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중년
2008.08.28 08:11
 얼마 전에 서류를 제출할 일이 있어서 이것저것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진 2장'이라는 대목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미국에 와서 한 번도 찍은 일이 없는 명함판 사진.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꺼내어서 이리저리 뒤지며 적당한 것을 찾아보았다. 가능한 나이가 들어 보이고 좀 덜 예쁘게 나온 사진을 고르고 또 골라서 두 장을 준비하였다. 너무 오래된 사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한 최근에 찍은 듯이 보일 수 있다면. '이정도면 지금의 나와 비슷하겠지?'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서류를 내 밀었는데, 서류를 체크하시는 분이 사진을 보더니 잠시도 망설임도, 서성거림도 없이 대뜸"이 사진 언제 거예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내 기분은 허공에서 낙하산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이문열님의 책 중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의 나는 날개도 없이 그냥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진을 고를 때는 지금의 나와 거의 같아 보이는 사진으로 고른 것인데 어찌 그분은 그렇게도 쉽게 '언제 것이냐'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을까? 집에 와서 거울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순간 어떤 허전함과 서러움과 우울함이 나를 덮쳐왔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난 아직도 내가 젊어 보이는 줄로만 알고 지나왔으니. 결국 나도 부인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중년'이라는 이름 앞에 망연자실이 서있다 어렸을 때 읽은 글 중에서 어떤 사람이 '늙음'을 막으려고 칼과 창을 들고 길목에서 기다렸는데 '늙음'은 샛길로 가로질러 몰래 와서 있었더라는 것이 생각이 난다 옹글옹글 영근 꿈을 가슴에 매어달고 다니던 소녀시절과 무엇이든 해 낼 듯이 야망을 주렁주렁 걸고 당당했던 처녀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잠깐, 그저 한 여름 밤에 잠깐의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은데 벌써 내 나이도 이제 '중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무엇이든지 할 것을....' 하는 말을 웃으면서 들었던 내가 이제는 바로 그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나를 서글프게 하고 우울하게 한다. 가을이다. 나를 닮은 계절, 이 가을에 어떤 서러움과 아쉬움과 허전함에 싸여서 서쪽으로 기운 해를 바라본다. 온갖 것들이 물이 올라 싱싱하고, 오색찬란한 꽃들로 온 산을 덮던 그 아름답고 화려한 봄도 지나고 푸르른 싱그러움과 활기찬 여름마저 꼬리를 감추더니 아침저녁 쌀쌀함을 느끼는 가을이 왔다 낙엽이 뒹굴어 바람에 흩날릴 때는 어찌 그리 스산함은 나의 모습과도 같은지. 그러나 중년이 다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젊었을 때의 패기는 없어졌다 하더라도 중년의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나에게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면. 젊었을 때처럼 용기는 없어도 용서의 마음이 내게 있고, 불꽃처럼 반짝이는 재치와 지혜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은은하고 온화한 덕스러움이 조금 더 나타난 것 같다. 가을, 역시 생동감이 넘치고 활력 있는 싱그러움과 생명력의 느낌이 떨어진다 하지만 결실의 풍성함과 그 풍요로움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좋다. 오늘은 커피한잔 나누며 중년을 이야기할 그러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 초라하게 기우는 햇살이 아니라 풍성한 아름다움을 전하는 황홀한 노을빛으로 남고 싶은 사람들, 젊었을 때보다 더 넓어진 마음과 여유로움을 가진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과 커피한잔 하고 싶은 날이다 9/30/2006  ♬배경음악:아 가을인가 / 합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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