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13 04:51

김혜령 조회 수:709 추천:92

쥐는 너무 빨랐다. 직감적으로 '저건 쥐'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쥐가 사라진 모퉁이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구멍 같은 건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직감은 물론 기억마저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보니 오로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쏟아지는 물줄기보다도 빨리 방을 가로지른 어둠덩어리를 본 것 같은 기억뿐이었다.
혹시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창문 쪽을 살펴보았지만 곧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잠도 덜 깬 채로 멱살을 잡힌 듯 끌려나갔다가 해질 무렵에야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그들의 집에서는 블라인드를 열어 햇빛을 들이는 것도 휴일에나 있을 수 있는 특별한 일에 속했던 것이다. 주중에는 어쩌다 좀 여유가 있는 날이라도 블라인드를 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블라인드에 달린 손잡이를 비틀거나 잡아당기는 일이 좀체 할 수 없는 큰 일로 느껴질 만큼 그녀는 무력한 기분이었고, 그럴수록 블라인드는 제 스스로 무게를 키워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암벽 같은 블라인드가 가로막고 있는 창안에서 새 그림자 같은 게 보였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전등에 나방이라도 붙었던 걸까? 그러나 전등은 파닥임은커녕, 지나간 파닥임의 증거로 먼지를 뿌리는 등의 어떤 미동도 없었고,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기분 나쁜 움직임이 어떤 곤충의 날갯짓과도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눈앞에 한 순간 먹물을 끼얹는 것 같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전등을 올려다보는 동안 제법 멋을 부려 만든 팔각형 유리 갓을 가로지른 굵은 거미줄을 세 개 발견했고, 그 중 한 면에 금이 가 있으며, 촛불모양으로 생긴 여덟 개의 전구 중 두 개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또 한번 성가시고 한심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스스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허겁지겁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고삐에 매달려 끌려 다니고 있다는 느낌.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의 그림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진정한 생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항상 뭔가를 추구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즘처럼 허위허위 생활의 파도에 묻히지 않으려고 허덕이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읽고 쓰고 사색하고 있어야 했다. 그녀가 일기라는 걸 썼던, 아 참으로 아득했던 그 때에는, 자아실현이며 성찰, 끊임없는 발전, 따위의 단어들을 즐겨 사용했었다. 그런 것들이 생의 참된 의미라고 믿었던 것이다. 시지프스라는 말도 때로 게으르고 무력하게 허물어지려는 자신에게 오금을 박듯 일기장 곳곳에 박아 놓았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쥐였을까? 나도 있고 아이도 있는, 환하게 불켜진 방을 가로지른 게 정말 쥐일 수가 있는 것일까? 그 시커먼 어둠이? 그녀는 쥐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후미진 곳에나 있어야 할 쥐 주제에 감히, 아이와 내가 앉아 놀고 있는 환한 거실을 지나가다니.
아마도 그녀는 꽤나 오랫동안 얼빠지고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나 보았다. 쥐가 (또는 그녀가 쥐라고 느꼈던 무엇이) 지나간 길을 등지고 앉아 놀던 아이가 몇 번이나 엄마, 왜, 왜, 하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나와주지를 않았다. 쥐를 본 것 같다고 말하면 아이가 놀랄 거라는 생각 때문에도 그랬지만, 쥐에게까지 무시당한 듯한 억울함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백주에 코 베어 간다더니. 그녀의 혀가 입안에서 구시렁대고 있었다. 뭔가 깨끗하고 소중한 것을 짓밟힌 기분이었다.

그는 오늘도 가게에까지 찾아와 준 전씨가 못내 고맙기만 했다. 역시 나는 인복이 있단 말야. 그는 그렇게 스스로 대견해하며, 가게를 둘러보는 전씨 뒤를 따라다니다가 벽에 걸린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슬쩍 슬쩍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자신의 얼굴 어디에 이렇게 천군만마 부럽지 않은 인복이 붙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처음 전씨에게 도움을 청할 때만해도 그는 전씨를 '인복'의 범주에까지 넣어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간단히 한 수 배우고 적당한 답례는 그때 가서 생각하리라 했던 것이었다.
