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

2003.02.08 01:43

조정희 조회 수:1438 추천:94

Short 2 (단편 소설 2)
메리고라운드 (회전목마)
1992년 4월
  채널 7, ABC방송에서 뉴스를 전하는 금발의 여자, 크리스틴 런드는 방화와 약탈을 벌이고있는 거리와 상가를 비쳐주면서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TV 화면은 샌타모니카와 웨스턴 사이에서 자신들의 가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방위에 나선 한인들 몇 명을 비추어줬다. 그 한인들의 모습에서 누구도 자신들의 상점을 침범치 못하도록 방어하며 지키겠다는 긴장감과 결의가 보였다. 크리스틴은 실제로 한인들이 약탈자들을 향해 총을 쏘아 지금까지 한 명을 부상 입혔다면서 마이크를 제임스 박이라는 한인 리커상에게 돌려 자세한 상황을 알아본다고 했다.
  코리언, 제임스 박이라는 말에 지숙은 TV볼륨을 높였다. 그리곤 귀를 바싹 기울였다.
'이 나라에도 경찰이 있고, 법이 있는데 당신 네 들이 이렇듯 개인적으로 스토어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나서는 것은 서로간에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물론 위험하지요. 허지만 어떻게 합니까? 경찰 당국이 우리 한인타운은 거의 방관하는 상태 인 걸요. 우리가 여러 해를 걸쳐 고생하고 노력해서 이룩해 놓은 사업인데, 불타버리거나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도둑 맞아서야 쓰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 말하겠는데 폭동은 사우스 센트럴과 한인타운에서 일어났는데 어째서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있는 베벌리힐스는 그토록 치안이 철통같습니까? 어제도 밤이 새도록 헬리콥터가 그 시의 상공을 시끄러울 정도로 배회하더군요.'
  박이라는 사나이는 약간 흥분한다 싶게 어조가 달라지면서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자 재빠르게 화면이 바뀌며 크리스틴은 베벌리 시민들은 자기네들의 치안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시에다 희사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 면서 재치 있게 말을 했다.
"치, 치사한 자식들! 무슨 말이야! 돈 많은 사람들만 경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건가" 지숙 옆에서 뉴스를 함께 보고있던 남편, 윤상호가 아니꼬운 듯 뱉어냈다. "야, 그 사람 영어 참 잘한다.  한국인이 저 정도로 영어 구사하기 쉽지 않지? 여보."
"맞아. 근데 저 남자 내가 아는 사람같이 낯이 익은데... 어디서 만났을까"
"당신이 알긴 어디서 알겠어?"
"제임스 박, 그가 한다는 리커 스토어 이름이 뭐라고 했는지 생각나요?"
"서비스 리커."
  제임스 박, 그의 말하는 음성과 억양, 지숙의 귀에 너무 익숙했다. 바로 얼마 전에 아니 최근에도 들은 것 같고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TV 화면에 나타난 얼굴로 봐서는 오십이 조금 넘었을까 한데, 영어를 아주 잘 구사했다. 표현도 적절하게 할 뿐 아니라 발음이나 억양이 이민 1세의 실력은 아닌 듯 했다.
  말 할 때 풍부한 표정 어린 얼굴이나, 약간 목이 쉰 듯한 깊은 목소리, 또 유창한 영자 어 발음, 혹시 S여고의 박 선생? 아니지. 그럴 리가. 그렇게 젊을 수는 없는데....

  4.29 폭동은 며칠간을 수그러들 태세가 아니었다. 드디어 LA 경찰국장은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 통금 명령 을 선포했다. 한인타운 지역은 백인 거주지와 흑인 사우스 센트럴 지역과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더욱 문제가 됐다. 늑장을 부리는 경찰 당국으로부터의 도움도 받지 못했고, 통금이 효력을 발생하는 범위도 아니라서 한인 상가에서는 밤새도록 목숨을 걸고 지킨 상점은 괜찮았고, 아니면 전부 약탈당했거나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폭동이 일어난 후로 그 동안 있어왔던 지숙의 불면증이 더욱 심해졌다. 외국 땅에 이민 와서 발붙이고 살자면 동족끼리 서로 뭉치고 도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타민족의 눈치나 입장을 언제나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또 경제 사정은 유통되는 것이므로 내 이웃이 윤택하게 돌 때 나의 주머니 사정도 좋아지는 법인데 하물며 고향 떠나 살고 있는 혈육끼리는 말 할 나위도 없다. 지숙의 오빠들은 둘 다 리커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어서 이번 폭동에 손해를 입거나 사고가 생기면, 모두 그래도 사정이 조금은 넉넉한 지숙의 짐이었다. 큰오빠는 오렌지 카운티에 가게를 갖고 있어 별로 신경이 안 가는데 작은오빠의 가게가 걱정이 되었다.
