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2007.04.26 11:49

정해정 조회 수:831 추천:41

  지난 일요일이었다.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막 돌아서려는데 함께 글을 쓰는 후배 요안나가 가을바다를 보러가지 않겠느냐 한다.
  가을바다... 말만들어도 하얀 파도가 확 덮쳐는 것 같다. 시간이 약간 늦은감이 있었지만 황혼의 바다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우리는 서둘러 산타 모니카 쪽으로 차를 몰았다. 말리부를 지나 주마 비치에 차를 세웠다. 기왕 온김에 모래도 밟고, 바닷물에 발을 담궈 보자며 차에서 내렸다.

  비치에는 활활 타던 여름이 비껴가고 더구나 오후가 되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드문드문했고 발목에 감기는 파도의 촉감은 썰렁했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젖혔다. 넓은 하늘이 연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것이 갈매기떼인가? 나는 눈을 가다듬고 찬찬히 봤다.
“어머! 기러기야. 요안나야. 저것 좀 봐. 기러기야.”
  허리를 굽히고 물살을 만지고 있는 요안나에게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가을하늘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살아 왔던가. 주황색 물감이 번져나는 해거름 하늘에 < 모양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모습을 보니 가슴에 한기가 도는 듯하더니 아버지 얼굴이 겹친다.

내가 자랄 때 아버지는 기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를, 재미있게 자주 들려주셨다. 기러기는 하늘과 땅을 왔다갔다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 했다. 기러기는 어찌나 부부 금술이 좋은지 혼례식 때 원앙처럼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을 올려놓았다고도 했다. 기러기는 어느 한쪽이 죽으면 근심걱정에 먹지도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는, 사람보다 낳은 새라고도 했다.
“저 하늘에 기러기 좀 봐라. 식구가 이사를 가면서도 차례대로 사이좋게 잘도 가질 않냐. 위아래, 앞뒤를 모르는 것들은 양반이 아니다. 기러기만도 못한 것들이지…”
나는 장난기 섞어 말했다.
“젤로 앞에 가는 놈이 엄마야? 젤로 뒤에 가는 놈이 아부지야?”
“뒤에서 두 번째 놈, 젤로 쬐끄만 놈이 막둥인 것 같다.”하시고, 아버지는 웃으시며 내뺨을 토닥거려 주셨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대나무가 한 쪽에 있고,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그림이 있는 색바랜 병풍을 아끼셨다.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것도 같다.

  아버지가 해준 얘기 중 또 하나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옛날에 어느 슬기로운 임금님이 신하에게 목각 기러기 한 쌍을 상으로 내렸다. 임금님의 뜻은 위아래. 앞뒤 절도를 잘 지키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덧붙여 그 세상은 참으로 평화롭고 화목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기러기는 봄과 여름에는 북쪽 나라에서, 가을과 겨울에는 남쪽 나라에서 사는 새로 자신의 분수와 질서를 아는 새이며 고상한 새라고 했다.

  고향과 머나먼 땅에서 우리 동포들이 만나서 사는 것은 특별한 숙명적 만남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는지. 서로 부대끼며 사는 한 핏줄끼리 마음속으로라도 기러기 한 쌍씩 선물로 나누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사랑하며, 위로하며 이 가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미국땅 한 모서리 망망대해 태평양을 바라보며, 가을 석양 속에서, 가을 바다에 발을 담그고 기러기와 아버지 생각에 취하니 가슴이 발목만큼 시려온다. 어느새 기러기는 오간 데 없고, 해마저 수평선 너머로 숨어버렸다,

  어둠은 노을로 붉어져 있던 우리의 얼굴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내려앉는다. 돌아오는 자동차 속에서 황혼 속으로 줄지어 날아가던 기러기의 그림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가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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