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렌즈

2003.01.03 03:52

김혜령 조회 수:615 추천:73

코를 보여줘.
초인종을 누르기가 무섭게 딸아이의 새된 목소리가 어안렌즈 근처에서 들려왔다. 언제부터 문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 올라서서 기다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벌써 약속시간에서 50분이나 늦어 있었다.
아이는 늘 그런 식이었고, 그는 조심성 있는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미국에 이민 온 직후에 그들 부부는 한동안 아이를 혼자 집에 둔 채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그 시절 아침마다 아이에게 얼마나 신신당부했던가. 아무도 들이지 말아라. 아는 사람 같아도, 혹시 아빠나 엄마 같아도, 의자에 올라서서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아라. 그리고 돌아와선 저녁 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코를 고는 그의 코를 아이는 늦도록 혼자 깨어서 조몰락댔다. 그렇게 가슴 조이는 삼 년을 세상과 싸워서 가까스로 가게 하나를 마련했지만, 이미 부부 사이는 삐걱댔고, 아이에게는 서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꼴만 보이다가 결국 가게를 팔고 각자 일자리를 찾아 헤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 제 부모들은 삶에 대한 기대도 서로에 대한 감정도 모두 달라졌건만, 아이는 혼자서 충실히 어안렌즈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코를 문짝에 뚫린 구멍 앞에 들이댔다. 아이의 눈앞에 거짓말한 피노키오 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있을 제 코를 생각하니까 쓴웃음이 났다. 어디 코뿐이랴. 어젯밤 과음으로 충혈된 눈도 그렇고, 서두르느라 자동차 문에 부딪혀 얼얼한 턱엔 못 같은 수염이 삐죽삐죽하고, 옷은 구겨지고......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 보지 못할 아이에게 남기는 아버지의 인상이 고작 이 모양이라니. 그는 아이의 둥근 시계 속에 초라하게 담겨 있을 제 모습이 부끄러워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잎 돋은 우듬지 너머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날 보지 말고 차라리 이 물 속 같이 깊고 고요한 봄날을 기억해라.
이번엔 손.
그는 바지에 쓱쓱 땀을 닦고 무엇을 맹세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한때 그렇게 손을 들어 죽을 때까지 함께 하리라 결혼을 서약했지만, 지금 그의 손이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래도, 너의 아버지라는 어설픈 주장뿐이었다.
아가미나 지느러미 같은 건 없나요?
뭐라고?
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환한 봄빛이 한꺼번에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아이의 작은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단단히 꿰매 놓았던 실밥 하나가 툭 터져 나갔다. 일주일 전 아이 엄마에게서 곧 이곳을 떠나리란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하필이면 왜 그 먼 알래스카니? 소용없고 미련한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설사 일부러 그런다고 해도 막을 수 없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아이를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지리라는 생각에 그녀의 결정이 한없이 야속했다. 이제는 아이의 방학만이 그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동안 아이는 또 얼마나 훌쩍 자라 있을까. 다음엔 코나 손만 아니라 귀며 발이며, 하다못해 지느러미까지 만들어 보여줘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그들은 그날 계획대로 수족관에 갔다. 요즘 들어 부쩍 물고기에 관심이 많아진 아이는 유리에 보얀 콧김이 퍼지도록 어항마다 한참씩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게다가 물고기들이 오갈 때마다 손을 휘젓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물고기처럼 뻐끔뻐끔 입을 벌려 보기도 하더니 한 곳에서는 스르르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 아프니? 아빠가 업을까? 다가서던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버렸다. 아이는 어느 새 유리벽 저편에 나타난 새끼상어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 상어가 나타나 새끼를 데리고 어항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어들 역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뽀족뽀족한 이빨이 드러난 입이 마치 웃는 듯 길고 둥글게 열려 있었다.
그리곤 점심을 먹었고, 아이가 조르는 대로 고래 구경하는 배를 탔다. 멕시코 해안에서 겨울을 나고 알래스카로 이동하는 고래를 겨우 두 마리 목격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아이는 그의 목에 매달린 채 뭘 찾는지 시퍼렇게 출렁이는 물결에서 잠시도 눈을 떼려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는 멀미를 했고, 먹은 것을 순식간에 다 토하고는 파김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부두를 떠나 공원길로 들어서는 동안 그의 품에서 잠이든 아이는 자면서도 자꾸만 그의 코를 더듬었다.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을 걸으면서 그는 문득 아이가 불면 날아갈 꽃잎 같이 가볍다고 느꼈다. 그래, 그렇게 다 토했으니...... 하긴 아이가 천근이라도 그는 그렇게 아이를 안고 걷는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개구리 마냥 그의 품에 찰싹 달라붙은 아이의 체온으로 그의 가슴은 따뜻했고, 아이의 꿈에서부터 피어나는 듯 희고 몽실몽실한 꽃무더기는 끝이 없었다. 그 길에 끝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끝이거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의 시작일 것만 같았다. 아마 깊은 물 속 같이, 잠 속 같이,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 이대로 이렇게 아이를 안고 그곳으로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무책임하고 안될 일인 줄 알면서도 그는 자꾸만 그런 생각의 길로 발을 내디뎠다. 하얀 물보라를 내뿜으며 물결 사이로 숨어버린 고래처럼 그도 아이를 데리고 잠적해버리고만 싶었고 그 길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날 늦도록 아이를 안고 거리를 헤매다가 밤이 늦어서야 제 엄마에게 데려다 주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외면한 채 문을 닫고 돌아서는 그의 귀에 아이가 남긴 귓속말이 되울렸다. 아빠, 다음엔 우리 아빠고래 찾으러 가자.
그는 걸음을 되돌려 문 앞에 다시 섰다. 동그란 구멍이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그 구멍에 찡하게 부풀어오른 코를 들이대고, 좀 전까지 아이의 작은 손이 담겨 있던 손도 펴 보였다.
이젠, 웃어봐.
언제 의자에 올라섰는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늘어진 입술 끝을 애써 치켜올렸다. 아침에 다친 턱이 다시 욱신거린다고 느끼는데,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빠 꼭, 어항 속 상어 같다.
?!
그는 문 저편에서 아이의 입술이 어안렌즈에 작은 흡반같이 포개졌다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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