  폭동이 나던 첫 날, 한인 라디오 방송이 폭도들의 방화는 어느새 8가나 7가까지 침투해 오고 있다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작은오빠의 가게는 3가 길에 있으니 그 곳까지 올라오기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첫 날을 무사히 넘기더니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나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안전한 듯 싶었다.
  TV 뉴스에서 보았던 사나이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도 지숙이 잠을 이룰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제임스 박, 제임스 박, 몇 번이고 이름을 속으로 되 내어 보았지만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말하는 억양, 발음은 분명히 그의 것인데....... 그이라고 하기엔 모습이  너무 젊었다. 음성 역시 이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시간적 공간으로 따져 볼 때 전혀 나이 든 소리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녀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 박이라는 사나이의 대한 생각은 점점 더 깊어져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변해갔다.
  5월 첫 주가 지나서야 겨우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과 잔해는 곳곳에서 속출했다. 50여명 가량의 한인 사상자와 천 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약탈로 피해를 입었거나 화재를 당한 상가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다행이랄지, 신이 도왔다고 할 지, 지숙의 작은오빠 가게는 온전했다. 바로 옆 가게가 불에 타서 지붕이 날라 가고 흔적이라곤 쇠기둥밖에 없는데도 오빠의 가게는 한 군데도 부서진 곳이 없다는 것은 어쩐지 기적에 가까웠다.
  남이 다 당하는 불행가운데서 요행히 살아남았다는 것은 왠지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라 내놓고 기뻐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숙과 두 오빠들, 그들끼리만은 추락한 비행기 사고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와 같은 행운을 지녔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빠의 가게는 3가 길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리커 스토어라서 폭동 나기 이전보다 더 손님이 많이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몇 군데로 분산되던 손님들이 한 곳으로 몰리니 자연 오빠의 가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야,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요즘 같아선 밥 먹을 새도 없으니 내가 미치겠다.'라고 비명을 지르는 지숙의 작은오빠 강민우는 하나도 미칠 표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리커 스토어는 닫는 시간이 너무 늦은 까닭에 민우는 보통 밤 11시간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작은오빠, 저녁 늦은 시간에 피곤하지? 근데, 내가 청이 하나 있어서 이 시간에 전화 걸었어. 내 부탁 들어 줄 거야?"
"뭔데? 닥터 부인이 나 같은 장사치한테 부탁이 다 있어?" 민우의 말속에 빈정대는 투가 숨어있었지만, 또 한편은 누이동생이 운 좋게 의사한테 시집가서 이번 폭동의 시련 가운데서도 제외되었다는 대견스러움이 그의 어조 속에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오빠, 농담하지 맣고, 사람 좀 알아 볼 일이 있어서 그런데, 거기 웨스턴하고 싼타모니카 사이에 있는 '서비스 리커'라는 가게 주인인 제임스 박이라는 사람의 한국 이름이 뭐고, 한국에서는 뭐를 했는지 좀 알아봐 줘요. 같은 리커 스토어니까 협회에 가입됐다면 금새 알아 낼 수 있잖아요?"
"알아주면 뭐로 보답할래?"
"오빠하고 언니한테 저녁 근사하게 대접할게요. 바쁘시겠지만, 속히 좀 알아봐 줘요."
"옛날 애인이라도 되는 거야? 누군데 그래?"
"내가 알면 왜 오빠한테 알아봐 달래겠어요?"
  예상보다 빨리 지숙은 오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었던 그 다음 날 점심때 경이었다.
"제임스 박이라는 사람의 한국 명은 박진우고, 미국 오기 전까지는 S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는데, 혹시 네 은사냐? 근데 마리야, 한국에서 그의 직업에 관해서는 서비스 리커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 미스터 김에게 들었는데, 그의 말이 그 스토어는 이번 폭동에 모두 전소되었다는 구나, 그래서 집 전화번호를 알아놨는데, 필요하면 적어둬라."
  전화기를 내려놓았는데도, 오빠의 음성은 여전히 지숙의 귓전에서 맴돌았다. S여고의 박진우, 가게가 모두 전소됐다. 윙윙 울리는 耳鳴이 되어 그녀의 머리를 혼란하게 하더니 급기야는 가슴마저 두근거리며 숨이 답답한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얼음을 둥둥 띄운 찬물을 커다란 컵으로 벌컥벌컥 마셨지만, 빨라진 심장 박동 수는 제자리로 돌아가질 않았다.
  <그 사람이 S여고 영어선생, 박진우, 아니. 그렇게 젊을 수는 없는데. 아마 TV 화면이라 젊어 보인 걸까? 오히려 TV에선 화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주름살까지 드러내 보이는 걸로 알고있는데. 지금쯤 못돼도 박 선생은 60이 가까워 오는 연령일 게다. 정말 믿을 수 없다.>
  그 유창한 영어발음, 말하는 억양은 분명히 박 선생의 것이다. 어떻게 전화를 해서 무엇을 말하며, 그를 만나야 할까. 아니면 그냥 묻어두고 말아야 하는지.. 지숙은 거실의 창가를 몇 번이나 오고 갔다. 242-0484, 그녀는 오빠가 불러 준 전화번호를 입 속으로 외워 봤다.
