가 연착되었어요."
"아, 그랬군요. 오셨으니 잭이 기뻐할 겁니다."
나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면서 제니의 눈빛을 살폈다. 여자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촉촉한 물기가 어리어 있었다. 지금 저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저 슬픈 표정은, 며칠 전 전화기를 통해 들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잭 리만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여전히 전화기에선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쑥 화가 나서 '잭 리만이 죽었어요.' 라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수화기 속에서는 TV에서 나는 것인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전화하시는 분은 누구시죠?"
한참만에 저편에서 짜증스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가 누군인가를 밝히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잭과 가까이 지냈던 김준호라고 합니다."
그 동안 잭이 내게 얘기했던 제니라는 여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제니는 말이야, 아주 솔직한 여자야. 병든 나와 살 수 없다고 선언했거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기 삶을 찾겠다고 자신을 자유롭게 놔 달라고 석 달을 졸라댔어. 그래서 보냈지. 일단 보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 터라고. 생각해봐. 몸이 성해서 펄펄 뛰는 남편 놔두고서도 사네 못 사네 하는 세상인데...., 나 같은 사내와 어떻게 살겠어? 난, 그래서 제니를 나무랄 수 없어.'
잭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그녀를 비난했다. 어떤 때는 한국말로 그녀를 욕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응?' 하면서 내게 다그쳤다. 떠나간 부인을 내가 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머리가 파뿌리처럼 될 때까지 함께 살자고 약속한 사이인데.... 한쪽이 병들었다고 남편을 버리다니. 천하에 의리 없는 몹쓸 년이라고 속으로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 여인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던 터라, 잭이 죽었다는 사실을 얼른 제니에게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버리고 떠난 남편이 죽었다고 눈이나 깜짝할까.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길지 모르는 일인데.... 그러나 나 이외엔 그의 죽음을 알릴 사람이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가까운 형제나 친지도 없었다. 더구나 운명하기 전 날, 마지막 그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 나 혼자였다.
'준호, 내 윗도리 주머니에 편지 봉투가 있을 테니 좀 꺼내와 봐. 제지가 다음 주에 여기 LA로 놀러 온다는데, 내가 이렇게 병원에 들어왔네. 거기 전화번화가 있으니, 여행 스케줄을 좀 늦추라고 일러줘.' 그는 급한 일인 것처럼 부탁했다.
'그냥 오라고 하지요. 뭐. 당신이 하루 이틀 아픈 것도 아닌데. 상태가 안 좋아서 입원했나 보다 여길 거 아니에요?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그는 한쪽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움직일 수 있어야 운전도 해주고 근사한 저녁도 한 끼 대접할 게 아닌가?' 그는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윽한 눈길로 말했다. 그 눈길이 지금 이 흑인 여자 얼굴위로 겹쳐 흘렀다.

잭이 급작스레 죽을 줄은 의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 날 저녁에 먹은 생선 요리가 좋지 않았다. 식중독 증상으로 크레아틴이 너무 높아져 조정키 위해 입원했던 것이다. 그런 일은 전에도 몇 번 있었던 터라, 크레아틴 수치만 내려가면 괜찮을 것으로 여겼다.
내가 병원에 다녀온 것이 밤 11시경이었다. 너무 늦어서 부탁 받은 전화는 다음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그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니에게 여행 스케줄 변경이 아닌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잭이 죽기 직전에 제니가 여기로 내려오기를 그렇게 기다리더니. 나는 부석부석한 얼굴에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글거리던 그의 표정을 전화로라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화선을 타고 들려 오는 여자의 음색이 지나칠 정도로 차갑게 전해왔다. 그래서 막상 하려던 말은 못 하고 겨우 장례식 날짜와 시간만 알려주었다.
지금 슬픔이 축축하게 어린 여자의 눈길에서, 전화할 때 느꼈던 그녀에 대한 내 유쾌하지 않은 심경은 그녀에 대해 내 편견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니의 검고 커다란 눈에 어린 서글픔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비가 별로 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웬 비가 이렇게 많이 오죠?"
