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용칠이

2007.04.18 11:19

정해정 조회 수:743 추천:54

최태응작 <바보 용칠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은것은 지금으로 부터 50년도 다된 여고시절이었다.

소설내용은, 용칠이는 마을에서 바보라고 낙인찍힌 우직하고 정직한 머슴이다. 어느날 부턴가 마을에서는 용칠의 처 필녀의 불륜현장을 봤다는 소문이 퍼진다. 용칠이 마저 그 현장을 목격하고 필녀를 처가에 데려다 주는것으로 인연을 끊으려고 필녀를 앞세우고 처가에 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가 식구들은 몇마리 안된 종닭 가운데서 가장 실한놈으로 잡는가하면, 한 칸 뿐인 방이지만 따끈한 아랫목에 비록 무명 포대기 일망정 제일 성한것으로 펴주고, 자기네들은 깔지도 못하고 웃목에서 자는둥 알뜰살뜰 정성껏 보살핀다.

용칠이는 며칠을 그렁저렁 보내다가 예정과는 달리 필녀를 놓고오지 못하고, 바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늘은 가자우~” 하며 데리고 나선다.
오히려 필녀의 죄를 나누어 가지고 밤중에 정든 고향 마을을 떠난다.

이소설을 읽고부터 ‘용칠이는 과연 바보일까’ 하는생각이 오늘날까지 문득문득 떠 오르곤한다. 용칠이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자기가 한 발 양보하고, 참음으로서 가정이 유지되고 더 큰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 최태응 선생님이 쓴 몇편의 소설을 더 읽었는데 그의 주인공 들은 하나같이 순하고, 선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의 인정미를 물씬 풍기는 독특한 특색이 있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 사회라는 커다란 구둣발에 밟히면서도, 들에핀 풀꽃처럼 아름답고 연하게 피어나는 선량함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숨쉬고 있다.

강산이 몇번씩이나 변하고, 내 삶도 몇번씩이나 변해 태평양 넘어 이땅까지와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훨씬 많아졌다.
최태응 선생님을 한번도 뵌적도 없지만 가끔 선생님의 소설 주인공들을  생각하면 맑은 물이 투명한 유리관을 통과하는것을 보는것 같이 마음이 개운해진다.

50대에 이민을 와서 늦깎기로 글 공부를 시작했다.
몇년전에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한적이 있었다. 운이 좋았던지 내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분이, 한번만 이라도 뵙고 싶었던 분. 바로 최태응 선생님이 아니신가.

나는 감격했다. 신문사에 전화번호를 물어 감사전화를 드렸다. 샌호제에 계시는 팔순의 선생님은 병색이 완연한 쇠잔한 목소리였다.

그후 버클리 대학에 교환교수로 계신 권영민 교수의 주선아래 1939년도 부터 세상빛을 본 백여편의 작품을 수집해<최태응 문학전집>을 세권으로 묶어 출간했다. 권영민 교수가 아니였더라면 이 아까운 작품들은 뿔뿔이 흩어져 영원히 사장 되었을지도 모른다.

책이 출판된 봄이었다. 출판기념회에 초대를 받고, 글공부를 함께하는 친구 희선과 함께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LA를 나섰다. 새벽을, 파란 하늘을, 황금빛 밀밭을 가르며 자동차로 8시간을 달렸다.

샌호제는 고향에서 부는 꽃샘바람 처럼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행사장인 조그만 호텔마당에서 지팡이를 집고 나를 향해서 걸어오시는 분. 바람에 날릴것같은 가냘프고 호리호리 한 몸매에 카키색 바바리코트를 입으셨다. 퀭한 눈에 웃을때 온얼굴이 주름살로 구겨지신다. 손을 덥석잡는 순간, 백발의 조그만 얼굴에서 욕심없는 미소년의 얼굴이 겹친다.

80 여년의 세월과, 아직도 맑디맑게 흐르는 물과. 대나무같이 곧은 푸른 줄기를 동시에 보았다. 돌아오는 자동차 속에서 우리는 <만남>이라는것을 내내 생각했다.

며칠후 새벽에 선생님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태응 문학전집으로 올해 <미주문학상>을 타시러 LA에 오신다는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선생님을 기다린다. 오시면 우리집에서도 하룻 밤쯤은 주무시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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