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좋은 스위치를 개발해야

2003.01.15 06:49

김혜령 조회 수:163 추천:24

아이와 있으면 기가 다 빠지는 것 같지 않냐고?
난 사실 아이와 두어시간 지내고 난 뒤면 아무 생각도 안난다. 더구나 "기" 같은 형이상학적인 말은.
출산직후 혼비백산한 상태에서 비몽사몽 읽은 책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이제 인간에게는 형이하학적인 구원이 남아있을 뿐 이라고. 앞뒤의 맥락은 기억나지 않고 그 책의 작가가 형이상학적인 구원을 얼마나 많이 구하고 실패하였기에 그런 말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기억한다. 호르몬이 뒤죽박죽이 된 몸, 수면부족의 무거운 머리로 내가 그때 바라던 것은 잠 뿐이었으므로.
확실히 아이는 나를 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상에 묶어놓는 완강한 족쇄이다. 물론 귀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서 맺어진 사랑의 족쇄이므로 거부할 수도 없다. 먹여달라, 치워달라, 재워달라, 그리고 놀아달라, 아이는 몽롱한 꿈과 정신의 세계로 도망치려는 나를 끊임없이 지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지구의 표면에 납작하게 붙어 살아야 하는 일상으로.
그러나 아이와 지내는 언어 이전, 논리 이전의 시간을 경험하면서, 나는 조금씩 일상적인 것들, 사소한 것들, 때로는 경멸스러웠던 형이하학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다. 인간이 몸과 정신의 존재이듯이, 정신과 꿈을 위해 내 삶의 몸을 이루는 일상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사소한 낱낱의 일상까지 포함한 삶을 사랑하되, 안일하지 말 것. 일상을 지키되 지향점을 가지고 끊임없이 꿈꾸며 추구할 것. 정신과 몸을 모두 소중히 간직하고 즐기기 위해, 삶을 충실히, 만끽하며 살기위해,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내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스위치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때에 따라 알맞는 채널을 순발력 있게 켜고 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굉장한 정신 집중 능력을 키우고 습관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타냐처럼 아이 셋을 키우며 꿈과 글을 놓지 않는 여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성능 좋은 스위치를 개발했음이 분명하니까.

인사가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타냐, 방문해 주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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