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얼’추억

2008.09.12 10:38

이영숙 조회 수:409 추천:108



"엄마, 잘 먹었습니다"
늘 음식을 먹고 나면 인사를 잊지 않는 딸이다.
작은 것을 먹을 때도,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무엇이든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먹을 때는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다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를 결코 빠트린 적이 없는 아이다.
아침에 따뜻한 밥에 국과 반찬으로 온 몸이 훈훈해지도록 먹고 일어서는 딸의 소리에
"잘 먹어줘서 내가 더 고맙구나.  어떤 아이들은 엄마가 아침밥을 지어줘도 먹지 않고 그냥 간다는데, 이렇게 잘 먹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라고 대답을 했다.
다른 집 자녀들은 하도 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기 때문에 다 큰 딸이나 아들을 따라다니며 출근, 또는 등교 준비하고 있는 중에 한 숟갈씩 떠서 먹이는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녀들은 도리어 “내가 무슨 어린 아이냐”고 짜증을 내며 뿌리친단다.  그러면 너무 화가 나서'다 큰 저 들을 위하여 하는 나의 마음도 모르는 괘심한 것들... 내가 다시 이런 짓 하나 봐라'하고 다짐(?)해 놓고도 다음날 아침에 똑같은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심해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렇다.
우리는 아침을 잘 먹는 집안이다.
하루 중에 아침을 가장 잘 차려 먹으니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특식을 준비하려고 할 때는 아침으로 준비하고, 뭔가 색다른 음식을 먹고 싶을 때도 아침시간이다.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 먹고 학교에 가는 딸이 참 고맙다.

미국에 온지 일 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부터 아침을 거르지 않고 꼭꼭 먹던 우리는 미국에서도 계속하여 먹다가, 문득 우리도 이제 미국에 왔으니 미국식으로 식생활을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제 3학년인 어린 딸에게
"예, 우리도 이제 미국식으로 아침 먹자.  가끔 빵과 우유, 그리고 시리얼로 아침을 먹으면 어떻겠니?"라고 묻자 늘 착하기만 한 딸은
"그러세요, 난 괜찮아요"라고 대답하였다.
솔직히 귀찮은 것도 너무나 많다.
아침부터 밥을 하려면 알다시피 한식은 참 준비하는 시간도 번거롭고, 먹는 시간 또한 많이 걸리는 것이니, 늘 남들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설쳐대야 한다.
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시리얼로 준비하였다.
그런데 그때가 하필 겨울이고 그날따라 퍽이나 추운 날이었다.
아침에 찬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서 먹는 어린 딸은, 먹는 동안 내내 옷을 추스르고, 몸을 감싸며 벌벌 떨며 시리얼을 아무 말도 없이 한 그릇을 먹고는 으스스 몸을 떨며 학교엘 갔다.
그날 하루 종일 내 마음이 편안할리 없었다.
학교에서 추워서 떨지는 않을까?
이 추운 날씨에 아침부터 그렇게 찬 것을 먹고 갔으니 얼마나 추울까.
일을 하여도, 공부를 하여도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딸 걱정뿐이었다.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딸을 꼭 안아주며
"오늘 많이 추웠지?  얼마나 떨었니."라고 정말 가슴 아리게 내 품에 안았다.
딸은 아무렇지 않게
"괜찮았어요, 엄마"라고 말 하였지만, 자그마치 7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기억이다.
그 이후부터 다시는 아침에 시리얼을 먹지 않았다.
결심 했다.
아침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춥든 덥든 간에 아침에는 밥을 먹을 것이다.
딸에게 꼭 밥을 먹여 학교로 가게 할 것이다.
'시리얼'하면 그때의 기억이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가슴 쓰리게 한다.

오늘 아침 따뜻한 밥과 따뜻한 국을 먹고 편안히 학교에 등교하는 딸이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정말 내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어도 아침마다 잘 먹고 언제나처럼“잘 먹었습니다”를 말하며 등교하는 딸이 너무나 고맙고 대견하였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밥을 먹고 나서 딸이"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잘 먹어줘서 너무 고맙다"라고 해야겠다.

3/26/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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