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2007.04.04 13:53

정해정 조회 수:702 추천:33

어젯밤 내내 세찬 바람이 불었다.
아침이 되니 바람은 꿈이라도 꾼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햇빛은 더 투명하고 잔잔하다.마당으로 나가봤다. 어젯밤 바람으로 화분이 넘어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져 온통 수라장이다. 나는 어디서부터 손을댈까 망설이며 쭈그리고 앉았는데 깨진 화분에서 연초록색 새싹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뭐야?”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내게는 실로 과분한 일로 <미주 중앙일보 . 이아침에> 고정필진이 된 후 몇 회가 나갔는데, 놀랍게도 어느 독자가 보라색 조그만 꽃이 송알송알 달린 ‘히야신스’ 화분 하나를 보내왔다. 독자에게서 꽃 선물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 독자를 만나게 되면 줄량으로 망원렌즈를 사용해서 사진을 찍어 놓았다.
유난히 향기가 짙은 히야신스 화분을 화장대 위에 두고 방을 들락거릴때 마다 과분한 이 선물이 감격스럽기도 했고, 알량한 내글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큰 기쁨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 열흘쯤 지나자 꽃도 지고, 향기도 없어져 마당구석에 밀어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히야신스는 알 뿌리 화초라 1년동안 흙속에서 잠을 자다가 이른봄이 되면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연초록 새싹으로 잠을 깨고 일어난다.

내게는 연 초록색이 연상되는 다시 만나고 싶은 분이 한 분 계시다.
한반도 남쪽 작은 항구도시 목포에서 자란 내가 헐렁한 감색 교복을 새로입은 꼬마 여중생이 됐을때였다. 모든것이 새롭기만 했다. 빳빳하게 풀을먹인 하얀 교복 칼라에 클로버 모양의 뱃지를 가슴에 단 나는 세상사람이 다 나만 보는것 같았다.
수업시간 마다 모두 다른선생님이 들어오는것도, ‘산수’를 ‘수학’이라 부르는 것도 근사한 일이었다.

우리반 담임 선생님은 ‘국어’를 담당하신 남자 선생님으로 유난히 피부가 하얗고, 입술 색이 창백한, 키가 훤칠하고 조용하신 분이다.
나중 알고 보니 그분은 시인으로.
<찌르릉찌르릉/비켜나세요.> <아롱다롱/ 나비야.> <넓고 넓은 밤하늘에/ 누가누가 잠자나.> 등등 주옥같은 동요의 동시를 지으신 ‘목일신’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특별히 나를 귀여워 해 주셨다.  

어느날 이었다. 시인이신 목일신 선생님은 숙제로 교지 <클로버>에 실릴 글을 써 오라 하셨다. 그때 나는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세상에 태어나서 첨으로 ‘시’라는것을 써봤다.

중학교에 들어 오면서 곧바로 미술반에 들어간 나는 색깔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던 모양이다.그래서 인지 지금 기억으로는 숙제인 시도 색깔을 비유해서 썼던것 같다.
<초록색 로사(나의 세례명)는/ 성당에 간다.>로 시작해서 빨강색 죄를 하얀색 기도로 비니. 분홍색 마음이 되어 다시 초록색 로사는 성당에서 돌아온다. 는 대충 이런 유치한 내용이었던것같다.
목일신 선생님은 학교 안에있는 일본식 건물인 사택에서 사모님과 단 둘이서 사셨다.

수업이 끝나면 나를 종종 부르셨다. 햇볕이 들지않은 어둑어둑한 다다미방에서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물으셨다.
“나는 무슨색깔이냐?”  “연초록 색이요.”
옆에서 뜨개질을 하시던 사모님이
“그럼 나는?” 하고 웃으셨다.
“ 음~~ 사모님은 보라색 이요.”
아마 그때 내 생각은 선생님은 동요를 지으신 분이라. 연초록 색이요, 사모님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어딘지 고독하게 보여 보라색이라 했을까?
2학년에 올라가면서 목일신 선생님은 서울 이화여중으로 전근 가셨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선생님의 깨끗한 동요를 대할 때 마다 뭉클 선생님 생각이 새싹 처럼 돋아나곤 했다. 그럴때마다 선생님을 뵈온듯 꼬마 여중생으로 되 돌아가 선생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50년이 훨씬넘은 지금까지 선생님을 만나뵌적은 한번도 없다. 사실은 살아계신지 조차 모르고……

다시 히야신스 새싹을 조심히 들여다 본다. 이토록 연한 싹이 단단한 흙을밀고 나오는 힘이 어디있었을까. 나는 선생님을 생각하며 서둘러 카메라 엥글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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