"여기도 겨울철엔 비가 온답니다. 올해는 좀 이르게 우기가 닥쳤습니다."
제니와 나는 부옇게 흐린 공간을 보며 중얼거렸다.
"참, 잭과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내가 그와 헤어진 후로 만나신 것 같은데...."
"다일러시스 클리닉에서 만났어요."
"그럼, 미스터 김도 신장병을 앓고 있나요? 어쩐지 몸이 약해 보인다 했어요."
그녀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다.
"제니, 잭은 내게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그가 나보다 먼저 가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요. 나보다는 훨씬 건강 상태가 좋았거든요. 난, 이제 더 살 힘을 잃었어요. 앞으로는 누구로부터 잭이 내게 주던 용기를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나는 그녀가 친근하게 느껴지자, 뭔가 잭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지껄였는데, 계속 뜨거운 눈물이 내 양 볼을 타고 흘렀다. 제니는 펄스를 열더니 티슈 몇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줬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솟구치는 울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뻐근해 오며 목줄로부터 울음이 솟아올라 왔다. 죽은 자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병들어 피폐해진 육신을 지탱하고 더 살아가야 할 날들이 너무 힘겨워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미스터 김, 우리 장례 오피스로 들어갑시다. 여긴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안 되겠어요. 들어가 물어 봅시다. 오늘 중으로 하관식을 할 것인지."
그녀는 우산을 펴 들고 나를 눈짓으로 불렀다. 제니는 키가 커서 그녀의 우산 속에서 같이 걸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큰누나 우산 속을 걸어가는 막내 동생처럼 슬픔이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으나 마음은 도리어 따스해옴을 느꼈다.

만성 신부전증, 병명도 생소한 이런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나는 별로 앓아 본 일이 없었다. 몸에 살집은 없었지만, 건강해서 힘든 일을 해도 지치지 않았다. 감기에 걸려도 할 일 하면서 앓아서, 몸져누워 본 적도 없었던 내가 언제부턴가 몸에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차츰
오래 서 있기도 힘들고 소변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등, 전과는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병원을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른 몸집이 점점 더 수척해지더니 입던 바지가 모조리 허리를 줄여야만 했다. 얼굴 색 도 핏기 없이 창백해져서 주위에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성화와 가족들의 걱정에 밀려서야 나는 닥터 오피스를 찾아갔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찮은 병이겠거니 생각했다. 너무 무리했기 때문에 과로가 겹친 것이겠지 여겼다. 그러나 진찰하는 의사의 눈빛이나 혈액과 소변을 몇 차례나 검사하는 동안 내 몸 속에 큰 이상이 나타났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미스터 김, 그간 만성 신장염을 앓고 있었군요. 지금 신장이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의사는 침통한 얼굴로 검사 결과를 말했다. 나는 잘 못 들었는지 해서 다시 물었다.
"선생님, 저, 저는 아무런 증세를 느끼지 못했어요. 단지 한 달쯤 전부터 피로가 쉽게 오고 몸이 자꾸 말라서......"
"때로는 자신이 별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한 채로 몸 속에서 병이 진전되는 수가 있어요. 미스터 김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하여간 이제부터 혈액 투석을 해야 합니다. 일 주일에 두 세 번 정도 피를 거르기 위해서 한쪽 팔에 플라스틱 튜브를 설치해야 하니, 내가 일러주는 곳에 가서 절차를 밟도록 하세요." 의사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말했다.
"만약에 피를 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몸에 요독증이 퍼져서 생명이 위험하게 되지요. 꼭 하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몸의 콩팥은 피를 걸러서 양분은 몸 속에 섭취하고 독소는 소변으로 내보내는 일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콩팥에 있는 미세한 그물 같은 망이 망가져서 그 일을 못 하게 됐으니 다일러시스 머신(혈액 투석기)에 의존하는 거죠."
