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어느 실직자의 꿈

2010.04.27 01:42

이영숙 조회 수:960 추천:270

어느 실직자의 꿈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꾸는 꿈이 있다.  세상이 다 변했다.  강산도 몇 번이나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그 많은 변화의 세월 속에서도 나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고 오늘도 기다린다.  도깨비 방망이.  왜 그 옛날 잘도 나타나던 도깨비 방망이가 나에게는 그렇게도 인색했을까.  나도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며 부(副)를 누리고 싶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다.  자기의 꿈을 쓰라고 했을 때, 나는 ‘도깨비 방망이 갖는 것’이라고 썼다가 선생님께 꿀밤을 맞아야 했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니들이 도깨비 방망이를 알아?’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도깨비 방망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 나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곳에서 나타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혼자 있기를 즐겼다.  그 덕에 친구들이 없었지만 친구보다 중요한 도깨비 방망이를 기다리려면 그래야만 했다.  때로는 혼자 있는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싫었다.  아니, 미웠다.  혹시 그때 나타나려던 도깨비 방망이가 곁에 있는 친구 때문에 사라질 것 같아서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그 도깨비 방망이는 지금까지 나에게 오지 않았다.  꿈속에서 조차도 나에게 나타나기 싫어하는 그 방망이.  그럼에도 내 나이 오십 살이 다된 지금까지 변치 않고 일편단심 기다린다.

       *               *           *              *           *

  “아빠, 새 프린터 빨리 사주세요.”
  5년 전에 싼 것을 하나 사서 가지고 있다.  딸은 그 프린터를 쓸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느리고, 소리만 요란하고, 종이는 자꾸 걸리고.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을 뿐더러 어떤 때는 아예 글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프린트가 잘 되지 않아 너무 자주 헤드클린을 해야 하니 귀찮고.... 등.  그 소리를 한지가 벌써 몇 달이다.  내가 사주고 싶지 않아서 사주지 않았을까.  그까짓 프린터 하나에 얼마 한다고 몇 달을 끌어오다니.  구겨져가는 가장의 자존심을 살릴 길이 참 힘들었다.
  남들 다 다니는 직장 다닐 때, 나는 세상에 혼자만 직장 있는 사람처럼 어깨와 목에 잔뜩 힘주고, 목소리는 항상 테너였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실직이라는 것을 당하고 나자 내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왜 내 목이 꺾이고 어깨가 내려앉는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여전히 직장에서 매달 월급을 따박따박 받아오는 아내의 음성이 알토에서 소프라노로 올라가더니 최근 들어서는 하이 소프라노까지 갔다.  
  “아이 참, 피곤한데 이것 먹고 어떻게 힘 차리겠어요.  나나 공부는 애나.  쯧.”
  천정을 뚫는 하이 소프라노에 난 그냥 베이스로 짝 깔린다.
  “알았어, 내일 마켓 다녀올게.”
  지 엄마가 아닌 나에게 컴퓨터 프린트를 사달라는 딸아이가 차라리 기특해서 마켓을 갈 때마다 돈을 아꼈다.  드디어 어제 컴퓨터 프린터를 하나 샀다.  
  요즘은 정말 가격이 많이 내렸다.  이제는 프린트, 팩스, 복사, 스캔까지 다 되는 것도 60달러 정도면 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잉크 값이 만만치 않다.  칼라와 흑백, 두 개를 구입하니 거의 프린터 값과 맞먹었다.  프린터 안에 기본으로 잉크가 있지만 직원의 말이 그것은 아주 조금이기에 금방 없어진다고 해서 따로 한 세트를 샀다.  
  이 정도면 구겨졌던 가장의 자존심이 빳빳하게 풀 먹여 다리미로 다린 듯 쫙~ 펴졌겠지.

