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지 세일

2007.04.09 12:14

정해정 조회 수:681 추천:56

    미국 속담에 '그대의 쓰레기는 나의 보물'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주말이나 여행 중에 거라지 세일(Garage Sale)을 더듬는 것을 좋아한다. 거라지 세일이란 쓸모없는 생활용품이 집에 모아지거나 살림을 정리할 경우 집 앞에 내다놓고 파는 조그만 개인 시장이다. 주로 차고나 집 앞 잔디밭에서 펴놓고 거래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부쳐졌나보다.

    어느 집이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꼭 필요한 생활용품보다는 쓸모없는 것이 집 안에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과감하게, 아주 헐값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양도한다. 꼭 장사라는 목적보다는 내게는 쓸모가 없는 헌 물건이지만 물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쓸모있는 사람에게 양도하는 관습이랄까.
    그러나 우리 민족은 유별나게 남이 썼던 물건이나 남이 입었던 옷을 꺼림직하게 생각한다. 무의식 중에 그것들 속에 자기하고 맞지 않은 나쁜 영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한중록’을 보면 강박 편집증이 심한 사도세자는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로 옷에 귀신이 붙어왔다고 해서 불 사르고, 옷 한 가지를 입으려면 수 십 벌을 갈아 치우고 옷 시중을 드는 이들을 종종 피를 보게도 했다 한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 비해서 중고품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지 거라지 세일을 돌아다녀 보면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한국인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로 한국 친지의 아기 돌이나 집들이에 초대되어 갔을 때, 선물로 아기 헌 옷이나 낡은 생활용품을 가져갔다면 주인은 그 자리에서 인연을 끊을 만큼 불쾌할 것이다.
    우리 식구들 역시 내가 거라지 세일을 더듬다 필요한 것을 구해 오면 눈살을 찌프리기 때문에 몰래 숨겨 가지고 와서 깨끗이 손질해서 정리해 놓고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어느 날은 땅바닥에 한국책들이 딩굴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친척을 만난 듯 반가웠다. 장난기 넘치는 흑인 주인남자는 놀래는 나를 보더니 책을 펴 들고 읽는 시늉을 한다.
“롤롤…롤롤롤…” 문학전집이었다.
“너네 바이블이냐?” 물으면서 몽땅 $1.에 가져가라 한다. 중간에 한 권 빠지기는 했지만 여나므 권이나 되는 전집을 일 달러에 샀으니 그날은 재수좋은 날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문명이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한 서양 사람들은 모든 것을 쉽게 버리고 잘 바꾸는 걸로 생각될 지 모르나 반대로 한 개의 물건을 만들면 활용할 만큼 활용한다고 봐야 되겠다.

    거라지 세일에 나와 있는 물건들을 보면 정말 쓰레기 같은 별별 것들이 다 있다. 다리가 부러진 책상에서부터 유리 없는 액자. 유행 지난 옷가지,헌 잠옷이 있는가 하면 닳고닳은 팬티와 브라도 있다. 알맹이 없는 립스틱 뚜껑, 밑창 없는 운동화, 헌 칫솔, 이 빠진 빗, 심지어는 알맹이가 하나 붙은 일회용 성냥도 있다.

    언젠가 함께 간 딸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엄마. 이것 좀 봐. 하하 우숩다. 이런 것도 돈 받고 팔아?”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냐.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도 새 것이었을 때는 어엿한 상품이었겠지. 첨 사 간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건도 팔자’란게 있나봐. 주인 잘 만났으면 이렇게 빨리 쓰레기로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지는 않았겠지. 두 번째,세 번째 주인을 만나 다시 팔자 고칠 수도 있어.”
    엄마 같은 주인?” 우리 모녀는 함께 웃는다.

    잔디밭에 딩구는 조그만 종을 집었다. 종 한쪽이 금이 간 미국 '자유의종'이다. 이렇게 해서 모으고, 여행지에서 사고, 선물받고, 해서 모아진 가지가지 종들이 백여 개가 넘어 우리 집 거실 유리 장식장 속에 진열되어 있다.
   나는 이 종을 들고 집에 있는 종들이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상상을 해본다. 가만히 종을 흔들어본다.  짤랑.짤랑. 짤랑…
    
    '그대의 쓰레기는 나의 보물'이라고 다시한번 중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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