단호하게 말하는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운전대를 잡을 기력조차 생기지 않아 아내가 운전을 했다. 아내도 나도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말 기막히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내 것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왕성하게 일 할 나이인데, 가급적 힘든 일을 피하고, 음식에 간 기를 빼고, 심지어 물의 양까지 조절하라니,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그리고 서너 시간에 걸쳐 피 거르는 일을 삼 일에 한 번씩 해야 한다니. 이제는 직장도 포기해야 할 판이다. 나는 모든 것이 다 끝 나 버리는 것 같은 절망감에서 눈앞이 아득했다. 그래도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수 없었다.
피를 거르는 일은 상상한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고무관을 통해 나온 피가 기계로 걸러져서 다시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생각 할 때에는 속이 메슥거렸는데, 사실 당하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단지 정해진 곳에서 오랜 시간을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이 괴로웠다. 더욱 이 일터를 잃게 된 것이 더 없는 걱정이었다. 건강만 허락하면 두세 곳에서 일하여야 하는 처지인데, 이제는 한 곳에서도 제대로 일 할 형편이 못 되었으니 실망이 컸다. 앞으로 살 길 이 걱정되었고 아내와 어린 아들녀석 보기가 딱했다.
  더구나 피 거르는 일을 하는 동안에 정신도 점점 허약해지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갔다. 네 번째 피를 거르고 집에 돌아온 오후였다. 근심에 눌려지내던 아내가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여보, 내가 오는 H교회에 다니는 백화영 권사를 만났는데, 그 분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대요. 어떤 불치의 병도 그 분에게 안수 받으면 곧 낫는 대요. 당신도 한번 받아 봅시다."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는 아내가 내 몸의 일부인양 아파하는 그녀의 심정이 측은하면서도 애처로웠다.
"우린 크리스천도 아닌데..... 당신이 언제 교회에 나간 적이 있었소? 교회 문전에도 안 가본 사람이 병 고쳐 달라고 예수 믿을 수 있어?" 나는 애처로운 마음과는 달리 짜증스럽게 말했다.
"지금부터 믿으면 됐지. 동기야 어쨌든 예수 믿고 병 고치면 일거양득이죠. 하여간 내일 그 권사를 찾아갑시다."
결국 나는 아내의 완강한 청에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백권사는 쪽진 머리에 짧은 통치마와 적삼을 입은 노인이었다. 칠순이 넘었다는데, 얼굴은 주름도 없이 팽팽한 데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오십 정도로 젊어 보였다.
백권사는 내 병을 진단하고는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똑바로 나를 뉘어놓고는 떡 주무르듯 온몸의 여러 부위를 눌러 보고 짚어 가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소리는 신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점쟁이가 주문을 외며 점괘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사람은 더러운 피가 빠져나가질 않는 구만. 그러니 깨끗한 피가 만들어지지 않고 자꾸 죽어 버려서 빈혈이 생기는 거야. 병원에 다니지 말고 더도 말고 한 달간만 나한테 기도 받아 볼 라면 해 봐? 분명 달라질 테니.."
권사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신체 기관에 고장이 났는데 의사와 손을 끊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되었다.
"병원 치료와 겸해서 기도를 받으면 안 될까요?"
  나는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해!"
  권사는 완전히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도, 권사의 말을 들어야 할 지 난감했다. 의심이 들면서도 그 노인네의 불꽃 튀는 눈빛이 신령한 힘을 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내는 나보다 더 권사에게 의존하고 싶어했다.
"여보, 이미 병원에서 손 든 거나 다름없잖아요? 신장의 기능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기도 받고 고치면 삼 일에 한 번씩 피를 거르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고요.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믿고 매달려 봅시다."
아내가 간청하다시피 권했다. 나는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왜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결정을 내리고서도 자신의 하찮음을 생각하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우리 부부인데도 사람의 지식이나 의지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그 날로 짐을 꾸려서 백권사의 숙소로 옮겼다. 물론 다일러시스 클리닉에는 가지 않았다.