  전화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수화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지만 막상 전화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30여 년 전에 마음을 다해 사모했던 교교 은사를, 고국도 아닌 미국 땅에서 그것도 폭동을 만나 가진 것을 모조리 잃어버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가까이 만나지 못하고 보낸 세월이 너무나 많아서 이제는 서로 알아 볼 수나 있을지 조차 의심이 가는 그런 시간의 간격을 무엇으로 채우고 어떤 말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묘안이 서지 않았다. 더욱이 전화로는 더 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윤상호는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지숙에게 일렀다. '애들 단속 잘 해. 당신도 괜히 LA 시 나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꼭 붙어 있으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런데도 지숙은 그 당부를 듣지 않은 듯 외출복으로 갈아입고는 차를 LA 시내 쪽으로 몰았다.
  그녀의 차는 2번 프리웨이를 지나서 앨버라도 길을 거쳐 다시 할리우드 프리웨이를 잠깐 타다가 멜로즈에서 내렸다.
  LA 하늘은 매연으로 완전히 잿빛이었고, 군데군데 불타버린 건물에서는 아직도 매캐한 연기 냄새로 인해 지숙은 연방 기침을 했다. 어떤 상가는 대 여섯 개의 점포가 함께 붙어 있어서 모조리 타 없어지고 연기에 검게 그을려 조각난 벽이나 기둥들이 한심스러운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지숙의 눈에 이토록 심난하게 비칠 때는 가게 주인이나 건물주들은 얼마나 복통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져 내릴까 상상이 갔다.
  웨스턴과 샌타모니카가 만나는 왼쪽 코너에 있는 서비스 리커는 몇 개의 스토어가 함께 붙어있는 쇼핑 몰이었다. 그 몰에는 제일 끝에 있는 세탁소만 타지 않았을 뿐 나머지 상점들은 천장이 다 없어지고 쇠로 만든 기둥이나 칸막이들은 전부 불에 휘어 처참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서비스 리커도 다 타버렸지만, 앞에 우뚝 솟은 간판만은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있어 그곳이 박진우 선생의 가게였음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지숙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도 한참을 차안에 그냥 앉아 있었다. 어떤 상점은 옷가게였는지, 바닥에 풀풀 날아다니는 잿더미로 수북하게 쌓인 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서비스 리커가 있던 자리에도 깨진 병 조각들, 쭈그러진 깡통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한국인 이민 자들의 터전이 며칠 밤새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한줌의 잿더미로 초토화 돼 버린 터 앞에 서 있자니, 황무지의 시 한 구절이 아프게 떠올랐다.
  그녀는 서서히 차에서 내려 노란 줄을 쳐놓은 가까이 까지 다가갔다. 목이 간질간질 하면서 다시 기침이 나왔다.

1961년 4월
  점심시간 바로 뒤인 영어 시간엔 밀려오는 나른함을 견디지 못해 조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때면 졸음을 쫓기 위해선 지, 박 선생은 좋은 시 한편씩을 골라 읽어주곤 했다. 티 에스 엘리옷이 쓴 황무지(The Waste Land)를 읽었다. '이 시는 아주 긴 시라서 제 일 부의 사자의 매장(The Bural of the Dead)만을 소개한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은 자라고' 이렇게 시작되는 그 시는 당시엔 전혀 뜻이 들어오질 않았다. 가뜩이나 졸려서 죽겠는데 뜻이 납득이 안 가는 시를 읽어주면, 학생들은 무슨 시가 아주 자장가네. 저절로 코가 골아질 것 같아.' 한편에선 키득거리고, 또 다른 급우들이 불평을 삼았던 생각이 난다.
"여긴 위험한데, 혹시 누굴 찾아 오셨습니까?"
  갑작스런 남자의 목소리는 '황무지'의 시 구절과 함께 오랜 추억에 젖어있던 지숙의 생각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소리나는 쪽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머리는 하얗게 세어서 검은머리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도 벗겨지지 않아 또 숯이 많아서 더 멋을 풍기는 노신사가 서 있다. 젊었을 때 보다 살이 더 붙어 원래 큰 편이 몸집이 더 건강하고 중후해 보였다. 눈 밑의 주름과 얼굴 피부에 약간씩 피어난 검버섯을 제외한다면 그 형형한 눈빛이라든지, 말할 때 입가에 짓는 편안한 미소 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박진우가  분명했다.
"저어, 박진우 선생님 아니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그는 의아스러운 듯 자세히 지숙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전 강지숙입니다. S여고를 졸업했지요. 아직도 생각 안 나세요?"
