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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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외로운 외침

2007.01.22 12:03

윤금숙 조회 수:360 추천:70

은은한 야생화 향기가 소독약 냄새와 어우러져 병실 안을 감돌고 있는 조용한 아침이다. 한줄기의 햇빛이 미니 브라인더 틈새로 들어와 선잠을 자고 있는 환자의 얼굴에 살폿이 내려 앉는다. 그 정막함이 지난 밤 힘들었던 환자들의 아픔을 잠재우고 있는 듯하다. 주말에다 공휴일까지 겹친 병원은 외래환자의 발길이 끊겨 무척이나 한가롭다.
  이렇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샘이라도 내듯 전화소리가 정적을 깬다. 정신과 응급실에서 한국어 통역이 필요하다는 전화인 것이다. 정신과라는 말에 겁이 덜컥 났다. 사실 통역은 내가 꼭 해야 할 임무는 아니다. 이 병원에는 통역원들이 있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마이크로 부른다. 아마도 휴일이라 통역을 맡을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이곳 종합병원은 주로 극빈자들이 많이 온다. 한국인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곳도 아닌 정신과 병동이라니 가고 싶지 않아 못 들은 걸로 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국만리에서 동족의 어려움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정신과 병동의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미지의 사람에 대해 상상을 해본다. 어쩌다가 정신과 병동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좀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 미국에 왔을 것이다. 환자를 보기도 전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 대기실에 들어서는데,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첫눈에도 정신과 환자가 아니라 술이 문제가 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혹시 마약 중독이 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었다.
  게슴치레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의 표정에서 언뜻 반가움과 안도감이 스치는 것을 나는 느꼈다. 경찰관 두 명이 양쪽 옆에 앉아 있고 손목을 뒤로 한채 수갑이 채워져 있는 모습이 건장한 미국인들 앞에서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순간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경찰관이 여기까지 데려오게된 경위를 잠시 설명했다. 이웃 사람들의 신고로 가봤더니,텅빈 아파트에 술병이 난장판으로 어지럽혀져 있고 언제부터 술을 마셔댔는지 엉망으로 취해서 가스를 틀어 놓고 죽는다며 난동을 피우고 있었단다. 그는 월남전에도 참전을 했었다고 중얼대더라며 경찰은 고개를 갸웃둥했다. 이곳 미국에서는 이런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일단 정신과로 데려온다 한다.
  나이가 오 십은 넘어 보이니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쟁의 후유증 때문일까? 아니면 옮겨 심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진통을 겪는 것일까? 여러가지 복잡한 가정문제로 인해 자포자기가 되었을까? 이런 상상을 하다보니 내 머리는 혼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정신과 의사의 질문에 그는 고함을 치며 횡설수설했다. 마약을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엔 그런 것은 안한다며 나에게 심한 욕을 해 경찰들이 양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만취된 사람한테 무슨 답을 들어 보겠는가. 결국은 형식적인 질문만 한 후, 72시간 동안은 꼭 병원에 있어야 되니 문제를 이르키지 말라는 다짐으로 통역을 끝냈다.
  이미 서너 명의 환자들이 있는 병실 한 침대 앞에 그를 세워놓고, 수갑을 채웠는데도 온 몸을 끈으로 묶는다. 만약의 난동에 대비하기 위해서 라는 것쯤은 알지만 너무 비참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 광경을 보고 병실을 나오는데 그 남자의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귓전을 때린다.  
  나는 현기증을 느껴 벽에 힘없이 기대어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어제까지만해도 외래 환자들로 벅적댔던 병원 복도는 적막하다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어두운 터널같아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아! 이 사람의 부인과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의 어머니는 아들이 수갑에 채워진 채
병원에 끌려와서 저렇게 묶여 있는 사실을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그도 이 외로운 외침에 모든 시련을 실어보내고, 남의 나라에서 사는 슬픔을 딛고 이 미국 땅에 뿌리 내리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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