백권사의 치료는 시작되었다. 그는 나를 반듯이 눕혀 놓고는 옆구리와 사타구니 사이 배 위에 손을 얹기도 했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 할 주문을 외우면서 껄끄러운 손바닥으로 내 몸 이곳 저곳을 철썩철썩 쳐댔다. 주문이 빨라짐에 따라 손놀림도 빨라졌다. 안수를 받는 동안 나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끝나고 나면 양쪽 허리 밑으로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그리곤 온 몸에 기운이 쫙 빠지면서 맥이 풀어지곤 했다.
백권사의 집으로 옮긴 지 열흘이 지났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차도는커녕 전에 없이 눈에 핏발이 서고 점점 다리에 힘이 없어서 단 십 분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가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백권사는 내 우려와는 달리, 눈에 핏발이 선 것은 썩은 피들이 신체의 구멍을 빠져나가느라 생기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제 곧 일어날 테니 두고 봐라. 믿음이 없으니까 걱정되는 거야. 이 불쌍한 사람아!"
그는 혀를 쯧쯧 차면서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나는 그저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얼굴을 찡그리지도 못하고 점점 심해지는 몸의 통증을 호소하지도 못했다.
아내는 하루걸러 쌀과 고기와 과일 등을 사 들고 찾아왔다. 나는 식욕을 잃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첫 주간에는 하루가 다르게 내가 좋아지고 있다고 아내도 즐거워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혀 차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한 기간인 한 달이 가까워 올 무렵엔, 나 자신도 거울을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얼굴이 달라졌다. 깊숙이 패어 들어간 눈 주위에 푸르스름하게 감도는 색은 죽은 사람 피부 같았다.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빨갛게 핏발이 서 있는 눈은 내 눈 같지 않았다. 거울 속에 있는 내 모습은 껍데기만 붙어있는 해골이었다.
나는 걸을 수도 없었고, 잠시 혼자서 서 있지도 못했다.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도 숨이 턱까지 차 올랐고, 그것도 부축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결국 기도 받은 지 30일이 되는 날 밤에 혼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다시 세인 빈센트 병원으로 옮겨졌다. 미국인 의사는 환자가 어디에 가서 이런 지경이 되어 나타났는지 영문을 몰라, 처음엔 맡기를 꺼렸다. 사정을 해서 병원 지시대로 치료를 받기로 약속하고 입원했다. 몸 속에 가득 찬 요 독을 제거하기 위해 복강으로 혈액 투석 치료부터 시작했다. 죽음 직전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두 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자, 팔뚝으로 혈액을 투석할 수 있게끔 건강을 되찾았다. 그래서 퇴원하고는 집에서 통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다일러시스 클리닉으로 갔던 날에 나는 우연히 잭을 만나게 되었다. 죽지 못해 피를 거르는 심정으로 클리닉을 찾았던 나는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환자들과 잡담을 나눌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나와는 달리 다른 환자들은 늘 여유 있어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그들 삶의 일부인 것처럼 아주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투병을 했다. 환자들은 투석을 하는 동안 리시버를 끼고 음악을 듣기도 했고, 책을 읽기도 했다. 또 한가롭게 담배를 피워 물고 TV를 시청하는 모습들은 클리닉에 와서 피를 거르는 사람들 같지 않고, 거실이나 호텔 로비에서 안일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같았다.
  잭 리만이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시답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그는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뒷날부터 나는 차츰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눈에 안 띄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비록 대화는 오가지 않았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으면 재미있어서 두,세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몰랐다. 끔직하고 지루하게 생각되던 클리닉이 잭이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갔고 흥미도 있었다.
  잭을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특이한 점이 차츰 내 마음을 끌었다. 우선 그를 만나 보면 전혀 환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물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늘 유쾌하고 즐거웠다. 내성적인 나도 그와 얘기하노라면 마음이 좀 트이고 세상도 너그럽게 생각되는 것 같았다.  나는 차츰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를 향한 나의 정이 한 겹 두 겹 두터워 갔다. 그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겨우 일 주일에 두 번씩 다일러시스 클리닉에서 두세 시간을 함께 지낼 뿐이었다. 다른 기회를 마련해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기에 서로의 가정이나 사생활에 대해선 아니는 것이 없었다.
