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을 기다려 온 편지

2013.06.08 11:21

이영숙 조회 수:339 추천:60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아주 고상하게 생각하며 가슴에 따뜻하게 묻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미학’이 항상 ‘미학’이 아님을 요즈음 절실히 느낀다.  노을을 바라보듯 아릿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기다림은 역시 지루하고 답답한 것이다.  봄 아지랑이 마냥 가슴 설레게 하는 기다림도, 따뜻한 봄볕에 노글노글 마음이 녹아지는 듯 하다가도 한 순간 갑자기 오지 않는 안타까움에 우울해진다.  기다림이 지쳐가는 모습이다.

  한국에서는 우체통이 빨간색이다.  빨간색의 의미는 눈에 잘 뜨이라는 의미와 함께 신속함과 긴급 상황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체국의 빠른 서비스를 나타내는 의미로 선택한 색깔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는 우체통이 파란색 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편지들이 늘 빨리 배달이 되더니 미국에서는 이렇게 더딘 것인가?  9년이 넘는 세월을 이렇게도 간절히 기다리건만 도대체가 소식이 없음은 어찌된 일일까.  

  요즘은 우체국을 이용한 편지보다는 이-메일이 주를 이루고 있어 거의 대부분의 편지들이 이-메일로 오가지만 난 여전히 우편배달부가 배달해주는 한 통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이-메일을 받을 때도 즐거움이 있기는 하지만, 우편배달부가 배달해 준 편지를 들고 그 편지의 봉투를 조심스럽게 가위로 잘라서 펼쳐보는 느낌도 흥분과 긴장이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우리 아파트에는 오후에 우편배달부가 다녀간다.  저녁이 되면 변함없이 메일박스로 달려가 열쇠 든 손의 떨림을 느끼며 가슴을 진정시키고, 긴 한숨을 쉬고 난 다음 열어본다.  그러나 때로는 텅 빈, 때로는 광고지들로만 가득한 메일박스만 발견할 뿐이다.  

  세월이 이렇게도 많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제 강산이 모두 변할 시간이 되었다.  강물도 말라서 더 이상 흐르지 못할 것이다.  산에는 진달래가 폈다 지고, 파릇한 새순에서 짙은 녹음으로 변했다가, 곱기는 하지만 한 색으로는 너무 단조로워 가지각색의 단풍으로 온 산을 치장하기도 하고, 그 또한 한줌의 흙 되어 땅에 묻히기도 했다.  눈꽃이 피었다 녹고, 다시 새순이 돋고.  그러기를 아홉 번을 했으니 이제는 산도 그때 산이 아니고 강도 그때 강이 아니다.  내가 처음 이 편지를 기다리기 시작할 그때의 모습들이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하였건만 내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 한통의 메일을 기다리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혹시 나를 잊은 것은 아닐까?  기다리가 지칠 때는 그러한 걱정이 사실은 가장 많이 든다.  잊지 않고 기억만 하고 있다면 그래도 더 많은 세월이라 하더라도 참아 기다릴 것이다.  가뭇하게 잊히지 않음은 그래도 행복이니까.  그러나 만의 하나 완전히 잊혀 진 여인이 되고 말았다면 그보다 더한 슬픔이 어디에 있을까.  ‘버림받은 여자는 불쌍한 여자, 그러나 잊혀 진 여자는 더욱 불쌍한 여자’라는데, 혹시 나는 이미 잊혀 진 여자가 된 것은 아닐까.  가슴이 조림도 그 때문이고, 두려움도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가능한 빨리 받고 싶은 마음이야 더 할 수 없이 많다.  그래도 잊지 만 않았다면 시간이 늦어져도, 좀 지루하기는 하지만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언젠가 전해질 그 한 장의 편지가 나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리라는 기대로 아침의 햇살에도, 저녁의 노을에도 함께 빨갛게 물들이며 내 볼을 적실 것이다.
  물론 가끔씩 내가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너무 자주 보내면 귀찮아 할까봐, 짜증만 더할까 염려하여 매일이라도 보내고 싶은 내 속내를 감추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 나를 잊을 만 할 때가 되면 잊지 말라고 보낸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당신의 그 편지를 여전히 기다리며 건재하다고 가능하다면 당신의 소식이 빨리 왔으면 나에게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보낸다.  벌써 여러 통을 그렇게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식은 깜깜이고 내 애간장만 녹인다.  하기야 답답한 것은 나지, 그야 무엇이 급할까.  난 언제나 짝사랑인 것을.  

  오늘도 나는 석양을 등 뒤로 하고 메일박스로 가서 언제나 그랬듯이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돌린다.  혹시 오늘쯤이면 9년을 석 삼일로 여기고 기다려 온 그 편지가 다소곳이 메일박스에 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내 손 끝에 닿을까 하여.  기나 긴 세월을 묵묵히, 한결같이 기다려 온 한통의 편지.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말들을 하고 기나긴 편지를 쓴다.  그러나 언제나 핵심은 오직 한마디다.  그 한마디를 위하여 많은 미사여구가 필요한 것이며 수식어들의 나열을 길게 길게 만들어 지는 것이 말이며 편지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단어들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본론을 말하면 단 한 마디 ‘사랑’인데.  
  내가 기다리는 것은 기나긴 미사여구를 다 접어두고, 세상에 있는 모든 수식어들은 다 뒤로하고 요점만 듣고 싶다.  오직 한마디.
  [당신이 신청한 영주권이 승인 되었습니다.]라는 이민국에서 보낸 그 편지 한통.

9/17/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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