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2003.04.14 06:10

김혜령 조회 수:351 추천:35

냉장고 안에서 뭉그러져 가는 콩알들의 몸 비빔과
선반을 타고 내리는 진득한 복숭아의 혈흔을
가슴에 담아 두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건지 몰라.

스러지고,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들의
비릿한 슬픔과
그 슬픔 뒤의 은밀한 기쁨까지도
'서늘한 곳에 보관'해 두는 것.

눈감고 찬장구석의 멥쌀가루와 찹쌀가루, 고춧가루 봉지들을 헤아리다가
때로는 문득 미숫가루 봉지에 뚫린 삼각형 구멍이 눈에 보이고
그 속으로, 그 보드랍고 순한 입자들 속으로
기어들고픈 충동
그 엿 같고 벌레 같은 그리움을
새파란 가스 불에 지져내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건지 몰라.

산다는 건 그냥
그런 건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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