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자

2007.04.18 11:24

정해정 조회 수:546 추천:34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시댁에 행사도 있었고,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인 ‘옥봉’ 안석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겸사겸사 해서였다.

  비행기의 창 밖에는 햇솜을 깔아놓은 듯 하얗고 포근한 구름이 쫘악 깔려있고. 그 아래는 파란색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있다. 마치 물구나무 서서 하늘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 중에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거슬러 내려간다. 마음은 부자>라는 생각이 비행기 동그란 창문에 아른거린다.
  내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 주신 잊을 수 없는 선생님 한 분이 계시다.
    <옥봉 안석두> 선생님이시다.
    
    내 고향은 한반도 남쪽 작은 항구도시 ‘목포’다. 전쟁 직후 혼란했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4학년까지는 남녀공학을 하다가 5학년이 되면서 남자반, 여자반으로 갈렸는데 한 반만 남녀를 섞어 만들어본 시범반이 우리 반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호리호리한 키에 약간 분홍색 피부를 가진 의욕이 넘친 20대 청년이었다. 그 당시는 국가고사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 선생님은 당돌하게도 입학시험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전인교육>을 시도했다.

    세상을 아름답고 너그럽게 보는 법.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슬기. 즉 마음이 부자로 살아가는 씨를 우리들 마음 깊숙이 심어주신 분이다. 우리는 자유로웠다. 시험을 위주로 공부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중학교 국가고사 입학시험 뚜겅을 열고 보니 전라남북도를 통털어 차점이 넘볼 수 없는 높은 점수가 우리 반에서 나왔다. 상위권 성적이 우수수 쏟아져 전교를 휩쓸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졸업시키면서 바로 장학사로 나가셨다. 그 후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춘기에 들어서고, 시험지옥을 헤매면서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잃어버린 채 젊은날을 바쁘게 보냈다.

    간간히 들리는 소문에는 교육계가 썩을 대로 썩은 속에서 옥봉 선생님이 청빈한 장학사로 표창을 받으셨다 했다. 그리고 다시 교장으로 나가셨다고도 했다.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아이들이 다 자라고 한숨 돌리게 되자 동창의 누군가가 모임을 주선했다. 우선 서울에 사는 친구만 수소문해서 모여보니 남녀 여나뭇. 모두 한 마음이었던지 하나같이 한숨에 달려왔노라 했다.

    어느새 머리가 히끗히끗한 중년이 된 친구들은 건축계에서, 법조계에서, 대학에서, 경찰계에서 요소요소 중요한 자리에 앉아 당당하게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사업하는 친구들도,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공학도로 일찍 캐나다에 간 친구는 중견 시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세월의 옷, 지위의 옷, 위선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초등학교 때로 되돌이갔다. 그리고 우리들을 이렇게 길러주신 옥봉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우리는 곧 모임의 이름을 선생님의 호를 따서 <옥봉회>라고 하기로 했다.
    내가 이민 떠나기 직전이었다. 인사 차 광주 서석국민학교 교장실을 찾아갔다. 창밖을 보시며 안절부절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선생님의 주름진 얼굴.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메마른 손이 지금 내눈을 적셔 비행기 창밖에 깔려있는 구름마저 가려버리고 만다.
     옥봉회는 내가 머나 먼 나라에서 사는 동안 피붙이 보다도 더 가까운 모임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캐나다의 친구가 고향에 갈 때 LA에 들려서 가기도 하고, 한국의 친구가 미국 동부 쪽에 볼 일이 있어도 LA를 거쳐서 간다.

    옥봉회는 날짜를 정해놓은 모임은 아니지만 선생님을 모시고 회원들 경조사.멀리 있는 친구가 다니러 왔을 때. 한해를 보내면서. 각자가 제일 우선으로 하는 모임이 되었다는 가슴 훈훈한 소식이다.
    오십평생 내가 가진 재산을 굳이 대라면 나는 서슴없이 <옥봉회>를 댈 것이다. 마음의 부자를 함께 배운 친구들이니까…

    고향에 가서 장례식은 못 참석할지라도 선생님 묘소에서 실컷 울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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