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2004.03.16 07:17

김혜령 조회 수:812 추천:88

유리창 귀퉁이에 분홍빛 기운이 스미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또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저녁 노을에 대한 여자의 촉각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쨍쨍하던 하늘 귀퉁이에 한 자락 그늘만 스쳐도 여자는 자신의 가슴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고, 그 그늘에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기라도 할 듯 초조한 마음으로 손놀림이 빨라지는 것이었다.
얘야, 빨리 먹어라. 먹을 거니, 안 먹을 거니?
여자는 식탁에 간식거리를 벌려 놓은 채 어느 새 식탁 밑에 들어가 기차놀이에 열중해 있는 아이에게 닦달하듯 물었다.
지금 먹기 싫으면 가지고 나갈까? 장난감도 가지고 갈까? 화장실 갈래? 근데 네 재켓이 어디 갔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마주보는 아이에게 여자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거위 보려면 빨리 가야지. 어두워지면 거위들이 다 자러가요.
거위?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아이 앞에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아까 거위 보러가자고 했잖아.
따지는 듯한 여자의 말투에 아이는 다시 뭔가를 물으려고 잠시 쫑긋거리던 입을 다물어 버렸다.
벌써 보름 전이었던가. 아침나절 장 보러 갔을 때, 사기로 만든 거위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에게 그거 거기 놔두고 우리 이따 진짜 거위 보러가자고 말한 건 단순히 그 순간의 불안을 모면하려는 여자의 잔꾀였다. 그날 여자는 아이가 벌써 잊었으리라, 잊으리라, 생각하고 딴청을 하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은 늦은 오후에 아이의 성화를 못 이겨 거위를 보러 갔었다.
여자는 짐짓 아이의 눈길을 피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외출을 서둘렀다. 장난감을 놓지 않으려는 아이를 송아지 몰 듯 몰아 소변을 보게 하고 손을 씻기고, 다급한 손길로 양말을 신기려다 여자는 한숨을 내뿜고 말았다. 바지에 커다랗게 번진 초콜릿 자국을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보기엔 괜찮은데 또 갈아입자고?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인 줄 뻔히 알면서 여자는 마치 편들어 줄 누구라도 있으면 보아 달라는 듯 잠시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하늘엔 시시각각 어둠이 번져 가는데. 여자는 마치 노을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기라도 한 듯, 마음이 조급해 손끝이 떨릴 지경이었다.
바지를 갈아 입히고, 만약의 경우를 위한 여벌의 옷 한 벌과 거위에게 줄 묵은 식빵조각까지 챙겨 넣고서야 여자는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창밖엔 이미 부인할 수 없는 두께로 어둠의 그늘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듯 달려봐도 시간과의 경주에서 그녀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인 듯 싶어 여자는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모래를 털어 아이에게 신발을 신기고 자동차에 태웠다.
엄마, 파리 파리?
아이는 깡충깡충 뛰어 차에 오르면서 엄마의 '빨리 빨리' 후렴을 흉내냈지만 여자는 웃어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어 멋없이 응, 응 하고 말았다.
카.시트에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똑 소리가 나도록 확실히 채운 뒤에야 여자는 절박하게 굳어져 있던 얼굴을 풀어 한결 너그러워진 표정으로 아이에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거위는 뭐라고 하지?
꽥, 꽥!
그래, 거위가 우리 주용이 보면 반가워서 꽥꽥 달려오겠다, 그지?
여자는 '꽥꽥'이라고 조그만 입을 나팔꽃처럼 벌려 대답해주는 아이가 고마워서 아이의 백도 같은 볼에 자신의 뺨을 비비고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며 아양을 떨었다. 아이의 한 마디로 자신의 석연치 않은 속셈으로 인한 죄책감과 저만치 앞서가는 시간에 대한 패배감이 조금은 위안을 받은 듯 했다. 그래, 너도, 나도 좋은 거야. 너도 거위 보니 좋고, 나도......
후진하여 자동차를 빼고, 부웅 소리와 함께 차고 문을 닫는 순간 여자는 잠시 승리감에 가슴이 뻐근했다. 잠시나마 그렇게, 바구니마다 빨랫감이 잔뜩 쌓이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장난감과 서류들로 어지러운 현실에 스스로 막을 내려버린 것이다.