"S 여고의 강지숙, 가-앙 지숙, 음, 지숙이. 야 이것 참 얼마 만인가-요?" 그는 어조를 약간 높이다가 다시 물었다. " 그래 여긴 어떻게 알았어? 미국엔 언제 왔고? 여기 날 찾아 온 게야? 아, 참 어떻게 알았지?"
  지숙에겐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연달아 질문을 했다.
  그들은 웨스턴 길 건너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복잡한 길에 있는 커피숍이라서 그런지 한가한 낮 시간인데도 무척 붐볐다. 자리가 없는지 여 종업원이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줄을 서 있으면서 박진우의 뒤에 서 있자니 지숙의 눈에 들어 온 그의 뒤통수가 그제 서야 세월이 흘렀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앞의 모습보다는 뒷모습이 더 늙어 보였다.

  지숙과 박진우 선생이 S 여고 교정 밖에서 만나게 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녀가 졸업반 때의 초가을,  대학 불문과를 응시할 목적으로 불어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해 과외에 불란서문화 학원에 등록을 했다. 당시 충무로에 있던 학원,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나가기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나서였다. 중급 반에서 문법 공부를 끝내고 입구를 향해 층계를 내려올 때였다. 앞에 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은 틀림없는 영어선생이라 여겼다. 그러나 혹시 실수 할 가 봐 급하게 내려가 그 임을 확인한 후 지숙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의 등허리를 툭 치며 아는 척을 했다. 반가운 나머지 마치 동료끼리 만났을 때나 할 수 있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저질렀던 무례함을 깨닫고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머, 선생님도 불어학원 다니세요?"
"음, 그래." 그는 그녀가 입고있는 교복으로 보아 자기학교 학생인가 보다 할 정도이지 특별히 지숙을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허긴 3백여 명이 넘는 학생을 가르치니까, 담임을 맡았다거나 뛰어난 수재 이든가 아주 말썽꾸러기가 아닌 다음에는 기억할 도리가 없었다.
"전 3학년 2반 강지숙입니다. 선생님께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아, 그렇군. 여긴 언제부터 나왔는가?"
"두 달 전부터입니다. 선생님은 요?"
"벌써 일 년이 다 되어오는데. 난 소설을 공부하고 있는데, 지숙은 뭘 하지?"
"전 문법을 공부하고 있어요. 중급 반이요."
"열심히 해봐. 불어는 아름다운 언어야."
"여기선 선생님과 저는 사제지간이 아니라 동창인 셈이네요."
  그 말에 영어선생은 밝게 소리내며 웃었다.
  박진우는 S여고에서 학생들간에 인기가 높았던 선생이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귀티가 나는 미남이었다. 여자가 무색할 정도의 흰 피부에 짙은 눈썹은 그를 퍽 이지적으로 보이게 했으며, 웃는 낯이면서도 눈가에는 우수가 감도는 그의 표정은 감수성이 풍부한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그의 얼굴에 깃들인 우수가 저절로 생긴 게 아니라 결혼한 지 1년만에 부인을 교통사고로 사별하고 어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사생활로 인해서 나타나는 슬픔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 고부터는 박 선생을 연모하지 않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여선생이 그를 짝사랑한 나머지 약을 먹고 드러누웠다.' 또는 '몇 반의 아무개가 선생님을 찾아가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빨아줬다.'는 등의 근거 없는 소문들이 박진우의 주변에는 매일 꼬리를 물었다.
  박진우가 학생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데는 그의 잘 생긴 외모가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그의 영어 실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가 지녔던 영어 실력이라는 게 문법이라든가 작문 실력이 아니라 보지 않으면 깜짝 속을만한 미국인과 흡사한 영어발음이었다.
  그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예츠(W.B. Yeats)나 프러스트 (R. Frost)등의 영미 시인들의 시를 읽어 줄 때는 학생들은 모두 넋이 나간 표정들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숙이 박진우 선생을 불어학원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도 막연히 그를 좋아하고 스승으로 존경하고 사모하는 모든 학생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교정 밖에서 둘이 만날 수 있었던 기회는 일방적이었던 지숙의 연정이 상대적으로 변해갔다. 또 머리 속으로만 그려보던 것을 실제화하고 행동화시켜 가는데 자극적인 도화선이 됐다.
  다른 친구들은 가지지 못한 선생님과 나만의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은밀한 감정을 사랑이란 주머니 속에 몰래 담아 혼자서만 꺼 내 보면서 지어보는 행복한 미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불어학원에서의 강의 시간 끝을 맞추었다.
강의가 끝나는데는 서로 15분간의 차이가 있었는데도, 먼저 끝나는 쪽에서 기다려줬다. 그리곤 버스 정류장까지 20분 정도는 늘 같이 걸었다. 박선생은 자기가 본 영화를 얘기했고, 또는 읽은 책에 대해서 들려줬다. 지숙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면 읽도록 권유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대로 서글픈 성품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우울하지도 않았다. 걸으면서 우스운 얘기도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농담 속에 장난스런 얼굴 모습으로 지숙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웃긴 적도 많았다.
