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옆에서

2007.02.15 11:49

정해정 조회 수:793 추천:45

   새벽 꽃시장에서 연보라색 수국 화분 하나를 사왔다. 거실에서 며칠 두고 보다가 마당에다 심어야지 맘먹고 화분을 예쁜 바구니에 담아 일단 볓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릴잡아 놓았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수국 옆에 앉았다.
   연보라색 꽃잎 넉장이 단정하게 겹쳐 있고 한 가운데 좁쌀 같은 노란 씨 한 알이 꼭 박혀 있다. 연보라색이 때로는 연분홍색으로 변하기도 하는 꽃이다. 꽃잎은 야들야들 아기의 살결 같다.
   홀로 서기에는 너무 외로웠을까. 홀로 향기 날리기에는 너무 힘겨웠을까. 오밀조밀 서로 부등켜 안고, 동그랗게 원을 만들고, 작은 우주를 만드는 꽃 뭉텅이. 넙적한 초록색 이파리가 조심히 작은 우주를 받쳐들고 있다.

   내가 수국을 첨 본 것은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함박만한 분홍색 꽃 뭉텅이가 두 개든 화분 하나를 들고 오셨을 때였다.
   “야! 이거 봐라. 아들 손자 며느리가 다 어우러진 꽃이란다”
   그러고 보니 꽃씨만큼 작은 것에서부터 봉우리 진 것, 막 피어나는 것, 활짝 핀 것들이 죄다 얼기설기 모여 한 뭉텅이가 된 꽃이었다. 그때 나는 그 꽃 이름을 몰랐지만, 그 꽃을 보니 갑자기 아주 어렸을 적 일이 생각 났다.
  어느 날 언니를 따라서 성당에 갔었는데. 마침 성당 마당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종종종 모여 있었다. 그들은 새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꽃 뭉텅이 때문인가. 그 모습이 바로 한 송이 수국으로 내 눈앞에서 피어난 것이다. 한참 후에 아버지로부터 그 꽃 이름이 <수국>이라고 들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 초가을에 시집을 갔다. 공교롭게도 시댁 마당에는 수국 서너 뭉텅이가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혼살림이래야 층층시하 사대가 함께 사는 시댁에, 나는 밥풀처럼 붙어사는 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새로 들어온 새댁이 무던히도 철없는 짓을 많이도 했다. 끼니 때면 밥상을 네 개씩이나 보는데 내 위치는 부엌 문에서 제일 가까운 일하는 아이와 겸상이라는 것도 모르고, 시아버지와 남편의 밥상에 떠억 내 밥그릇을 올리고 뚜껑까지 덮어 들여갔던 일.
   갑자기 여름에 소나기가 퍼부어, 급히 장독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간장 된장 고추장 항아리에 빗물이 가득했던 일.
   어느날 담요를 빨아 널다가 물먹은 담요가 무거워 빨랫줄과 함께 넘어져 수국에 코를 박았던 일. 수국꽃은 다 잉끄러지고 빨래는 다시 행궈야 했지만,  내 얼굴에 닿았던 그 야들야들한 아기피부 같은 수국의 촉감과 연한 향기가 지금도 내 코끝을 맴돈다.
   철없는 새댁의 실수를 그냥 웃음으로만 넘기셨던 시댁 어른들. 지금 그분들 모두는  하늘나라에서 수국을 가꾸고 계실까.  부대끼며 엎치락 뒤치락 부둥켜 안고 살았던 대가족 시집살이 하던 때가 몹시 그립다.

   또 세월이 흘러 늘그막에 개나리봇짐 달랑 지고 태평양을 건너 이민길에 올랐다.
   마음 부칠 곳이라고는 교회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물어물어 한인성당을 찾았다. 어렵게 내가 찾은 한인성당은 미국성당에 곁들어 있으면서 사랑도 미움도 저희끼리 지지고 볶고, 비벼대고 살아가는 공동체, 바로 수국 뭉텅이 같은 이민 교회였다.
   가까이 몸들을 부둥켜 안고 동그랗게 원을 만드는 수국 뭉텅이, 작은 우주를 만드는 수국 뭉텅이...

   나는 햇빛이 잘드는 거실 창가에서 연보라색 수국 뭉텅이를 맥없이 바라보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신다.
   조잘조잘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까르르 까르르 쏟아지는 정다운 이웃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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