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날
2003.01.06 04:12
어젯밤 늦게 시작된 바람이 으르렁거리며 거리를 떠돌고 있다. 잠들려는 집집마다 창문들을 덜컹덜컹 두드리더니 아침엔 교차로의 신호등마저 꺼버렸다. 거리마다 바싹 마른 낙엽을 함부로 몰아대며 바람은 오늘 하루 아주 거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모양이다. 휘몰아치는 붓끝이 가슴을 뒤엎을 듯 휘젓고는 아무 말도 말라고 입을 막는다. 말하려고 애쓰지마. 이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게 아냐. 으르렁 으르렁. 그냥 가만히 들어봐. 아니면 바람을 타고 함께 가든지. 마른 잎을 털어 내듯 가슴을 털어 봐. 칼칼해진 목구멍, 그 동굴 속에 갇힌 짐승이 몸을 일으킨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속의 짐승쯤으로 보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 동굴 속에 살고 있었을 듯 싶은 짐승이 천천히 눈을 뜬다. 어디로 달려갈까, 달처럼 둥근 뿔을 들고 일어선다. 동굴 밖은 너무 눈이 부시다. 무심한 자동차들이 오가고 그 자동차들에 업혀 시간이 흘러간다. 무작정 뛰쳐나온 짐승이 눈을 끔뻑인다. 어디로 가야하나. 하늘은 푸르고 바람 소리에 귀가 멍멍하다. 무성영화 같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뒷발질을 해본다. 그냥 동굴로 돌아가긴 허전하고, 무작정 저 자막을 찢고 뛰어들어? 서성이는 발길에 마른 잎이 거리적댄다. 머리 위의 뿔이 무겁다. 그 뿔에 무슨 꽃씨라도 하나쯤 걸려 주면 다시 동굴에 들어가기가 조금 수월하겠다. 그러면 언젠가 무심한 발길에 내 동굴이 발견되기 전에 벽화 속에 꽃 하나 피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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