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등을 하다

2009.06.04 00:03

이영숙 조회 수:648 추천:233

이 등을 하다   내가 이 등을 했다.  달리기에서.  이건 나에게 진짜 기적이다.  그때까지 난 3등조차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나는 운동신경이 퍽 둔한 편이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고, 나 자신 또한 그렇게 인정한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면 언제나 나는 맨 꼴찌에서 일 이등을 다투고 있었다.  나에게 바람이 있었다면 나도 운동회 때 남들처럼 상을 한번 타보는 것.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조금 커서 자전거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무릎이 깨졌는지 모른다.  운동신경이 둔해서 그렇게 빨리 배우지도 못하고 많이 넘어져 다쳤다고 내 바로 위의 오빠가 말했다.  그렇겠지.  웃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변명을 하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퍽 약골이었다.  허약하여 집에서 심한 운동이나 힘든 일을 시키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께 ‘아이가 약하니 체육시간에는 빼 달라’고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운동신경이 더 둔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5학년 운동회 때였다.  달리기 부분에 ‘손님 찾기’가 있었다.  일정한 어느 거리까지 뛰어가면 카드가 놓여있다.  그것을 집어 거기 적힌 이름을 본부석에서 소리쳐 불러 그 사람과 함께 골인지점에 이르는 게임이었다.  지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여간 카드를 들고 본부석에 가서 그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신사복을 입은 한 남자분이 급히 뛰어나오시더니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난 그냥 끌려갔다.  내가 뛰는 것이 아니라 끌려갔다는 표현이 맞다.  그 신사 분은 내 손을 놓칠세라 내 손목이 아플 만큼 꼭 잡고 뛰었다.  달릴 때 손목이 얼얼하고 아파 빼고 싶었지만, 결코 내 힘으로 그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정신없이 그냥 따라와서 결승점에 이르러 보니 내가 이 등으로 들어왔다.  나를 결승점에서 점호하는 학생들의 손에 넘겨준 신사는 나에게 밝은 웃음을 남기고 돌아갔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손목이 빨갛게 쓰리고 아픈 것도 잊고,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곧 스러질 듯 힘든데도 행복했다.  너무 좋았다.   내 평생 달리기 최고 기록, 이 등을 해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 전에도, 물론 그 후로도.      삶에서도 나는 잘 뛰지 못한다.  늘 꼴찌에 가까운 거리서만 서성인다.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삶의 신경’까지 둔하다.  열심히 뛴다고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내 앞의 사람들은 많은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몇 안 된다.  그래서 등수 안에 드는 일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  일, 이, 삼 등.  나와는 너무 먼 거리 같아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렇다고 배운 것이 남다르게 많은 것도 아니다.  뛰어난 재능도 없는데.  과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늘 포기하고 사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한 삶이었다.  때때로 무언가 잡으려 팔을 뻗어 보지만 내 손이 닫기에는 뭐든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있었으니까.  유난히 두려움도 많은 나는 어떤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 할 것이 두렵다.  실패한 뒤 따라오는 자존심 상해하는 내 모습도 싫었고.     그러는 나에게 한 손이 다가왔다.  내 손을 꽉 잡고 달리기 시작한 그 손.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내가 헐떡거리며 따라가야 했다.  따라가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꽉 잡은 손도 너무 아팠다.  만약, 그 손이 나를 잡지 않고 내가 그 손을 잡았다면 몇 걸음 못가서 손을 놓치고 말았으리라.  어떤 때는 아파서 손을 빼고 싶기도 했다.  너무 빨리 달려 좀 멈추어서 쉬고 싶기도 했다.  숨이 차서 턱에 걸려 곧 스러질 것 같았으니까.  아픈 손목은 상처가 되었다.  그럼에도 내 손을 놓지 않고 꼭 잡고 달리는 손은 결승점을 향해 계속해서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결승점에 도달하면 나 혼자서는 불가능 할 수밖에 없었던 ‘이 등’이라는 놀라운 등수를 허락할 거다.     그 아팠던 시간들.  숨이 턱에 닿아 도저히 더 이상은 한 발도 못 나갈 것 같았던 그 상황들.  그냥 포기하고 차라리 주저앉고 싶었던 그 순간들.  이렇게 아픔을 줘야만 했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날들.  울며 “차라리 꼴찌 하겠어요.  나 좀 내버려두란 말예요.”라며 앙탈 부리던 모습들.     그러나 놀랍게도 나의 그 모든 불평과 앙탈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손을 아프도록 꽉 잡은 손.  내 숨이 턱에 닿아 곧 넘어갈 듯한 모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는 그 손.   그 손에 의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달려야 할지 모른다.  꽉 잡은 손이 얼마나 더 나를 아프게 할지도 알 수 없다.  내 힘에 부치도록 헐떡거리며 따라가기 힘들어, 그냥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도저히 나 혼자는 불가능한 이 등, 최소한 이 등은 맡아 놓았다.  힘들고 아팠던 그 시간들을 보내고.  나를 잡고 있는 그 손에 의지해서 머지않아 승리의 노래를 부르겠지.     결승점에 이르러 이 등을 확인한 후 그분은 나에게 환한 웃음을 보낼 게다.  나는 젖은 눈으로 감사를 전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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