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0
전체:
16,423

이달의 작가

보이지 않는 끈

2007.01.23 00:36

윤금숙 조회 수:389 추천:74

아들은 10년 동안 타고 다니던 차의 수리비가 새차 불입금만큼이나 많이 들어 간다고 투덜댄다. 새차를 사는 것과 리스 사이를 저울질 하는 눈치였다. 본인이 결정하게 내버려두고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돈이 몇 푼 없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 나는 나대로 궁리를 하고 있었다.

  월급을 타면 아파트비 등등, 지불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혼자 사는 것이 더 낭비가 많을 뿐더러 하루빨리 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해서 둘이 오손도손 의논을 하며 산다면, 내가 구태여 이런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다 든다.  

  내 솔직한 심정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다운 페이 할 돈만은 조금 보태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들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은행 이자는 높으니, 무이자로 엄마 돈을 빌려쓰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말 한마디없이 나의 성의를 완전히 무시한채 혼자 결정해서 차를 샀다. 나는 아들의 처사에 몹시 화가 나서 통화중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생각할수록 섭섭했다. 시집 가서 멀리 살고 있는 딸한테 하소연이나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흥분 상태로 자초지종을 말하고 있는데 딸은 듣고만 있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엄마는 항상 니들 일은 니들이 알아서 결정하고 실수를 해야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하면서, 무슨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는 꼭 끈을 착 잡아 당기는 거 알아?” 그 애도 충분히 생각을 한 후 자기 힘으로 처음 새차를 샀을텐데, 잘했다고 축하는 못해줄 망정 꼭 엄마가 원하는 대로 안했다고 해서 그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란다. 엄마 돈을 빌리지 않은 것은 엄마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서로가 잘된 일이라고 덧붙인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딸의 말이 백 번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도 내 나이가 되어 똑같은 입장에 처하면 지금의 내 심정을 이해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나도 꽤 많이 서구화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부모는 으레 자식에게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하고 자식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 옛날 관습에서 나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독립심이 너무 강해 부모자식 지간의 끈끈한 정이 메말라 가고 있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든다. 부모한테 의뢰하지 않는 대신 간섭도 하지 말라는 식이다.

  문뜩 내가 자랄때 일이 생각난다.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하나라도 더 부모한테 받으려고 며칠씩 엄마를 졸라, 갖고 싶었던 것을 가졌던 지난일들. 형제간에 서로가 잘해주기도 하고 가끔은 섭섭하다고 토라지기도 했었던 일들. 정이 넘쳐 어떤 때는 부담이 되기도 하는 한국적인 정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새차를 샀으니, 헌차를 알아서 처분하겠다던 아들한테서는 소식이 없다.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는 장소가 없어 헌차를 우리 집 드라이브 웨이에 갖다 놓았으니, 아침 저녁으로 먼지 쌓여 가는 차가 눈에 거슬린다.

  아무래도 느긋한 아들을 믿다가는 헌차는 오랫동안 집 앞에 그대로 있을 것 같아,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한국 헌차 딜러상에 으뢰를 했더니, 곧 바로 차를 사러 왔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차는 더 초라하게 보인다.

  그들은 차를 흘낏 보더니 시큰둥하게 턱으로 “저 차예요?” 한다. 나는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밀어붙였다. 차를 너무 험하게 탔고 항상 바쁘다는 이유로 닦지도 않았다고.....

  차 얘기를 듣는둥 만둥 하더니 먼길에 왔으니 냉수나 달라며 그들은 아들 얘기를 이것저것 묻는다.

  그러다가 그들은 아들 흉을 볼 일이 아니라 이런 차를 지금까지 타줘서 고맙다고 하란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돈주고 타라해도 안 탈 차를 가지고 무슨 흥정을 하자는 거냐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네는 거저 줘도 안가져 가니 레드 크로스 토잉 써비스 불러도네이숀이나 하라며 밝게 웃고 붕 떠나버린다.

  밀렸던 숙제를 해놓은 것 처럼 가슴이 후련해졌다. 도네이션을 하기 위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차 안팎을 왁스까지 발라 깨끗하게 닦아 놓았다. 말끔히 세수를 하고 분단장을 한 차는 아들의 지난 일들을 가득 담은 추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아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부모의 둥지를 떠나 훨훨 날고 있었구나 하는 쓸쓸한 마음과 흐믓한 마음이 야릇하게 교차되고 있다. 자녀들이 독립해서 어느 곳에서 살지라도,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보이지 않는 끈은 어쩔 수 없는 천륜인 것을.

  이 끈을 통하여 이어지는 사랑은 자식에게로, 손자에게 흐르면서 가족의 역사는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 무엇을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인가 윤금숙 2007.01.23 631
15 만남 윤금숙 2007.02.04 602
14 머사니 윤금숙 2011.12.28 574
13 창밖엔 백일홍이 윤금숙 2012.08.14 551
12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사랑을 원한다 윤금숙 2011.12.28 503
11 할미꽃 간호사 윤금숙 2011.12.28 462
10 단풍은 다시 물 들지만 윤금숙 2011.12.28 458
» 보이지 않는 끈 윤금숙 2007.01.23 389
8 대박의 꿈 윤금숙 2007.01.23 382
7 프리지어 간호사 윤금숙 2007.01.22 360
6 외로운 외침 윤금숙 2007.01.22 360
5 단비 윤금숙 2007.01.22 341
4 그때 그 시절 윤금숙 2012.08.14 335
3 우리들을 위해 걷는다 윤금숙 2012.08.14 292
2 드라마 작가인 친구에게 윤금숙 2012.04.20 286
1 빈자리 윤금숙 2007.01.22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