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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따스한 미소를 만나는 벤쿠버에서

2004.01.27 05:08

박정순 조회 수:605 추천:57

겨울여행.3


벤쿠버는 캐나다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토론토에서 서울을 오갈 때 벤쿠버를 경유해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2002년 가을 서북미 문학회 이민 백주년 기념에 초대해준 오정방, 유은자 시인으로 인해 하루를 들렀던 곳이다.

낯설다는 것, 자유로이 움직이고 싶으나 거리의 낯선 간판들과 지도를 들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 등은 혼자일 때는 두렵다. 서울에서 가져온 시집을 전해 주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잠시 스탠리 공원을 드라이브하였던 것이 전부였던 그해 가을의 벤쿠버는 두려움과 반가움이었던 기억으로 웃음이 났다.

캘거리에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던 까닭으로 생각보다 이른 저녁 6시쯤에 벤쿠버 남편의 선배님 댁에 도착했다. 캐나다로 이민을 온 뒤 그 선배님 댁에서 3일을 머물렀던 시절을 뒤로하고 만 10년만의 해후였다. 남편의 직장 상사이며 학교 선배이신 정선배님은 추운 토론토가 싫다고 벤쿠버로 이주를 하셨다. 해후의 기쁨과 함께 미리 준비해 갔던 커피 보온병과 부부 커피 잔, 그리고 티 셔츠 등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 놓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무수히 많은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의 삶 자체가 미로를 향한 알 수 없는 길이라고 해도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감을 확인 할 수 있는 것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살아 있음이 아니련 가?

서울에서 그날 돌아온다던 부인은 친정 어머니의 병환으로 조금 더 서울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고 한다. 안주인이 없는 집을 방문한 우리를 위해 예약해 놓았다는 일본 식당으로 갔다. 주문한 양을 다 먹지 못해 포장을 해서 가져와야 했던 것도 그저 자꾸만 베풀어주시고 싶어하는 선배님의 사랑 탓이었다. 가지치기를 하듯 하나 하나 벗어 던진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다시 시작한 회계사 공부와 전공을 살린 전기 수리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는 선배님의 모습이 부처님의 미소처럼 맑다. 그런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난 뒤의 가벼움, 살아오면서 나의 잣대로 잰 것들이 결코 옳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숱한 일들이 적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드러난 삶의 모순은 어쩌면 이민 자이기에 겪는 갈등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삶의 또다른 그리움의 향수들을 허탈하게 술잔에 쏟아 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자 반찬 재료는 쌓여 있는데 정작 만들어진 반찬은 없었다. 모른 척 하기에는 그랬다. 하여, 나물을 무치고, 밑반찬을 만들고, 우거지 국을 끓여 놓고 돌아설 때의 마음은 작은 정성을 보답해드린 것 뿐. 우리가 남을 돕는 다는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만족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파리에 살고 있는 홍세화씨가 쓴 책중에서, “한국사회는 "정"이 흐르는 사회라면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 표현했다. 똘레랑스. 나와 다른 남을 허용하고 관용하는 것. 나의 이념이나 신념 . 종교 따위가 나에게 귀중한 것이라면 남의 그것들도 그에겐 똑같이 귀중한 것. 나의 그것들이 존중받기 원한다면 남의 그것들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곳 사회는 바로 이런 너와 나의 어울려 사는 삶의 조화인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거나 남이 무엇을 하거나 상관하지 않고 여름에도 겨울 잠바를 입고 다녀도 쳐다보지 않고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어도 나무라지 않는…. 하여, 이민자의 고독을 느낄지언정 마음은 편안하다고 했다.

밤바람을 쐬기 위해 스탠리 공원을 한바퀴 돌았다. 불야성을 이루는 따스한 불빛이 토해내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바라보는 공원의 나무들은 말이 없다. 천년세월을 자랑하는 수목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주기라도 하는 듯. 텅 빈 나무기둥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에 잎을 틔운 나무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침묵으로 지켜 볼 뿐이다. 마주보는 항구의 불빛은 겨울 숲 속에 서 있는 나그네들에게 지난 시간을 조심스럽게 펼쳐 놓았다. 가슴속에 곱게 숨겨 두었던 이야기들, 그리운 사람들과의 좋은 시간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감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을.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이렇게 말을 한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떨어져 있어도 끈끈한 선. 후배의 정이었다. 후덕하게 보살펴 주고자 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선배님의 마음, 그건 어느 한 순간에 쌓인 정이 아닌 듯 했다. 녹녹하게 쌓인 세월과 서로의 보이지 않는 관심과 사랑이 둘의 관계를 은근하게 구워서 달군 듯한 그런 믿음을 확인하는 시간을 한잔의 술에 풀고 있었다. 올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온다는데 우리들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폭설로 길 끊어지는 일은 없어야겠다며 바닷가의 금빛 물결처럼 출렁이는 음악에 밤은 어느새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