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다

2009.12.30 07:05

이영숙 조회 수:875 추천:172

  머리를 잘랐다.  아주 짧게.  몇십 년을 단발 형 긴 머리를 고집해 오다 자른 것이다.  많은 스트레스와 삶의 피곤에서 벗어나고파 어떤 변화를 줄까 생각하다 단행한 일이다.  내 머리를 자른 미용사의 말이 웃긴다.  
  “사람들은 왜 스트레스 받으면 머리에다 푸는지 몰라.  머리카락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나도 그랬다.  어디 마땅히 풀어버릴 데도 없고.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시비 걸어 풀 수도 없는 일이니까.  좀 보기가 싫더라도 참아야지.  그래도 머리카락이니까 몇 달 참으면 다시 길어질 것이기에 보기 흉하더라도 참기로 마음을 굳혔다.  
  조금 염려가 되기도 했다.  여자들은 머리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사실이니까.  만약 아주 보기 싫으면 몇 달 동안 외출도 어려워질 수 있을 텐데.  나도 여자이니 여자의 마음 그대로였다.

  머리를 자른 다음날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교회에 갔다.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며 아주 예쁘다고 했다.  탈무드에 보면 허용되는 거짓말이 있다.  미장원을 다녀온 사람이나 새 옷을 사 입고 온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아도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며 그렇게 위로하겠지 하고 받아들였다.  딸에게 솔직한 의견을 물었다.
  “엄마에게 어울려요.  그런데 엄마 스타일이 아니예요.  예쁘긴 하지만 엄마답지 않아요.”
  엄마 스타일이 아니라고?  그 말이 가슴에 부딪혔다.  왜지?  나의 말에 딸은 영어로 대답했다.  한국말로 요약하면 이렇다.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정숙하고 단정한 모습인데, 지금 이 헤어스타일은 조금은 날려(?) 보이는 모습이란다.  그래서 엄마답지 못하다고.

  어렸을 때, 나는 대체로 착하고 곱게 자랐다.  길을 가다 남학생들이 말을 거칠게 하면 기겁을 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거친 말 하는 것을 너무너무 싫어했다.  듣는 것조차 싫었으니까.  거칠고 지저분한 말을 듣고 나면 집에 와서 귀를 씻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중학교 무렵이었지 싶다.  어느 날 문득 다른 아이들처럼 저런 거친 말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늘 고운 말만, 아름답고 정숙한 말만 해야 할까?  누가 꼭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거친 말을 했다.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기억에는 없다.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때 그 자리에 계신 어른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저 애가 저런 줄 정말 몰랐네.  늘 얌전하고 착하기만한 줄 알았는데...쯧쯧쯧... ”  
  나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찔했다.  그래,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난 늘 고운 말을 하고 착하고 바르게만 살아야 하는 아인데.  순간 너무너무 후회했다.  그 후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자기다운 모습’에서 벗어나 보고 싶지 않을까?  신사임당처럼 정숙하게 옷을 입고 다니던 사람이 한번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에 나가고도 싶을 것이다.  긴 생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순수함을 만들어 가던 사람이 갑자기 쇼트커트를 해서 곁에 있는 사람을 놀라게도 하겠지.  옅은 화장이나 맨얼굴로 생활하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립스틱 짙게 바르고 싶지 않을까.  늘 아름다운 미소로 우아하게 자신을 표현하던 사람이 한순간 소리를 버럭 질러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도 아무런 자책 없이 담담한 모습을 가질 수도 있을게다.

  자기답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남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 자기일까.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이 자기일까.  어떤 것이 진짜 자기 모습일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답지 못하다”는 말에 올무가 걸린 듯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게다.  그러고는 자기가 아닌 자기의 모습에 답답해 하기도 하겠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인간인데.  오늘의 내 모습이 다를 수 있고, 내일의 내가 또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발전을 위해서도 ‘답다, 답지 못하다’는 말은 자제해야 되지 않을까.  언제나 ‘...답게’만 산다면 어떻게 변화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발전되는 사회를 생각할 수 있을까.  오늘의 나는 이렇고, 내일의 나는 변해야 한다.  항상 고집하는 ‘...다운 모습’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아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니까.  그런 말로 사람을 옭아매도 안 될 일이다.  사람을 어떤 편견의 틀에 가두어 두지 말아야 한다.  편안히 변하도록 둬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내 딸이 나답지 못하다 해도, ‘나답지 못한’ 머리 스타일로 적어도 육 개월은 가야한다.  육 개월 후에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올지는 아직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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