  그런중에 우리가 클리닉 밖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생겼다. TV에서 떠드는 OJ 심슨 재판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인들의 관심과 흥미를 집중시킨 재판은 1년이 넘게 끌고있어, 평소에도 잭은 종종 그것을 화제로 떠올리곤 했다. 재판의 생중계는 대부분 오전 10시나 11시에 했으므로 여러 번 우리는 피를 거르는 시간에 그 중계를 볼 수 있었다.
"저 재판은 너무나 미국 생활을 잘 반영하고 있어. 비교적 범죄를 많이 행하는 흑인이 사건 주인공이 되었고, 그런 문제로 백인들이 골치를 앓으며 해결점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가. 저 마샤 클락이라는 여검사는 백인이면서 여권 신장을 과시라도 하듯 남자들을 젖혀놓고 뽐내고 있지. 그 판에서 돈 벌 기회를 잡은 것은 역시 유태인 변호사 사피로란 말이야. 제일 위에 있는 일본인 판사 이토가 과연 명 판결을 내릴 것인지 아니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두고 보자고. 허긴 판사 마을대로 판결을 내리는 게 아니고 배심원들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지만 말야."
   잭은 재판 상황을 지켜보면서 쉬지 않고 지껄였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TV 드라마도 이렇듯 사건 구성원이 그럴싸하게 짜여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인종, 섹스, 사랑 등의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힌 재미있는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그 재판을 보고 있어도, 나는 재판의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저 남자는 아내의 살해 혐의를 받아야 했는가. 정말로 심슨이 그의 아내 니콜을 죽였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았다. 뻔히 보이는 재판 결과를 놓고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하면서 열들을 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유태인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 보다도 심슨의 살인죄를 재판하기 전에 부정한 아내 니콜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다.
"난, 재판이 어떻게 끝날지는 관심 없어요. 그저 니콜 같은 여자는 열 번 죽어 싸죠. 이혼을 했으면 위자료를 받아 자녀 양육비에 쓸 일이지, 보이 프랜드 와 놀아나는 데 그 돈을 쓰는 여자는 그렇게 죽어도 상관없어요."
  잭은 좀체로 대화에 열을 올리지 않던 내가 얼굴까지 붉히며 이야기판에 끼여들자 의외인 듯이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는 이 재판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들 마음은 그 재판 이야기로 어느 정도 가깝게 되었다. 그 날 다일러시스가 끝나고 클리닉에서 나온 나는 잭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웨스턴 길에 있는 한국 식당 우래옥으로 갔다.
  신장 환자는 가기나 조미료가 들어 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지 않아 외식을 피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 날 만은 가리지 않고 먹기로 했다. 잭은 매운 김치도 잘 먹었고, 무채 나물에 시금치까지 모두 잘 먹었다. 특히 불고기를 여태껏 먹어 본 고기 요리 중에 제일 맛있다면서 좋아했다.
"오늘은 피를 걸렀으니까 먹고 싶은 것 맘껏 먹고 보자. 그리고 내일부터 조심해서 모레까지 먹지 말고 있다가, 그 다음날 가서 피를 걸러내면 노 프러블럼....... 하하하."
  잭은 지글지글 타는 불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유쾌한 듯 껄껄 웃었다.
"이 봐, 준호, 대학교 시절에 축구 선수로 날릴 만큼 건강한 OJ가 돈까지 갖고 있는 스타라고 하지만 저렇게 불쌍하지 않아? 그런 거 생각하면 자네나 내가 신장이 고장 났다고 해서 풀이 죽어 지낼 필요는 없어. 세상살이는 그다지 행복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다지 불행할 것도 없다는 거 알지?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고, 물체가 있으면 꼭 그림자가 따르는 법 아닌가."
  점심 식사가 끝나자 잭은 즐겁게 지껄이면서 나를 다시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저녁 식사는 내가 요리로 대접할 테니 내 집으로 가자."
  내가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자네 와이프, 기다리고 있겠군. 우리 집에 가서 전화하게.' 하면 그가 완강하게 잡아끄는 바람에 뿌리칠 수도 없었다. 실은 나도 그의 집이 보고싶기도 해서 그의 차를 따라 나섰다.