기껏해야 종잇장 몇으로 끝날 걸 머리 싸매고 공부하며 지겨울 정도로 학교를 오래 다닌 덕에 뒤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그게 답답하고 못마땅해 조그만 베글샵(Bagel Shop)을 덜컥 샀을 때 그가 사업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정말 터럭만큼도 없었다. 대대로 월급쟁이며 선생들만 들끓는 샌님 집안에서 자란 그의 아내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내는 그가 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웠다는, 베글샵과는 별로 상관없는 사실과 그가 몇 번인가 들려준 시어머니의 젊은 시절 무용담을 바탕으로 혹시 그의 피에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사업가에게 필요한 용기나 배짱, 수완 따위에 마음을 기대고 있는 듯 했다.
처음 가게를 인수하고는 그런 대로 매상이 괜찮았다. 마침 날씨가 더워지고 해가 길어지는 만큼 씀씀이가 많아지는 계절이었고, 경기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전 주인이 막상 매매가 이루어질 때쯤 몇 번이나 마음이 흔들려 다시 주저앉으려 했다는 복덕방의 전언이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베글은 물론 금전등록기도 잘 다룰 줄 모르는 서툰 새 주인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에도 매상은 올라갔고, 덕분에 그는 비록 푼돈이지만 제법 묵직한 뭉칫돈을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함께 가슴을 쓸어 내리며 '직장에서 벗어나 사업하는 맛'을 즐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부터 여름내 기세 좋게 치솟던 매상도 한풀 꺾여버리고 말았다. 날씨래야 사계절 거기서 거기인 캘리포니아에서 달라질 것도 없으련만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소매업이 겪는 날씨의 변화는 만만치가 않았다. 평소 캘리포니아 날씨는 분위기도 낭만도 변화도 없다고 툴툴대던 아내도 얄팍해진 돈 봉투를 받으면서부터는 달력을 넘기는 눈매가 숙연해져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새로운 사업전략을 세워야 했고,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게 한참 인기를 더해 가는 '보바'라는 찰떡알갱이 같은 걸 넣은 음료였다. 아침나절에 하루 매상의 대부분이 끝나고 마는 베글가게에서 오후 매상을 챙기자면 음료수가 역시 가장 제격이라 싶었던 것이다. 두어 달 전 모처럼 아내와 장을 보러갔다가 매장 한구석을 차지한 음료수 가게에 써 붙인 '보바'를 보았을 때도 그는 저게 뭔가 했었다. 오죽하면 목이 말라 사 마시면서도, 점원에게 '보바'가 '바보'를 뒤집은 말장난이냐고 물었을까.
그때 앞이마가 훌떡 까진 전씨가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나서며 제법 그럴 듯한 설명을 했었다. 작은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벗겨진 정수리를 덮느라고 머리통의 이곳저곳에서 머리카락들을 억지로 끌어다 변통하는 바람에 전씨의 머리는 바람 많은 벼랑 끝의 헐벗은 소나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새카맣게 반짝이는 작은 두 눈이 꼭 어떤 동물을 연상시킨다고 그가 머리 속을 뒤적이는 동안에도 전씨는 '타피요카'라 불리는 원료에서부터 씹는 맛에 대해, 또 대만에서 시작된 그 음료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얼마나 빨리 퍼져가고 있는가에 대해 조근조근 늘어놓았고, 그들이 주문한 음료수 외에 몇 가지 샘플까지 더 내놓는 친절을 보였던 것이다. 입안으로 퍼지는 달고 시원하면서도 상큼한 과일 맛 사이로 '보바'를 씹는 맛이 쫄깃쫄깃 그의 의식에 달라붙었다.