  사제지간인 두 사람이 교실과 강단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에 꼭꼭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사제의 정이 색다른 정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에 빠지게 했다. 그 두려움은 지숙에게 만은 표현해낼 수 없는 기쁨으로 충일된 행복감을 묻어오기도 했다.
  그녀가 정서적으로 살이 찔 많은 자양분을 박 선생으로부터 받고 있다고 생각이 들면 들수록 자기는 그에게 아무런 기쁨이나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부족하고 초라한 느낌에 젖어들곤 했다.  선생님 앞에서 자신은 너무 어리고 세상도 모르는 철부지인 것만 같아 언젠가는 그녀를 버리고 그가 달아나 버릴 거라는 안타까운 상상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숙은 전혀 믿어지지 않는 박선생의 고백을 들었다. '하루 중 불어학원에 나오는 저녁 시간이 제일 즐겁고 기다려진다. 지숙이와 함께 있으면 자기의 나이를 잊는다. 그녀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천진스런 지숙의 웃는 모습이 눈 속으로 환히 들어온다. 웃을 때 만드는 볼우물이 무척 사랑스럽다.' '지금 녹음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왜? 증거물로 남기고 싶어서?' '아니오. 두고두고 듣고 싶은 말들이라서....'
  지숙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밤하늘의 별들과 달이 저토록 아름다웠던가? 산천수목과 길가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꽃들도 오직 그녀를 위해서 피고 졌다.
  몇 달밖에 남지 않은 대학 입시 안중에도 없었다. 준비는 고사하고 근심 염려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이 입시 공부로 인해 얼굴들이 꺼칠해 지면서 까지 잠을 안 자고 열심을 낼 때에 그녀만은 다른 세상에서 온 듯 얼굴이 뽀얗게 피어나 활짝 웃는 모란 꽃 같아 누가 보아도 아름다웠다. 주변의 친구들이 교과서나 참고서에 파묻힐 때에 지숙은 박진우가 권해준 소설책에 더 심취하고 있었다.
  대학입학 시험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박 선생이 듣고있던 불어 소설 반이 끝났고, 지숙은 입시준비에 열을 다하기 위해 다음 반을 등록하지 않았다. 아무리 입시공부에 관심이 없다 하드라도 명색이 수험생인데, 막바지 고비는 집에서 입시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할 것 같아 불어학원을 잠시 쉬기로 했다. 막상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나니 두 사람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일 얼굴을 볼 수 없음에 서운했다. 어쩌면 다시 이런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정은 지숙이 쪽에서 더 심했던 것 같다.

  웨이트레스가 안내해 준 자리는 창이 옆으로 나있고 따듯한 백열등이 식탁 위를 아늑하게  비쳐주는 편안한 자리였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지숙은 박선생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번 폭동으로 인한 가게의 화재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많이 어려우시죠?"
"글세, 처음엔 황당하고 많이 놀랬지. 허지만 보험도 들어있고 하니 어떻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 가게가 내 가겐 줄 알았어? 정말 궁금한데, 빨리 말 해봐요."
"며칠 전 채널 7 TV 방송 뉴스 시간에 출연하셨지요? 거기서 뵙고 수소문했어요. 저의 오빠도 3가와 버몬트에서 리커 스토어를 하고 있거든요."
"아, 그랬었군. 그래, 오빠 가게는 괜찮은가?"
"네, 다행히...." 지숙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선생님은 저 번에 TV에서 보니까 여전히 영어를 잘 하시던데.... 한국인 듯 싶은데 영어 발음이 하도 좋아서 눈여겨보았다가 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그 영어 실력에 다른 일을 하시지, 어떻게 리커 스토어를 하시게 됐어요? "그녀는 TV화면에서 박진우를 알아 본 것처럼
얘기했다.
"영어 잘 하긴, 뭘. 누굴 가르치기엔 딸리는 실력인걸. 또 학력도 부족하고, 그래서 처남이 리커 스토어를 하고 있기에 손쉽게 시작할 수 있었어.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사는데는 언제 어디서고 문제가 있는 법인데, 무엇을 하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
  박진우의 말을 들으면서 지숙은 자기도 모르게 직업의 귀천을 따진 것 같아 속으로 미안한 감이 들어 얼떨결에 화제를 옛날로 돌렸다.
"선생님, 그 전에 걸음마 시작하던 딸, 지금은 출가했겠네요."
"그럼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참, 지숙인 애가 몇이지? 부군은 뭘 하시는가?"
"남편은 소아과 의사이고, 애들은 딸과 아들 둘입니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지숙인 다복하군. 지금의 행복한 지숙을 앞에 대하고 보니 옛날에 내가 결정한 사실이 얼마나 잘 했는가를 다시 한번 깨달아지는군."
"제가 행복한 지 어떻게 아세요?"
"얼굴에 그렇다고 쓰여있어." 두 사람은 말없이 웃었다.
