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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선릉의 적막한 숲속에서

2009.06.23 05:43

박정순 조회 수:328 추천:34

선릉. 지난 주 토요일 선릉의 아름다운 광경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서…. '아, 그렇구나. 선릉이 있었네. 그곳을 한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래토록 서울, 그것도 강남쪽 에서 살았고 일을 했었고 그리고 지금도 선릉과의 거리는 자동차로 20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경내를 찾지 않은 무심함을 대신하듯 화요일 선릉 견학으로 정했다. 어머니들께 점심 준비를 해 달라는 편지를 말하지 않고 외식을 시켜 줄 생각이었는데 알리스 선생님이 푸짐하게 김밥을 준비 해 왔기에 출발 전부터 신이 났다. 견학의 즐거움을 아는 정윤이와 재은이는 "헬렌, 아이 러뷰. 아이 미스유 소 마치" 하며 신발을 갈아 신기도 전에 빰에키스를 해댄다. 이에 뒤지지 않으려고 은영이와 주현이가 동참을 하고..."앙큼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하면서 선생님들과 웃을 수밖에... 선릉은 조선 9대왕인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그리고 성종의 아들인 중종의 묘가 있는 곳이다. 선릉의 경내로 들어서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구 좌측에 있는 홍살문(일명 신문 神門)이다. 홍살문 아래로 넓적한 돌을 깔아 놓은 길이 보이는데 이것은 신도(神道)라고 부른다. 즉 신이 걸어가서 제를 올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일반 관광객들은 그 길을 걷지 않는 것이 왕릉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성종에 대한 멋진 일화들은 제외하고 그는 척신과 원로 훈신들을 적절히 제어하면서 내치와 외치, 학문과 문화의 창달 면에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밖으로는 국경을 안정시키고 세조 때에 시작되었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발간함으로써 법체계를 완성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과 악학궤범 등 많은 문화서적을 출간의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30세를 넘어서 향락에 빠져 국가적 비운을 만들었다. 성종의 외도를 알아 챈 왕비 윤씨가 질투심에서 용안에 상처를 냈다. 하여 폐비로 전략하게 되는 윤씨의 비극은 후일 왕위에 오른 연산군의 비화는 역사의 비운을 안겨주었다. 연산군의 황음 무도함과 폭정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중종 재위 기간 중에는 훈신과 사림, 척신의 정쟁으로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중종은 조강지처인 단경왕후를 폐위시켰다. 단경왕후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인척관계라는 이유로 대신들은 왕후의 폐위를 요구했고 대신들의 요구를 거부하던 중종도 끝내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왕비를 사가에 보낸 중종은 대궐에서 가장 높은 누각에 올라 왕비가 있는 사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왕비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안 왕비 쪽에서는 왕비의 집 뒤에 있는 언덕의 바위 위에 왕비가 궁궐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걸어서 왕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를 그 후부터 치마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생을 마감했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서면 오늘을 소홀히 보내고 있을 나에게 안타까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유한의 생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됨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공들여 오래토록 그리움의 탑을 쌓으며 기다리는 간절함의 기도, 그것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그 애잔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 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6월의 짙은 초록이 적막한 숲속의 향기와 어우러진 아이들의 초롱한 눈빛과 웃음소리에 살아있음의 환희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만 남겨두고 서둘러 출입국 관리소를 향했다. 유월의 햇살이 따갑게 머리위를 쓰다듬어주는 아름다운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