  그의 집은 흑인들이 많이 사는, 사우스 패서디나의 조용한 동네에 있는 원 베드룸 아파트였다. 그는 하루 여섯 시간씩 복사기를 돌리는 가게에게 일을 해 생활비를 벌고, 부족한 것은 정부로부터 지급되는 복지 금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잭에 비하면 나는 경제적으로도 걱정 없는 형편이다. 그 동안 해 왔던 코인 라운드리 (동전을 넣고 하는 세탁소)를 두 곳이나 갖고 있어서 그 수입이 몇 천 불은 되므로 내 한 입 거두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아내와 아들 지미가 있을 때는 생활비가 꽤 들어갔다. 아들이 자라서 학교에 갈 때가 되면 아내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었다.
"참, 어서 와이프에게 전화 해.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거라고."
"와이프 없어요. 아들놈 데리고 집 나간 지 벌써 일 년이 넘는 걸요."
"아아, 그래? 미안하군. 그런 줄도 모르고...."
  민망해 하면서 당황해하는 잭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내가 몰래 짭짤한 밑반찬을 먹다가 내게 들키면 쩔쩔매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기가 전혀 없는 음식은 맛으로 먹기에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이따금 내 눈을 피해 무말랭이 장아찌와 고추 장조림을 몰래 먹곤 했다. '내가 못 먹는 줄 알면서 이런 반찬 사 와야겠어?'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나는 왜 미안해하는 아내를 향해 화를 냈었는지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못된 짓을 많이 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짠 반찬을 발견했을 때는 먹어서는 안된 다는 나의 형편에 그렇게 화가 치밀었다. 또 남편 처지를 생각 않고 자기 식욕만 좇아 사들이는 아내의 심보가 괘씸해서 그 반찬들을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었다.
  내가 종종 새벽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서 흐느끼는 아내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아내가 떠나고 나서야, 그 울음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았다. 그녀가 내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아내가 없는 빈자리는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언제나 춥고 시렸다. 나는 그 동안 잠자리에서도 전혀 남편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준호, 얘기 좀 해봐. 자네 와이프도 제니처럼 바람이 나서 도망갔나? 아니면 자네가 못살게 굴어 나가 버렸다?"
"그게 아니고요. 우리 집 사정은 말하자면 좀 길어요."
  집안의 구차한 사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잭의 그윽한 눈길에 그만 나는 숨김없이 술술 말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병든 남편이 싫기도 했겠죠. 그렇다고 내가 너그러워 아내 처지를 이해하지도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아내가 시집 식구들을 미워하게 된 동기가 있어요. 제겐 누이동생과 형이 하나 있지요. 제일 처음 내 신장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고 진단이 내려졌을 때 닥터는 형제 중에 혈액 타입이 같은 사람이 있으면 이식 수술을 받으라고 권했어요. 형이 저와 혈액형이 같다는 것은 온 식구가 다 알아요. 그렇지만 모두 형의 눈치를 살필 뿐 아무도 형에게 그 일을 권하지 못했지요. 형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어요. 그러나 제 아내는 내 형에게 기대를 걸었으니까요." 나는 복잡한 집안 사정을 말해 버렸다.
"의사 말로는 사람은 신장 하나로도 넉넉히 살 수 있다는데, 아주버님이 조금만 고생하면 지미 아빠도 살리고 오죽 좋아요?"
  어느 날 아내는 당차게 어머님 앞에서 형님에게 무슨 빚 독촉하듯 신장을 요구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부모님의 입장을 알 수 있기에 나는 더욱이 민망했다. 다 같은 자식인데 어느 자식 살리자고 멀쩡한 자식 몸에 칼 대게 할 수 없다는 부모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정말 답답했다.
급기야는 형수하고 아내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아내는 남편을 도와 달라고 말을 시작했으나, '병든 사람은 어쩔 수 없고 남은 식구라도 건강하게 살아야 할 거 아냐? 동서. 아빠 어깨에 매달린 저 두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난 그이보고 수술하라고 할 수 없어.' 형수는 냉정하게 아내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아내는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 부었다.