"선생님, 그 때 왜 그렇게 말도 없이 이사를 하시고 자취를 감췄어요? 전 얼마나 선생님을 원망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저 자신을 많이 자책도 해 봤어요. 선생님 앞에서 너무나 철없이 제가 놀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저를 피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
  박진우와 그녀는 이미 흘러버린 오랜 시간 속으로 똑같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커피샆 벽에 붙은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분간 불어학원에서의 만남을 중단하자고 맘을 정하고는 지숙은 단 며칠을 못 참았다.
'선생님, 이대로 헤어져 몇 달간을 지낼 수는 없어요. 우리 돌아오는 일요일에 만나서 석별연을 갖기로 해요' '석별 연? 어디서 어떻게?'
'그건 그날 만나서 정하기로 하고요, 일요일 아침 10시에 당인리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요.'
  그녀의 뜻대로 만들어진 약속은 겨울 바다로의 초대였다. 인천 작약도의 바닷가, 당인리에서 한시간 반만 달려가면 만날 수 있었던 해변은 끝내 지울 수 없는 각인 된 판화로 지숙과 박진우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겨울에 그 바다만이 갖고 있던 매력, 황량하게 깔려있는 빈 모래벌판, 간간이 가슴을 후비는 듯한 물새소리, 어떤 소음도 삼켜버릴 듯한 적막함이 그 판화 속에 또렷이 살아있다.
  실제로 오자고 한 것은 지숙 이었는데, 겨울 바다를 즐기는 쪽은 박 선생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뒤척이는 바다의 몸짓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염없이 뒤척이는 저 바다의 몸짓은 고독한 인간의 절규를 닮은 것 같아 더욱 친근감이 간다고 말했다. 짧은 겨울 해가 수평선 너머로 꼴각 자취를 감추고 붉은 빛이 수면 위를 물 드리고 있을 때 지숙은 발이 시리며 온 몸이 추워오기 시작했다. 코트 밖으로 나온 두 다리는 너무나 얇은 나이론 스타킹이 살을 감싼 전부였다. 바람에 쓸린 종아리는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빨간 줄이 생겼다.
  박진우가 그녀의 얼어오는 체온을 느꼈는지, 자기의 목도리를 풀어서 지숙의 목에 감아주면서, 눈길이 지숙의 다리로 쏠렸다. ' 종아리에 동상 걸리겠네. 자, 내가 양말 벗어줄게. 이것 신어봐.' 그는 선 채로 양말을 벗어 지숙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한 마디 사양도 않고 목이 긴 털 양말을 받아 신었다. 그 때의 따스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박 선생의 포근한 정겨움이 지숙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퍼져오면서 그녀는 전에도 후에도 낼 수 없는 용기가  마음으로부터 솟았다. 적어도 십 년은 더 위인 스승의 팔을 끌고서 근처의 여인숙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대담성을 아직 철이 안 든 소녀의 객기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지숙의 제안에 주저하지 않고 따라 들어왔던 박선생의 처음 태도와는 달리 여인숙에 들어와 저녁상을 받은 후에는 계속 그는 안절부절이었다. '자, 이제 추위를 녹였으면, 일어나지. 우물거리다 막차를 놓치면 큰일이야. 부지런히 돌아가도 집에 일찍 들어가긴 틀렸어' 선생님의 안달만 아니었다면 지숙은 밤을 지새워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나와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궁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이 가졌던 철 지난 바다의 송별은 집 체 만한 물 더미로 밀려와 두 사람의 발 밑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시리도록 차가운 파도 속에 끝내 묻혀 버리고 말았다. 아니 무서운 기세로 밀려와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그냥 바다의 모양이 되듯이 박선생과 지숙은 예전의 그들로 돌아가 있었다.
  박진우는 예전의 그가 아니라 오히려 지숙에게 또 다른 타인이었다. 여러 번 전화해서 어렵사리 통화가 되면 저녁에 바쁜 일이 있다, 집에 무슨 볼일이 있다며 지숙의 청을 차갑게 거절했다.
  동네 집 담 너머로 개나리꽃들이 노랗게 얼굴을 내밀고, 꽃나무마다 봉긋이 물이 오르며 봄볕이 온 누리에 따사로운데도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다. 그래도 원망할 수 있고 허전함을 드러낼 수 있는 지숙은 박진우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스승과 제자, 한 번 결혼했던 사람이 아직 어린 여학생을.... 이런 등등의 사회적인 위치가 무작정 보고싶고 그래서 당장 달려가 만나고 싶은 감정을 억제해야만 하는 박진우는 매일 저녁 술에 취하지 않고는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지숙은 전기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후기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입학식을 일주일 남기고 지숙은 큰마음을 먹고 박진우의 자택을 찾았다. 여러 날 생각하고 고심한 끝에 그녀로선 이 길이 최선의 방법이라 여기고 찾아갔다. 그녀가 갔을 때 선생님은 집에
없었다.
