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온 편지

2007.04.01 11:42

정해정 조회 수:387 추천:37

  빛 가득한 LA 를 떠난지도 벌써 두달이 넘었습니다.

  지금 서울은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서울의 길거리는 대형 국화 화분으로 곳곳이 장식 됐고, 가로수 에도 색색깔로 예쁘게 가을이 물들고 있습니다.

  저는 치과치료와 딸아이의 결혼식을 치루느라 복잡한 서울에서 계절이 바뀐줄도 모르고 바빴답니다.

  지난 주 월요일 에는 친구와 단둘이 광주행 새벽 고속 버스를 탔지요. 저는 이민살이를 하면서 한동안은 고향의 가을을 잊고 살았습니다.
  저는 새벽이 밝아오는 차창밖의 풍경에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울긋불긋 단풍이 물든 아기자기한 산들과 금빛의 들. 파아란 하늘. 세계의 어느가을과 견줄 수 있을까요. 얼마만큼의 돈을 주어야 고향의 가을을 살수 있을까요.

  이런곳이 내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에 뭔가 뭉클 올라오며 목 언저리가 뜨거워 오더군요.  아! 가을…
  남녀노소 휴대폰을 들고 아무대서나 큰소리로 전화를 하며, 버스안에 TV와 공중전화까지 있는 편리한 시대에 우리국민은 살고 있습니다.
복잡한 서울을 새벽에 탈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두어시간 갔지요. 중부 휴게소에 내렸어요. 휴게소는 현대식 건물에 많은 차량과, 장사와 손님들로, 복잡하고 무질서한 서울이 여기까지 따라온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빠른속도로 내동댕이 치듯 가락국수그릇을 우리앞에 내던진 처녀의 손놀림에 덩달아 우리도 바삐 후후 불며 요기를 했습니다.

  금빛물결 김제평야를 지나니 감나무가 보이기 시작해요.이파리 하나 없이 빠알간 감이 주렁주렁 메달린 감나무 가지에 나도 이 가을에 누구에겐가 사랑의 편지를 써서 걸어놓고 싶군요.

  두어시간 더 가니 광주에 도착했어요. 마중나온 친구와 셋이 어린애처럼 팔짝팔짝 뛰다가 곧바로 5.18 공동묘지로 향했습니다. 80년 5월 불의와 폭정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지요. 친구 설명으로는 문민정부 덕분에 망월동 묘지에서 5만평이 넘는 운정동 산으로 묘지를 옮기고 40미터 높이로 추모탑을 세웠다는데 우리는 참배를 하면서 거부감이 느껴지는건 왠일일까요.

  이런 화려한 묘지가 여기 누워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직도 병원에서 신음하고 있는부상자 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똑같이 입맛이 씁쓸했습니다.

  우리는 무등산자락 담양에 있는 소쇄원으로 자동차를 돌렸습니다. 옛 문학의 산실인 누각과 정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지요. 소쇄원 입구 대밭 숲은 가지런 하고 정갈해서 우리들의마음도 흡수 되는듯 했습니다.

  조선중기 조광조의 문하생 양산보가 기묘사화때, 조광조가 사약을 받아 죽은 후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계곡과 대나무 숲,정자와 누각이 어우러진 즉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아름다운 소쇄원을 지었답니다.
  많은 명문장가들이 이 아름다움에 반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어느 한편도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했다 합니다.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와 사돈간이었던 김인후는 소쇄원을 48가지로 노래하고도 모자라 10여편의 시를 또 지었다 해요.
  송강 정철도 <소쇄원 초정에 부치는 시>를 썼답니다.

  내가 태어나던해에/이 정자 세워/사람이가고오고/ 마흔해 로다/ 시냇물이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 깨지도 않네.

  저의17대 할아버지인 송강 정철이 사 미인곡, 속 미인곡.을 지으셨다는 송강정 툇마루에앉아 잠시 다리를 쉬었습니다. 뿌듯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해봤습니다.

  우연찮게 고향에 오래도록 머물게 된것이 내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나날 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에 고향의 가을냄새를 조심히 넣어 보냅니다. 만날때 까지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빛 가득 넘쳐나는 LA를 그리워하며.    정해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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