'맏아들이라고 뭘 했어요? 오히려 작은아들인 지미 아빠가 부모님을 많이 돕고 부양도 책임지고 있는데, 동생을 위해 그것 하나 못 해준다면 형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이쯤 나오자 피차 감정이 상할대로 상했다. 그 후로 아내는 시집 식구 대하기를 원수처럼 대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위로해 준 것도 아니었다.
아내는 나를 비롯한 모든 시집 식구들을 미워했다. 나도 그 당시엔 모두 꼴 보기 싫었다. 부모, 형제도 아내까지도 내 눈앞에서 싹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심코 한 '애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 한 마디로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싸들고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나버렸다.
  나는 오랜만에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을 다 해버렸더니 답답하던 가슴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술김으로 말을 해서인지 어느 때보다도 영어가 술술 자연스레 나왔다. 마음은 가라앉은 것 같은데 이것도 술김인지 그만 징징 울기 시작했다. 잭은 길다란 팔과 넓적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면서 달래 주었다.
'자네가 잘못해도 너무 많이 했네. 그래 놓고 떠나간 아내를 원망해서야 쓰나. 자, 모두 잊고 술이나 마셔.'
  그는 큰 유리잔에 맥주를 다시 채웠다. 나는 눈물이 자꾸 났다. 그러나 한편 전에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나의 전신을 감쌌다.

  제니에게 지난 이야기를 하는 동안도 내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눈물을 닦느라 제니가 준 티슈는 벌써 젖어 더 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똘똘 뭉쳐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지금보다 그날 저녁 잭과 맥주를 마시던 밤에 더 많이 울었다. 마치 몸 속에 있는 수분이란 것은 온통 뽑아내듯이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독이 있는 물은 오줌으로, 한이 맺힌 수분은 눈물로 쏟아 내고 말았다.
  
"미스터 김, 그만 돌아게세요. 이 정도로 비가 계속 내린다면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까지는 하관할 것이니, 그때 제가 마지막 처리를 다하겠어요. 걱정 말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몸도 불편하신데...."
제니는 내가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아닙니다. 제니, 저도 함께 지켜보겠어요. 차도 없잖습니까? 끝난 후에 제 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나는 그녀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전 상관없어요. 택시를 부르면 됩니다. 미스터 김, 안색이 안 좋아요. 오늘 너무 과로했어요. 몸조리 잘 해야지요. 괜히 비 맞고 감기라도 들어 봐요. 건강한 사람 처지도 아닌데..."
말을 듣고 보니 전신에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 폐렴이라고 걸리면 나도 잭의 곁으로 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그머니 겁이 났다. 못 이기는 체 돌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니에게 잭이 마지막 가는 길을 혼자 배웅하게 하는 것이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다.
  나를 억지로 떠밀다시피 차 속으로 밀어 넣는 제니의 고집에 어쩔 수 없는듯이 차에 올라앉았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서서히 움직였다. 제니는 우산을 받쳐들고 팔을 흔들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그녀의 모습이 비에 젖은 흑장미 처럼 아름다웠다. 푸른 잔디 위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우산을 든 여자가 손짓을 하면서 죽은 전 남편 친구를 보내고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동안 바라보면서 차를 천천히 몰았다.
  비는 멈출 기미도 없이 줄기차게 내렸다. 오후 내내 밤까지 내릴 것 같았다. 제니는 잭의 관 위에 한 줌의 흙을 덮기 위해 혼자서 긴 시간을 기다릴 것이다. 그 기다림은 부부의 연을 맺었던 아내가 먼저 간 사람을 위해 마지막으로 베푸는 선심인지 모른다.
  빗줄기가 차창위로 부딪치면서 방울을 만들다 흘러내린다. 와이퍼가 한번 휙 스치면서 그 유리창으로 아내와 아들이 웃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은 살아있기에 그려 볼 수있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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