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백 다이어트
2009.01.20 03:42
“핸드백 다이어트”
내 핸드백은 언제나 비만이다. 항상 배가 불러있어 늘 조금 다이어트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도 막상 핸드백을 열고 체중을 어떻게 줄일까 살펴보면 줄일 만한 것이 없다.
내 가방에 수첩이 있다. 메모하는 습관이 부족하여 늘 나쁜 머리로 암기하고 다니는 나에게 남편은 메모를 습관화 하라고 닦달하였다. 옳은 말이니 순종하려 수첩을 가지고 다니기는 하나 일과를 자주 적지도 않고 어쩌다 적어두어도 확인하는 것도 자꾸 잊어 한 달에 한 번도 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습관을 들이려 늘 간직하고 다녀야 한다. 두툼하니 가방만큼이나 배가 부룩 나와 있는 작은 지갑에는 일 년에 한 번도 전화하지 않는 명함들이 가득하여 수북하니 올라온 모습은 금방 터져버릴 것 같다. 당장이라도 줄여주어야 할 것 같은데 늘 마음뿐이지 막상 열어보면 이것은 이래서 필요하고 저것은 저래서 버릴 수 없는, 혹 언제쯤 필요할지 모르기에 그래도 남겨두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그 속엔 썬 글라스도 크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핸드백에서 빼 내어 차 안에 둘까하고 여러 번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핸드백 안에 있어야 내가 쓰기가 편안할 것 같아서 늘 그냥 두었다.
보통 여자들처럼 나도 립스틱이나 콤팩트 분등 간단한 화장품을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과 달리 낮에 화장을 고치는 것이 전혀 습관이 되어있지 않는 나. 아침에 화장을 하고 나면 저녁에 세수를 할 때까지 거의 화장을 고치는 일이 없으니 가방에는 넣어 두었으나 쓸 일은 없이 지내왔다. 그런가 하면 향수까지 가지고 다니니. 향수를 잘 뿌리지도 않으면서. 그 향수가 다 쏟아져 내 몸이 아니라 가방에 가득히 향기를 뿌리고 다닐 만큼 내가 그 향수에게 무심했었는데. 거기에 티슈도 한 자리 가득히 차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랴, 합창단의 연습에 참석하랴 목을 쓸 일이 많은 나는 한국에서 남편이 가지고 온 용각산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며 목이 칼칼할 때 먹는다. 그 또한 잊어버리고 안 먹을 때가 많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가방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거기에 더하여 입 냄새 제거하는 작은 스프레이와 껌을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쓰이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차를 해야 할 때를 위해 동전을 항상 준비해서 다녀야 하니 동전 지갑의 부피와 무게도 만만치 않다. 가끔씩 필요한 메모지와 볼펜들도 내 가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어질 때까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나 조금이라도 생기는 여유시간을 활용하여 책을 읽으려 넣고 다니기는 하지만 집에 들어와서 보면 책을 읽었던 적보다 전시효과만 누렸던 적이 더 많았다.
이러저러한 이유와 사연으로 인해 나의 가방은 언제나 비만으로 배가 가득히 불러있다. 가끔은 조금 날씬하게 만들고 싶어서 전부 열어 헤쳐 놓고 어떻게 다이어트 할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다시 하나씩 하나씩 집어 보아도 어쩌다 나오는 종잇조각 외에는 가방에서 내쳐져야 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을 가득히 넣어 가지고 다닌다. 때로는 배가 불룩 나온 가방이 남 보기에 부끄러워 슬며시 등 뒤로 돌리면서라도 그 속의 물건들은 꺼내지를 못하고 그냥 두었다.