여자는 그렇게 핏빛 노을이 밀물지는 거리로 나섰다. 더 이상 막연한 구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절박함으로. 아무런 부표도, 등대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향해 성큼 배를 밀어내는 비장한 심정으로.
그러나 막상 거리로 나서 신호등을 하나 둘 지나고 한 겹 두 겹 어둠의 그늘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구명대를 끌어안듯 운전대에 바짝 달라붙고 말았다.
주용아, 자니?
잊었던 동지인 양, 아이를 기억해낸 여자가 뒷좌석을 향해 물었지만, 아이는 그새 잠이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신호등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아이는 어둘 녘의 흰 나리꽃처럼 무거운 고개를 꺾고 잠이 들어 있었다. 거울 속에서 아이의 모습을 확인하다가 문득 마주친 자신의 눈길을 여자는 얼른 피했다. 대신, 붉게 하늘을 채워 가는 노을을 향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돈키호테가 따로 없다니까. 여자는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외출을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에라도 비교하고 싶었다. 무모하고 미련해도 낭만이 있는 무엇, 순수한 무엇이라 자신에게 이르고 싶었다. 그럼, 그럼, 모름지기 아이들이란 나무와 꽃이 있고, 물과 거위가 있는 공원에서 뛰어 놀아야지. 온종일 집안에서 엄마 쫓아다니고 TV나 보며 뒹굴면 쓰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집에서 공원까지 달려가는 15분 동안에 여자의 마음은 하늘 한 귀퉁이에 핏빛 노을을 풀어내는 수많은 풍차와 싸우고, 또 수없이 많은 어둠의 심해에 곤두박질치기를 거듭했다. 그녀의 귀에는 어느 먼 어린 시절 여자의 청각에 찍혔음직한 목소리가 자꾸만 메아리치듯 맴을 돌았다. 동네 누구의 엄마였을까.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골목에 나와 부르는, 하품하듯 길게 늘어진 목소리였다. 누구야, 밥 먹어라. 그리고 귀에 바싹 붙어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 다 저녁 때 가긴 어딜 가? 혀를 끌끌 차며 눈을 흘기는 어머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하긴 내가 이 시간에, 나가 놀던 아이도 불러들여야 할 이 어둑한 시간에, 집에서 따뜻한 저녁밥 짓고 아이 씻겨 일찍 재울 궁리나 해야 할 이 시간에,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뭘 잡겠다고 이렇게 속을 태우며 달려가나. 도망가는 시간을 내가 뭔 재주로 잡는담? 이런 걸 영어로는 야생거위 사냥 wild goose chasing 이라고 하나? 여자는 그렇게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차를 돌리지 못하고 공원으로 달려갔다.

한적한 주차장에는 이미 나무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다행히도 연못에는 아직 식은 햇빛이 남아 찰랑이고 있었다.
여자는 자동차 엔진을 끄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뒷좌석, 아이의 옆자리로 갔다.
주용아, 주용아. 일어나. 공원에 다 왔어요. 저어기, 저기, 거위들이 기다리네.
여자는 아이의 조가비 같은 귀에 속삭이고, 솜털이 보송한 뺨을 간질여도 보고, 어린 잎 같이 작고 맑은 손을 쥐고 살랑살랑 흔들어보기도 했지만, 이미 잠에 빠진 아이는 깨어날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주용아, 꽥 꽥, 거위들이 빵 달라고 불러요.