  여학교 선생으로 있으면 학생들이 집에 찾아오는 일이 흔히 있는지라, 박선생의 모친인 듯 싶은 육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네가 자연스럽게 지숙을 그의 방으로 안내했다.
  저녁 8시가 지나서야 돌아왔던 박진우는 지숙을 보자마자 아주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놀라운 표정 속엔 근심스러운, 그러면서도 반갑고 한편은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그 시간까지 지숙이 저녁식사 전이었음을 알고 그는 선 채로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퇴계로에 있는 닭곰탕 집으로 갔다. 닭국의 단 맛을 제대로 맛보며 먹어보는 것이 실로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 동안은 음식 맛을 알거나 식욕이 당겨서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음식점에서 나와 지숙은 선생님 팔 장을 꼈다. 그는 지숙의 손을 잡아서 그의 코트 주머니 속에 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가라앉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지숙은 지금 나를 이렇게 만나서는 안돼. 인생의 중요한 시기인데, 학업에 전념해야 할 때야. 그리고 내게 느끼는 지금의 감정은 그 전에 봤지? 바닷가의 파도 같은 거야. 밀려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것. 대학에 가서 새로운 친구들 사귀고 전공과목이나 흥미 있는 분야에 심취하다 보면 지숙이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전 대학 생활도 착실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가끔씩 이렇게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면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지숙은 선생님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런 답답한 만남 이후로, 한 두 달이 눈 깜짝할 사이 흘러버렸다. 그녀는 다시 용기를 내서 박선생 댁을 찾아갔지만, 그 땐 이미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문패로 달려있었다. 그녀에겐 한 마디, 한 줄의 알림도 없이 말이다.

  박선생과 지숙, 두 사람 사이에 정말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시간의 공백이 있었단 말인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마도 박선생 앞에 앉아있는 지숙 자신이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나, 한 남자의 아내라는 위치 마저 훌훌 털어 버린 듯이 홀가분한 기분 때문이지 모르겠다. 갑자기 어디로든 훨훨 날을 수 있는 새가 된 것처럼 자기 몸이 가볍다고 생각했다. 깃털처럼.
"선생님, 오늘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나오셨나요? 괜찮으면, 제 차로 한, 두 시간 드라이브 하고 싶은데요, 어떠세요?"
"내가 하려던 일은 내일 해도 되지만, 지숙인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없잖아?"
"괜찮아요. 남편과 애들한테 미리 전화하면 될 겁니다."
  그들은 각각 집에다 전화를 했다. 좀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붙였다. 박선생은 지숙이 S여고를 졸업하고 나서 6년 뒤에 지금의 부인과 재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엔 아이가 둘이 있는데, 늦게 본 자식들이라 귀엽기는 해도 그의 힘에 부친다고 말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 애들 때문에 내가 이 나이에 미국까지 와서 이렇듯 열심히 사는 것 아닌가?"
"애들이 어리기 때문에 선생님은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세요. 그런 점은 감사해야 할 조건인 것 같아요."
"어디 가고 있는 지 알겠네. 맬리브 비치 가는 것 아냐?"
"네, 맞아요. 선생님도 가 보셨나 봐요."
"응. 아주 오래 전에. 바닷가 마음대로 가는 버릇은 여전하군."
"왜요? 싫으시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릴 가요?"
"아니, 싫긴 왜 싫어? 그렇단 말이지. 말을 꼬집어서 토라지게 하는 버릇도 그냥 갖고있군."
  박진우는 잠시 착각을 할 정도로 여고시절의 지숙을 떠올렸다. 그러나 옆에서 바라 본 그녀는 성숙하게 무르익은 여인의 완숙미가 한여름의 잘 익은 수밀도 복숭아 향기처럼 물씬 풍겨왔다. 지숙은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눈부신지 썬글래스를 꺼내서 썼다.
"선생님, 앞으로도 그 장소에서 서비스 리커를 다시 운영하실 생각이세요? 다른 주나 타운으로 이사할 마음은 없나요?"
"화재보험 신청 액수가 나오고, 또 사업 융자금이 나오는 대로 그 자리에서 재기해야지. 가긴 어딜 가? 이번 폭동은 한인과 흑인 사이의 문제가 아니지. 3,40년 전부터 내려온 백인이 흑인을 차별대우한 여파인데, 한인들이 본 피해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됐지."
"이런 식의 폭동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너무 심적 타격이 클 것 같아요. 또 두렵기도 하고요."
"아마, 다신 일어나지 않을 거야. 또 일어난대도 할 수 없지. 나만 당하는 일 아니잖아? 지숙인 혹시 '시지프의 신화'를 읽어 봤어? 거기에서 신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돌덩이를 산꼭대기까지 올리도록 명령을 내렸지. 허지만 그 바위 덩어리는 자신의 무게로 인해서 자꾸 굴러 내려왔어. 그래도 그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해야 했던 게 시지프의 형벌이었듯이 우리 인간들도 각자에게 지워진 운명이 있고, 책임이 있는데 그 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럽다 할 지라도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게야."