며칠 전 엄청난 일이 나에게 있었다. 아침 일찍 그리피스팍에 운동을 하러 가서 차에다 가방을 두고 기분 좋게 등산하고 돌아와 보니 내 가방이 보이지를 않았다. 운전석 옆자리 의자 밑에 두었었다. 깜짝 놀라 혹시 뒷자리에 있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내가 보기를 원하는 핸드백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의 뒤 유리창이 깨져서 뻥 뚫려 있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뒷자리에 짙은 갈색의 깨진 유리조각들이 동글동글한 눈동자처럼 가득히 앉아서 나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알듯 한대도 나에게 단 한마디의 언질도 주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차 뒷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소근 거리며 있었다. 누가, 언제, 무엇으로 그 유리창을 깨었는지에 대해 나에게는 함구하면서.
놀란 내 가슴은 콩닥 콩닥, 두근반 서근반 뛰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카드회사에 전화해 모든 카드의 분실신고와 은행에 체크 정지 요청과 차량등록국에 가서 면허증 분실신고를 했다. 그 후에 차 유리를 넣으러 갔다. 하루 온 종일을 그 뒤처리 때문에 보내고 나니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힘들어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 다음날 외출을 하려고 나가는데 뭔가 텅 빈 느낌이었다. 이대로 어디에도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허전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내 손에 있어야 할 그 많은 것들이 없어졌다. 운전면허를 임시로 받아서 차 안에 두었고, 카드도 없고 체크북도 없고 핸드백도 없다. 그 많던 명함들과 선글라스며 고이고이 두었던 나의 소중한 물건들이 다 사라졌다. ‘나에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허전하게 보낸 며칠이었다.
일주일쯤 지나서인가 외출하려 나가는 내 마음이 갑자기 아주 시원해져왔다. 더운 한 여름에 느닷없이 불어오는 북풍처럼 시원함을 느꼈다.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이렇게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을 왜서일까.
아! 그 가벼운 마음은 바로 텅 빈 나의 손 때문이었다. 내 손에 들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가벼움. 이럴 때 널을 뛴다면 아마 높이 오르겠지?
그 동안 그렇게도 가득히 가지고 다니면서 난 그 많은 것들로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소중하거나 꼭 가져야 할 것들은 아니었는데. 쓰지도 않으며 형식적으로 가지고 다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몇날 며칠, 아니 한 두 달이 지나도 찾지 않을 것들을 가득히 가방에 넣고 배를 불리어 다니면서 불편함을 참아내는 그 필요 없는 인내를 나는 왜 그동안 감수하며 지내왔어야 했을까.
가득히 들고 나갈 때 느껴보지 못하였던 편안한 행복감이다. 오른쪽 주머니에 전화를, 왼쪽 주머니에 지폐 한 장 넣고, 하얗게 빈손을 하고. 아~ 이 자유로움, 이 편안함.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특히 자신이 너무나 아끼고 정성을 다하던 난초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얽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 난초 화분에 늘 신경 써 줘야하고, 때로는 외출을 하다가 밖에 두고 그냥 나온 것 때문에 다시 돌아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단다. 그러다 어느 친구에게 그 난초를 주고 난 후,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라는 글이 지금 이렇게도 마음에 와 닿는다. 잃어버린 아쉬움보다 편안한 마음이 더 많으니.
이 주쯤 지나서 핸드백을 하나 샀다. 이제는 텅 빈 가방을 가지고 다니리라. 나도 법정스님처럼 ‘무소유!’를 외쳤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현대인이 크레디트 카드가 한 장쯤은 있어야지. 카드와 면허증을 넣은 지갑도 필요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선글라스 없이 운전할 수 없겠지? 선글라스도 다시 장만해 넣었다. 며칠 후엔, 아무래도 메모지가 있어야겠기에 메모지와 펜도 가방에 넣었다. 다시 들어가는 화장품. 용각산, 껌, 화장지, 향수, 등등…….
‘무소유’로 사는 것도 능력인가? 나 같은 범인(凡人)이 ‘무소유’는 그만두고라도 다이어트나 잘 하려 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뿐, 스스로 단행하지 못한 다이어트. 남에 의해서라도 성공하나 했더니 결국은 또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이나 핸드백이나 다이어트가 참 힘들긴 힘든 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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