그는 '보바' 판매를 계획하면서 이런저런 회사의 세일즈맨들이 들고 오는 샘플들을 맛보았지만 웬 일인지 아내와 함께 전씨 가게에서 처음 맛보았던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의 사정을 듣고 도와 드려야지요, 도와 드려야지요, 하며 반짝이는 대머리를 끄덕이던 전씨는 며칠을 끌며 헛걸음을 시키더니, 마침내 옥수수 알 같은 '보바' 원료가 빼곡이 든 작은 수첩 만한 샘플 봉지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간단해요. 밥 할 줄만 아시면 하실 수 있다니까. 그러면서도 주위를 의식하는지 자세한 설명은 피하는 눈치이더니, 그가 미진한 발길을 쉬이 떼어놓지 못하고 오랜 세월 학교에서 하던 버릇대로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는 식의 질문을 계속하자, 한쪽 눈을 찔끔거리며 말했다. 내 내일이나 모레, 그쪽 가게로 가리다. 그거 나도 학교 가서 수천 불 바치고 배운 사업 밑천인데, 여기 일하는 애들 귀도 있고.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떴지만, 그날도 사업차 라스베이거스까지 가야한다는 전씨가 하루 이틀 안에 그의 가게를 찾아 주리라고는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전씨는 이틀째 되는 날, 라스베이거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로 그의 가게를 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 날은 이런저런 과일까지 사들고 와서 생과일로 음료 만드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일주일의 연습기간을 거친 후 그는 전씨의 조언대로 현수막을 만들어 가게 간판 위에 내걸고 '보바' 판매를 시작했고, 매상은 조금씩 다시 오르는 듯 싶었다. 그는 공부하던 시절의 집요함을 버리지 않고 '보바'라는 음료에 관해 의문 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전씨에게 전화를 하거나 찾아갔고, 차츰 사업 전반에 대한 의견도 주고받게 되었다.
그가 알게 된 바로 전씨는 전에 그도 이럭저럭 연이 닿아 알짜임을 알고 있는 LA 한인타운의 유명 한식집에서 주방장을 지냈고, 지금은 라스베이거스에 또 다른 '보바'전문점을 내려는 참이었다. 전씨의 두 형들은 근방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고, 삼 형제 모두 지금은 다 털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소일거리 삼아 김치공장에나 다니고 있는 모친의 식품점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했다. 전씨는 그에게 사업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는 역시 한 수 위인 전씨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좀더 일찍 시작할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듯 여기저기 골이 깊게 패인 전씨의 얼굴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범하게 돕고 사는 사업가들의 인품 앞에 쩨쩨하게 한푼 두 푼을 따지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가 숙여지고, 새삼 동족간의 의리에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이었다.
전씨의 비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보바' 음료의 고정손님들이 생기고 판매가 자리를 잡아갈 즈음 그가 전씨에게 원료의 공급처를 물었지만, 전씨는 한입 가득 사람 좋은 미소를 비누거품처럼 문 입으로 말했다. 에이, 그 정도 물량 가지고는 따로 사려고 애쓰지 말아요. 그냥 내 걸 조금씩 떼어다 쓰는 게 싸게 먹히지. 그가 그래도 되겠느냐고 되묻자, 전씨는 지나가는 말인 듯 슬쩍 내뱉었다. 정 그러시면, 나중에 기회 봐서 그 집에 많은 커피 원두나 좀 나눠주시던가, 베글 만드는 방법이나 좀 가르쳐 주시던가. 마치 미안하고 고마워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조금이라도 홀가분하게 해주려는 의도일 뿐이라는 듯 전씨는 대수롭잖다는 말투였다.
그래서 그는 전씨에게서 필요한 재료를 공급받는 대신 전씨가 원하는 물건들을 꼬박꼬박 가져다주었고, 가게를 재정비하면서 쓰지 않게 된 약간의 장비들도 가져다주었다. 전씨에게 공급받는 재료의 물량이 조금씩 커지면서 수표를 써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물론 그였다. 그것도 전씨는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면서 손사래를 치는 걸, 그가 억지로 떠맡기다 시피 한 것이었다. 그가 수표를 쓰는 동안에도 전씨는 여전히 됐다고, 됐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수령자로 기입할 정확한 사업체의 이름을 물어도 무슨 생각에 열중했는지 유난히 작고 얇은 콧날개만 발름거릴 뿐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기가 써넣을 테니 걱정 말라고만 했다.

아악, 쥐, 쥐. 아악, 마우스, 마미.