  딸과 나는 마음이 들떴다.  가끔씩 어딘가에 팩스 하거나 또는 복사를 해야 할 때는 늘 스테이플스에 갔었는데, 이제는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다.  안내서대로 연결하여 복사도 해보고, 스캔도 하고, 프린트를 해보았다.  모두 선명하게 잘 나왔다.  어디 팩스 보낼 곳도 받은 곳도 없어서 그것까지 확인하지 못함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다 됐다.  연결도 문제없고, 작동도 잘 되고, 우리 집에 딱 맞았다.  모처럼 어깨에 힘도 들어갔다.  
  “아빠 고마워요.”
  딸의 키스를 한 없이 받고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랬더라도, 프린터로 인한 내 어깨에 힘은 어제로 다 소진했으니 아침밥 준비는 해야 한다.  새벽 5시30분에 살짝 일어났다.  딸과 아내는 아직도 꿈나라에 그냥 두고.  뿌듯한 마음으로, 비록 하루였지만 내 어깨에 힘을 넣어준 고마운 새 프린터를 다시 만졌다.  아참, 영수증은 어디다 뒀지?  만약 잘못되면 영수증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잉크가 있는 봉지에 같이 있을 거야.  잉크가 든 봉지는 어디 있지?  넓지도 않은 우리 방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잉크를 어디 뒀지?  이제는 영수증이 문제가 아니라 잉크가 없는 것이 더 기가 막힌다.  한참을 찾았다.  없다.  아차, 어제 설치를 끝낸 후 이런저런 쓰레기와 함께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기억이 났다.  
  깜짝 놀라 쓰레기통으로 달려갔다.  아내가 알면 하이 소프라노가 더 올라갈 거다.  하이 소프라노 이상의 음역도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얼른 찾아와야지.  아직 쓰레기차가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스테이플스 봉지만 찾으면 되니 간단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쓰레기들이 쌓여있었다.  몸을 움츠리며 가져간 꼬챙이로 뒤적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집에 왔다.  집게가 마침 있었다.  집게라야 내 팔 길이만큼도 크지 않은 것이었지만 나의 기대는 퍽 컸다.  그 길이의 네댓 배만큼.  그것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는 확실한 마음으로 가지고 나갔다.  그 믿음은 집게가 아닌 다른 곳을 통해 나에게 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사이 홈리스가 언제 출근(?) 했는지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상황판단이 빠른 나는 얼른 다시 집에 와서 플라스틱 병과 캔이 든 봉지를 가지고 나갔다.  홈리스에게 다가가 당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주었다.  몇 개의 쓰레기통은 족히 뒤져야 얻을 만 한 것을 받은 홈리스는 퍽 기뻐했다.  그러곤 내가 말할 차례다.  사실은 내가 어제 물건 산 영수증과 잉크가 든 봉지를 버려서 그것을 찾고 있다고.  그는 아, 그러냐며 그의 직업의식을 십분 발휘하여 쓰레기통 안으로 펄쩍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며 차례로 봉지를 들어보였다.  이렇게 상황판단도 잘하고 문제해결의 고수인 나를 왜 해고시켰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맞아.  그 사장이 원래가 사람 볼 줄 모르는 인간이야.  내 잘못이 아니라 바보 같은 사장이 문제였어.

  멍청한 사장을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맑은 공기와 풋풋한 풀냄새, 푸르디푸른 물의 냄새도 함께 맡을 수 있었다.  깊고 깊은 산속 연못에 내가 와있었다.  연못 한 가운데는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것이 네 것이냐, 이것이 네 것이냐?”라고 물었다.  드디어 나에게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 그 대신 산신령이 나타난 것이다.  오십년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 번쩍 빛나는 금도끼, 그것이 바로 제 것이옵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다 바로,
  “아니, 사실은,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도끼 두 개를 빠트렸습니다.  그 두 개가 다 제 것이옵니다.”고 얼른 바꾸었다.  오십년의 세월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드디어 내 눈앞에 다가온 이 순간을 놓칠 수가 없었다.  물론 도깨비 방망이보다야 영 못하지만, 그래도 금도끼와 은도끼만 있다면 이렇게 힘든 내 삶이 한결 수월해지리라.  요즘 금값이 장난이 아니던데.  이제 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가지고 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당당하게 큰 소리 치리라.  
  “여보, 빨리 밥해.”
  예의 그 테너 톤으로.
  그때, 다시 큰 소리로 “Is this yours?”라고 영어로 묻는 소리를 들렸다.  아니, 요즘은 산신령도 영어를 하나?  세월 참 좋아졌다.  그래,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답할 것이고, 한국말로 물으면 한국말로 답하리라.  금도끼와 은도끼를 얻을 수 있는 이 상황에서랴.  
  "Yes, they're both mine."하고 당당하게 대답 했다.
  "Oh no, I mean this one. This."
  다시 들리는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게 웬일인가.  내가 선 곳이 깊은 산속 청아한 연못이 아닌, 냄새나는 쓰레기통 앞이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아쉬움과 묘한 기분으로 눈을 두어 번 껌뻑이고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가 정녕 깊은 산속 연못가가 아니란 말인가.  내 눈에는 수염이 허연 산신령은 어디로 가고 홈리스가 쓰레기통 속에서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웬걸.  그러면 그렇지.  그 야박한 도깨비가 나에게 나타날 리가 없지.  야속한 도깨비 방망이 같으니라고.
  흐릿한 눈앞에 스테이플스 봉지가 어른거렸다.  그것이 아마 내가 찾는 것일 거라고 하자, 산신령이 아닌 홈리스가 건네주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오는 내 발걸음이 몹시도 무거웠다.  아직도 아내와 아이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정확하게 두 컵, 쌀을 그릇에 넣고 씻었다.

3/2/2010

*꽁트라고는 써본 적이 없는 내게 어느 날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코리안저널의 기자가고 하며  꽁트를 하나 써 줄 수 있겠느냐고 원고청탁을 했다.  처음에는 황당해서 거절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써놓은 수필을 조금 바꾸어서 쓰면 되겠다 싶어 용기 내어 처음으로 써본 꽁트다.  2010년4월호 코리안저널에 게재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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