몇 번 더 아이의 늘어진 팔 다리를 건드려 깊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 여자는 잠시 체념한 양 짧은 한숨을 쉬어 보았다. 차창을 내리고, 창 밖 가물거리는 물결에 몸을 맡기는 기분으로 벌렁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긴장으로 뻐근한 목과 어깻죽지 사이로 한 줄기 맑은 물결이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열린 창으로 훅 바람이 달려들었다. 나무 냄새, 흙 냄새, 물 냄새, 그리고 새똥 냄새까지, 여자의 뻣뻣한 테두리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상이 한꺼번에 와락 여자의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게 여자 자신이 헐겁게 열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 수평선에 자투리 빛이 남았음을 다시 확인한 다음, 여자는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준비해온 책과 노트를 꺼냈다. "어느 숲 속에서 생긴 일". 읽으려는 단편소설의 제목이었다. 흐흐, 네가 이렇게나 해야 낮잠을 자지. 여자는 책장을 펼치며 잠든 아이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양처럼 순하게 잠든 아이 옆에서 자신의 얼굴은 아마 빨간 모자를 유혹하는 늑대를 닮았을 거라 생각하면서, 여자는 조금 더 소리 높여 흐흐 웃어보았다. 보름 전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와서 아이가 그새 깊이 잠든 걸 보고 낭패한 기분이었던 걸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소설 속에서 두 소녀는 전시의 피난지에서 처음 만났다. 놀러 가는 건지 쫓겨가는 건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멋모르고 떠난 길, 위탁가정을 찾아가는 기찻간에서 친구가 된 그들은 남몰래 숨어들었던 숲 속에서 믿을 수 없이 거대한 괴물 지렁이를 보았다. 또는 보았다고 믿게 되었다.
여자는 읽기를 중단하고 노트에 받아쓰기하듯 적었다. '어느 공원에서 생긴 일'. 그렇게 자신의 삶의 한 순간을 채집하듯 종이 위에 콕 박아놓은 것이 잠시나마 여자를 안심시켰다. 옆자리의 아이는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고, 어디선가 깍깍 까마귀가 으름장을 놓듯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어머니도 딸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랬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래, 너 데리고 책방 간다면서 극장에 참 많이도 갔었지. 어머니는 붉혔던 얼굴 그대로 어느 새 꿈꾸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늦둥이였던 여자는 어린 시절 한때 어머니 치마폭에 매달려서 수도 없이 극장을 들락거렸다. 보채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여자는 깜깜한 극장,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울고 웃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 바람에 얼룩얼룩 낯설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더러는 어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서 눈물로 번득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때 어머니는 코앞에 앉은 딸이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어느 먼 곳에 가 있었다. 마치 화면 속의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의 얼굴 속 깊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듯, 어머니는 이미 여자의 어머니만이 아닌 무엇이었다. 어떻게 어머니 속에는 숲 속의 나무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숨어 있었을까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극장에 갈 때마다 집을 보는 식모나 다른 형제들에게 어머니는 책방에 다녀오마고 했다. 물론 여자는 책방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 집에서 멀지 않은 버스 종점 근처에 안경 쓴 할아버지가 점잖게 웃으며 어머니를 맞는 곳이 있었다. 어머니는 종종 그곳에 가서 촘촘한 글자들이 세로로 박힌 책들을 다섯 권, 열 권씩 빌려오곤 했다. 아버지로부터 '소설 나부랑이나 읽는다'는 핀잔을 받으면서도 어머니는 밤을 새워 그 책들을 읽곤 했다.
곧 소설 속의 소녀들은 헤어져 각자 다른 가정에 위탁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지만 괴물 지렁이는 그녀들의 기억과 환상과 리얼리티를 넘나들며 그녀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둘 다 어린 시절에 탐닉하며, 하나는 스토리텔러로, 다른 하나는 아동심리학자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엔 극장에 앉아 있으면서도 집에 가기 전에 그 할아버지에게 들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극장을 나서자 늦었다며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고, 가는 길에 만난 여자의 언니에게는 책방에 갔는데 빌릴 게 없어 그냥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바람에 아직 '극장'이란 낱말을 몰랐던 여자는 안경 쓴 할아버지에게 책을 빌리는 곳도 책방이요, 어머니가 얼룩얼룩한 얼굴로 울고 웃으며 이상한 숲처럼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아쉬운 듯 여자의 손목을 잡고 일어서는 깜깜한 곳도 책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그림책 속에 공주와 왕자와 거인이 살 듯, 어머니의 책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깜깜한 곳에 나타나 책 속에서처럼 울고 웃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성인이 된 소녀들은 각자 그 숲이 있는 고장을 다시 찾아갔다. 박물관으로 변한 어린 시절의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거대한 괴물지렁이에 대한 전설을 함께 읽고 다음 날 그 숲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그 시절 왜 그리도 영화에 탐닉했던 것일까. 무엇에 그리도 목이 말라 거짓말까지 하면서 극장을 들락거렸던 걸까. 철이 들어 그 깜깜한 곳이 극장이란 걸 깨달은 여자가 물어도 어머니는 그저, '널 식모에게 맡기기 싫어서'라고 말할 뿐이었다.
