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쓸쓸한 날에-강윤후

2006.11.08 04:28

김혜령 조회 수:191 추천:25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새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이나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
쑥뜸 떠 毒氣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랫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노래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끓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얘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바짝바짝 퉁명스레 말라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를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대쪽처럼 쪼개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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