"선생님은 운명론자인가 봐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어떤 길을 찾느냐에 따라 그 짐을 벗을 수도 있고, 때로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넓게 열리기도 한다는 게 제가 오늘까지 살아 온 삶에서 터득한 사실이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박진우는 약간의 농 섞인 어조로 대꾸하며, 그제 서야 세월이 지숙을 많이 변모시켰음을 생각했다.
  어느새 두 사람이 탄 차는 맬리브 비치 피어로 들어가고 있었다. 바다 기슭까지 차를 주차 할 수 있도록 나무로 덱크를 만들어 놓았다. 보기에도 깨끗해서 좋았을 뿐 아니라 그 덱크가 해변까지 연결돼서 더욱 편리하고 좋았다. 차에서 내리자 상쾌한 바다 바람이 한 시간
가까이 차에서 데워 있었던 열기를 단숨에 식혀주는 듯 싶었다.
  바닷가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 커다란 날개를 쫙 펴고 물위를 나는 바다 갈매기들의 모습과 끼룩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물이 밀려왔다 나간 모래톱 위에 참새 만한 작은 물새들이 종종거리며 걸어서 만들어놓은 발자국들이 만지고 싶도록 귀여웠다.
"야, 참 시원하다. 역시 태평양은 물이 더 푸른 것 같아."
"옛날의 바다는 고독한 인간의 몸짓을 닮았다고 하셨는데, 오늘의 바다는 어때요?"
"그 게 정말 내가 한 말인가? 참 오래도 잊지 않고 있네. 오늘의 바다는 내 아픔이나 모든 쓰라림까지도 감싸 안을 듯이 품이 넓고 따듯해 보이는군."
"그 만큼 선생님은 달라졌어요."
"목이 좀 타는데, 우리 저쪽에 가서 드링크라도 한 잔 할까?"
  박진우는 식당들과 기념품을 파는 점포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지숙은 대답 대신 먼저 그리로 발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느 한 곳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월터 디즈니의 노래들, 믹키마우스, 잇즈 스몰 월드 등의 음악들이 실로폰과 벨소리로 화음 돼 절로 흥이 나게끔 멜로디가 좋았다.
  그들은 목이 말라 드링크를 찾던 사실도 잊고 넋 놓고 한참을 서서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홀에 어린이들을 태우기 위한 놀이들이 즐비했다. 경주용 자동차도 있고, 빙빙 휘둘러대는 티 컵도 있다. 그 외에 각종 게임을 비롯한 메리고라운드(회전목마)도 있다.
  박진우와 지숙은 애들처럼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회전목마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메리고라운드는 휘황찬란한 전등을 달고 동심을 불러일으킬 노래들을 내뿜으면서 천천히 회전을 거듭했다. 목마들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위, 아래로 오르고 내렸다.
"선생님, 우리 저 회전목마 한 번 타요."
"그럴까. 나도 실은 타고 싶었어."
  박진우는 제일 큰 백 말을 짚었다. 지숙은 그 옆에 좀 작은 갈색 말을 택했다. 두 사람이 말에 오르자 다시 음악이 흘렀다. 하얀 말과 갈색 말은 원심 대를 향해 돌아갈 뿐 서로 만날 수는 없었다.  하얀 말이 오르면 갈색 말이 내리고, 갈색 말이 올라갈 때는 하얀 말이 내려갔다. 그것은 서글픈 엇갈림이었다.
  밖에서 회전목마를 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부럽다. 타고싶은 듯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미국인 두 남녀가 타겠다고 손짓을 했다. 그 백인 청년들을 태우기 위해 메리고라운드를 멈췄을 때, 박진우는 그만 타자고 지숙에게 손을 내밀어 내릴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릴 생각이 없었다. 한 번의 회전목마는 너무 짧았다. 두 번을 돌고도 다시 타고 싶었다.
  맬리브 해안에 해는 지고 달이 훤히 떠오를 때까지 박진우와 지숙은 맥주를 마셨다. 목을 축인다는 게 취하도록 마셨다. 그리곤 술이 깨기를 기다려야 한다며 취기 어린 두 사람은 해변 모래사장을 맨 발로 뛰었다. 몇 바퀴 돌았을까, 숨이 차서 벌렁 드러누우니 하늘의 별들이 그들의 얼굴과 가슴팍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세상일들은 그리 좋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다지 나쁜 일도 없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구나 생각했던 게 어느 날 행운을 실어오기도 하니까. 이 번에 당한 4.29 폭동이 언젠가는 도움을 주는 사건으로 변할 지도 모르지. 내 세대에 아니면 내 아들 세대에라도 말야.'
  이 말은 불타고 도둑 맞은 폐허 속을 향해 가는 차 속에서 박진우가 지숙에게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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