삐걱삐걱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여자는 잠시 어둠 속에 부옇게 떠 있는 자신의 빈 노트를 노려보다가 '거대한 지렁이'라고 휘갈겨 썼다. 무엇이든 써 놓지 않으면 자신이 어둠 속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잠을 자던 아이가 음, 음, 입맛을 다시며 돌아누웠다. 아직도 아이의 손에 들려있던 식빵봉지가 부스럭 소리를 냈다. 해는 이제 연못가 수풀 위에 한 뼘도 안 되는 자주색 띠로 남아 있을 뿐이어서 더 이상 책 속의 글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아이가 깨어나면 거위를 보여줄 텐데. 지난 주에도, 그 전에도 아이는 깜깜해지도록 잠을 깨지 않았으므로 여자는 책만 읽다가 어두운 공원을 나섰다. 그러니 거위를 보지 못한 아이는 어린 시절 여자가 극장과 책방을 혼동했듯, 거위를 낮잠을 자게 하는 상상 속의 새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거위에게 빵 조각을 나눠주듯 엄마에게 한 조각 시간을 던져주었다 생각하렴.
여자는 다시 책 속으로 눈을 돌리고 어둠 속을 더듬듯 남은 글자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글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으므로 소설 속에서 성인이 된 소녀들을 따라 숲 속을 헤매기 시작하였다. 나무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고, 곳곳에서 왠지 낯익은 꽃들이 이슬 젖은 몸을 부대껴왔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뼈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는 구덩이에 푹 발이 빠지기도 했다. 다람쥐를 따라 숲길을 따라, 나뭇가지를 따라 정처 없이 걸어보기도 했다. 그래도 숲에는 그녀들의 가슴처럼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거대한 괴물지렁이가 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여자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 아이가 깨어났다. 소설을 못 끝낸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침내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기뻐서 아직 꿈과 현실 사이에서 눈을 비비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연못가로 갔다. 어둑어둑 물결에 흔들리는 수풀 저편에서 허연 거위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고 있었다. 다 저녁 때 웬 성가신 방문객이냐는 듯 본척 만척 하던 거위들은 여자가 식빵 몇 조각을 던져주자, 멍하니 식빵을 들고 서 있는 아이의 손까지 집어먹을 듯 맹렬한 기세로 꽥꽥거리며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어 달아났고, 꽥꽥거리며 뒤쫓아오는 거위들에게 가지고 있던 식빵을 모두 팽개치듯 던져주고 말았다.
엄마는 거위가 무서워?
헐떡이며 뒤따라온 아이가 물었다.
거위는 무서운 거야?
글쎄, 고무장갑 낀 것 같은 넙적한 두 발로 뒤뚱뒤뚱 달려오는 그것들이 정말 무서웠던 걸까. 여자의 온몸이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덜덜 떨고 있었다. 아이와 그녀를 삼켜버릴 거대한 괴물지렁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어둠을 뚫고 뛰쳐나온 환상 같은 그것들의 꽥꽥거리는 아우성은 여자의 가슴을 아직도 거침없이 쪼아대고 있었다.
엄마, 또 파리, 파리?
여자는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집을 떠날 때처럼 서둘러 아이를 차에 태우고 어두워진 공원을 떠났다. 키 큰 나무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는 숲길은 참 길기도 했다.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환히 켜진 거리로 나서기까지 여자는 자꾸만 거울 속을 흘끔거렸다. 숲이, 어둠이, 아니 어둠 속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로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뾰족한 주둥이로 그녀가 알고 있는 현실의 스크린을 찢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작품 중에 인용된 소설은 A. S. Byatt의 "The Thing In The Forest" - The O. Henry Prize Stories 2003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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