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둔한 왼손으로

2009.04.03 07:04

이영숙 조회 수:809 추천:216

우둔한 왼손으로   나는 오른손잡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로 오른손이 한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더 지혜롭다고 늘 생각한다.  왼손으로는 열쇠를 잡고 문을 여는 것도 힘들다.  지혜롭지 못해(둔해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다.  오른손은 금방 처리 할 일인데.  물건을 집어 올릴 때도 언제나 오른손이 앞서고, 가스레인지 불을 킬 때도 혹시나 하고 왼손이 나서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비웃음을 가득히 머금은 오른손은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고, 그를 본 왼손은 민망하다.  하다못해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끄는 일도 오른손이 하면 쉽고 빠르고 왼손이 하면 편하지 않다.     나 어릴 때만해도 우리 집에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그러니 성냥은 집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어릴 때 그 성냥을 켜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에 힘을 잔뜩 모아서 순식간에 그어야 불이 켜진다.  지금도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일 때는 성냥을 켜야 하는데 오른손은 금방 처리할 일을 나의 왼손은 도저히 붙이지 못한다.  힘 있게, 순식간에 처리해야 하는 일을 왼손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요하고 티가 날 자리도 항상 오른손의 차지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두 끼만 굶으면 온 몸에 힘이 쫙 빠지고 심할 때는 부들부들 떨리기도 한다.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없는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도 왼손은 언제나 쉬고 있고, 오른손이 열심히 밥을 퍼서 입으로 가져간다.  내 생명이 먹는 것에 달려있는데 그 중요한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오른손이다.  어쩌다 오른손이 다치기라도 해서 왼손으로 밥을 먹으려면 지혜롭지 못한(우둔한) 왼손은 자꾸 흘리고 입으로 잘 들여보내지 못해서 나를 힘들게 만든다.     글을 쓰는 시간이 가끔 나에게 주어지는데, 그 때도 당연히 오른손의 수고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제는 컴퓨터라는 기계가 있어 왼손도 오른손처럼 열심히 쓰는 일은 돕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십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왼손은 종이나 잡아주고 영특한 오른손이 열심히 쓰는 것을 부러운 듯이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사실을 생색내지 않는다.  아니, 내가 오른손을 위해 잡아줘야지 라는 의식도 아예 없다.  그저 종이를 펴고 오른손이 펜을 들면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잡아 오른손이 글을 쓰는데 문제가 없도록 해준다.  그것이 당연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듯이.   피아노를 칠 때도 멜로디는 주로 오른손이 치고 왼손은 화음을 넣는 정도이다.  물론 바하 곡들에는 왼손을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바하 인벤션과, 신포니아는 오른손이 친 만큼의 멜로디를 왼손에게도 치게 작곡을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 곡들은 힘이 없는 약한 왼손의 좋은 연습곡으로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필히 거치는 과정이다.  그러나 많은 곡들은 주로 빠르고 힘찬 오른손에게 화려한 멜로디를 제공하고 있다.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첼로의 경우는 어떤가.  왼손은 음 자리나 잡아주면 오른손은 우아하게 활로 그 현을 긁으며 멋 떨어진 소리를 만들어낸다.  모든 영광은 오른손이 다 차지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가끔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곁에 서서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면 참 재미있다.  그 역시, 오른손이 화폭에 우아한 색을  입히는 동안 왼손은 팔레트를 잡아주어 오른손이 편안히 색을 칠할 수 있게 도와준다.  왼손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팔레트 아래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때도 언제나 오른손이 나서서 만난다.  만약 왼손으로 악수를 청하거나, 청하는 악수를 하겠다고 내밀면 엄청난 실례를 저지른 것이 되고 만다.   오른손의 그늘에서 따뜻한 빛 한번 보는 것이 힘든 왼손.     이렇게 늘 왼손은 오른손을 도와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힘도 오른손이 더 세고, 빠르기도 오른손이 왼손보다 훨씬 빠르다.  잽싸게 처리해야 할 일들은 언제나 오른손이 감당한다.        오늘, 마켓을 봐서 잔득 물건을 들고 왔다.  봉지가 많아 양손에 나누어서 들었다.  들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이러고 어떻게 문을 열지?  오른손에 물건을 들고 열쇠로 문을 여는 것이 어려웠다.  할 수없이 왼손에 그 모든 물건들을 들리고 오른손에 열쇠 하나만 달랑 들었다.  문을 열기에 오른손이 빠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오른손에 물건을 들고 있으면 문을 열기 어렵다는 핑계로 인해.  무거워 땀을 뻘뻘 흘리는 왼손은 열쇠 하나만 달랑 들고도 의기양양한 오른손에게 불평한번 하지 않고 당연한 듯이 묵묵히 감당한다.  팔이 아파오는 것도 잘 참고,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어질 듯 힘이 들어도 그저 기다린다.  오른손이 문을 열고 그 모든 물건들을 놓을 때까지.      나의 삶이 이제까지 오른손과 같은 삶이기를 바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들어나는 일을 좋아하고, 그늘에 숨어서 빛을 보지 못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피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나의 숨은 일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빛을 보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내가 나타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불평하지는 않았을까.  오른손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왼손이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을.  어떤 일이든, 어느 상황이든 나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만 한다면 나로 인해 참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 질수도 있을 텐데.     지혜롭게 반짝이는 오른손보다, 좀 둔한 듯하나 성실히, 약간은 어리석은 모습을 갖고 있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왼손.  힘들고 어려워도, 나타나지 않는 그늘진 곳의 일이라도 즐겁게 하며 오른손을 세워주는 일에 도움이 되는 삶.  그러한 약간은 우둔한 왼손이고 싶다.  내가 도와준다고 생색을 내지 않고,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왼손처럼.  어떠한 일이든, 어디에서든 최선은 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라는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왼손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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