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냄새

2007.04.09 12:10

정해정 조회 수:558 추천:27

    사철 꽃이 피어 있어 계절 감각이 둔한 이곳 LA에도 슬슬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스산한 바람은 팜트리 머리 위로 하늘을 성큼 들어 올리고, 밤기운은 냉정하게 차다.
    집 없는 고양이들은 털을 세우고 어슬렁거리며, 나무들은 잎을 하나씩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세상만사 맘먹기에 달렸다.>
    이 말은 내가 평소 좋아하며 자주 쓰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 세상만사 좋은 쪽으로만 맘먹기로 노력한다.
    일생을 사계절로 친다면 겨울 문턱에 들어서 있는 사람으로서 인생무상과 허무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과 수확의 계절이니, 오직 ‘풍요’일 뿐이라고 맘먹는다.

    봄은 물론 희망적이고 아름답다. 거기에 비해 가을은 지난 날을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니 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매력이 있다고 할까.
    어렸을 적 할머니가 들려줬던 옛날 얘기 끝에는 모두 ‘잘 먹고, 잘 살았단다’하고 종지부를 짓고, 우리 고전소설 역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얘기들의 마지막 경사가 일어나는 계절이 한결같이 모두 가을철이라는 것이다.

    용궁에서 나온 심청이가 아버지를 상봉해서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뜨는 장면도 오곡이 무르익은 가을이요. 흥부네가 스르렁 박을 타는 것도 가을이다. 또 춘향전에서는 이몽룡이 '어사출두요~’하는 벼락 같은 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했으니, 이것도 아마 가을이 아니었을까.

    내가 우리 고향의 가을을 다시 생각한 것은 한말에 한국에 온 선교사가 쓴 글을 읽고서였다. 그 글에는 한국의 가을 하늘은 세계 어느 나라 가을 하늘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예찬했다. 그 때 내 기분은 어느 외국사람이 나를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칭찬해준 것처럼 뿌듯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을은 덥고 끈끈한 여름에서 벗어난 선선하고 쾌적한 기후의 계절이며, 봄은 여자가, 가을은 남자가 설레이는 계절이라고…

    문명의 발달로, 인구의 증가로 세상이 썩어가고, 사람의 마음도 더럽게 오염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 한국인에게는 변하지 않은 푸르고 청청한 가을 하늘이 있어 소중한 재산이 아닐런지.

    가을 얘기를 하다보니 고향의 가을 냄새가 그리워진다. 국화잎 넣어 새로 바른 창호지 문의 탱탱한 소리와 향긋한 종이 냄새. 색바랜 머리칼 날리며 서걱서걱 우는 갈대의 몸짓, 시린 바람에 파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 건너방에서 들려오는 외숙모의 다듬이 소리, 밤을 적시며 처마끝에 떨어지는 밤빗소리.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나무 끝에 빠알간 감 두어 알. 데굴데굴 굴러온 샛노란 은행잎. 마당가를 맴돌다 수숫대 위에 올라앉은 고추잠자리. 빈 제비집…..

    아!아! 가을 냄새. 내 가슴속에 가을 냄새가 확 들어온다.
  ‘그래. 세상만사 맘먹기에 달렸지’ 중얼거리며 국화차 한 잔을 챙긴다. 하얗고 조그만 들국화 두 송이가 둥둥 뜬 찻잔을 내려다본다. 나는 고향의 가을을 마시듯 국화차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신다.

    순간 어쩌면 지금 고향의 가을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TV를 켰다. 내 마음을 어찌 알았을까.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밀짚모자를 눌러쓴 나이 지긋한 농부가 커다란 소의 등에 타작한 곡식을 가득 싣고 좁다란 흙길을 걸어오고 있다.
    "여.여. 우우우…”하면서.
    어느새 내 마음은 고향의 흙길로 달려간다. 그 농부와 함께 소의 고삐를 붙들고 쩔렁쩔렁 소방울 소리를 들으며 가을 냄새를 맡는다. 깊게… 크게…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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