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렁그렁 눈망울

2007.04.26 11:47

정해정 조회 수:629 추천:33

  소는 우리 인간과 너무나 가깝고 친한 짐승이다. 십이지의 두 번째로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고, 재산의 일부이기도 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소에 대한 생생하고도 슬픈 기억이 하나 있다.

  유년시절 내가 자란 작은 섬에서의 일이었다. 섬의 서쪽 귀퉁이에 섬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똥메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밭이 없고, 언덕과 모래펄이 이어지는 곳으로 섬 사람들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산딸기가 아무리 많다 해도, 산나리 꽃이 휘드러지게 피었다 해도 어쩐지 썰렁한 느낌이 들어 모두가 외면해 왔던 으시시한 곳이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나 되었을까. 우리 둘째언니가 목포 여학교 강당에서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신식결혼식을 하고, 떡벌어진 잔치를 하고, 섬 사람들에게도 잔치를 벌이려고 소를 잡는 날이었다. 가난하고 조그마한 섬이라 우리 집에서 소를 잡는 날이면 온 섬이 며칠씩 포식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섬 사람들은 남녀 노소 모두 들떠 있었다. 해거름 때였다.
  동네 아저씨들이 우리 소 누렁이의 코뚜레를 붙잡고 똥메로 끌고 간다. 누렁이는 어찌 눈치를 챘는지 안 가려고 죽을힘을 다해 다리를 버티고 안간힘을 쓴다. 뒤 돌아보며 울고 있다.
  "음메…음메…음…음메"
  그 슬픈 울음소리는 섬을 울려 징소리처럼 메아리쳐 내 가슴에 아픔으로 꽂힌다.

  어린 나는 무섭기도 했지만 누렁이가 불쌍해서 가슴을 졸이며 굴뚝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누렁이 눈과 내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 짜릿해서 몸서리를 쳤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커다란 눈망울… 누렁이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을까.

  해거름 섬에서 울렸던 낮고 굵은, 그리고 맑은 소울음 소리와,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내게는 슬픈 기억으로. 아픈 상처로 남아 있었던지 나는 어른이 되어서까지 소고기를 먹지 않았었다.
  또 하나. 사춘기 시절에 우연히 황순원의 단편소설 <송아지>를 읽고 그때를 생각하고 가슴 아파하고, 또 울고는 했었다.

‘소’ 라는 짐승은 미련스럽도록 우직하게 일만한다. 코뚜레까지 끼고 묵묵히 끌려다닌다. 살아서는 젖과 노동을, 죽어서는 살과 뼈는 물론이고, 꼬리 쓸개 털까지 고스란히 사람에게 바친다. <희생> 그 자체라고 봐야 되겠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서 기르는 소를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 생각했다.
한집에 사는 하인의 신분으로 쳐주어 정월 첫 축일에는 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쇠죽에 콩을 많이 넣는 특별식을 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민담으로 내려오는 소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황희'가 젊은 시절에 길을 가다 어떤 농부가 소 두마리로 밭을 갈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느냐”고 물었다. 농부는 바싹 귀엣말로 가만히 말했다.
  “오른쪽 소가 더 잘 간다”
  “어째서 귀엣말을?”
  “비록 짐승일지라도 사람의 마음과 다를바 없으니 왼쪽놈이 듣는다면 기분 나쁠까봐…..”선량한 농부의 마음씨가 훈훈하다.

  소는 풍요의 상징이라는 것은 동서양이 같은가 보다. 소를 세계의 창조자이며 인간을 양육한다고 믿는 인도에서는 소를 사람보다 더욱 존중한다. 불교에서 소는 인간이 찾아야 할 참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우리 한국인에게 소는 여유와 평화로움의 상징이며, 근면과 희생의 삶을 나타낸다고 한다.

  나는 이웃에게 소보다 몇 십분의 일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삶을 살 수는 없는지, 나를 한번 다시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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