아이가 한국어로 영어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을 때 그녀는 심장이 쿵 부엌바닥에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지난 번 쥐를 보고 난 뒤 그녀는 자신에게 그건 쥐가 아니라고,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 거라고 최면을 걸고 있었다. 물론 밝은 방안에서 그녀의 눈앞을 '기분 나쁘게 스쳐간 동물적인 검은 것'이 있었음은 그녀의 의식이 아무리 부인해도 빳빳하게 굳어졌던 몸과 쿵쿵거리던 가슴이 다 아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던 만큼 누군가 웃으며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했었다.
그날도 그래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지만, 가게 일에 넋을 내놓고 사는 남편이 태연한 어조로 그래애? 그럼 어떻게 하나, 내가 이따 쥐약을 사갈까, 덫을 사갈까, 묻는 바람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쥐를 혼자 목격한 억울함을 폭발시키며 화산 같은 분통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뭐? 세 살 짜리 아이가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집안에 쥐약을 놓겠다고? 쥐덫을 놓아? 그녀는 마치 당장 제 눈앞에 아이가 쥐약을 먹고 쓰러졌거나 쥐덫에 죄 없이 곱고 연약한 발이 걸려 피를 흘리며 울고 있기라고 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모두 무심한 그의 죄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이 야속해서 기름을 끼얹은 불길처럼 시뻘겋게 타올랐었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그럼 어쩌지? 하고 멋모르고 한 마디 더 했다가 그녀의 심상치 않은 숨소리를 느끼고는 얼른 말을 거두어 거두절미 '괜찮아, 괜찮아'만 되풀이했고, 제풀에 김이 빠진 그녀는 '몰라, 몰라, 어쩌면 쥐가 아닐지도,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모르지 뭐' 라는 엉거주춤한 말로 엉켜버린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었다.
다행히 그 후로 두어 달이 지나도록 쥐의 흔적은 그녀의 눈에 띄지 않았고, 잊혀져 갔으며, 그녀 기억 속의 '기분 나쁜 검은 것'도 '쥐'라는 단어와의 연관성을 잃어갔기에 조금만 더 최면을 계속하면 '기분 나쁜'이라는 수식어도 사라질 터였다. 요즘은 어쩌다가 그 '검은 것'이 기억의 표면에 떠올라도 '그렇담, 과연 그게 뭐였을까?'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쥐라니!
그녀는 설거지하던 손을 대충 앞치마에 문지르고 아이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저기, 저어기. 아이가 가리키는 거실 한복판엔 TV가 놓여 있었고, 요즘 아이가 즐겨보는 비디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 쥐가 어디로 갔냐니까. 재차 다그쳐 물었지만,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TV뿐이었고, 그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쥐의 흔적도 쥐가 숨을 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쥐였어? 에이, 미키마우스? 아이가 보고 있던 건 미키마우스 비디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쥐야? 응.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얼굴은 흥분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아주 신나고 재미난 일이었다는 듯 눈망울엔 웃음이 폭죽처럼 반짝반짝 터져 오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어떻게 내 속을 알고 장난을 하는가 싶어, '늑대와 소년' 얘기를 꺼낼까,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들을까 생각하는데, 아이가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저 봐, 엄마, 쥐, 쥐, 기차 속에. 아이가 보던 비디오는 기차얘기였고, 그 속에 쥐가 있었으며, 연주여행을 가던 콜로라투라가 그걸 보고 그 좋은 목청으로 아악,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기차가 지나던 소도시의 유리창들이 모두 산산조각 깨졌다는 얘기였다. 아이가 TV를 볼 때면 그녀는 그 기회를 이용해 밥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한창 바쁜 시간이었으므로 비디오를 사주고도 몇 달이 지나도록 자세한 내용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녀가 그 기억 속의 '검은 것'과 마주치기 전에도 아이는 몇 번인가 마우스, 마우스, 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았다. 그땐 이 녀석이 어디서 그새 마우스란 말을 배웠을까 기특하게 생각했고, 혹시라도 제 아버지 가게에 가서 그러다 오해받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생각 정도나 했었다.
원, 싱거운 녀석 같으니. 흥흥 웃고 보니, 한결 위안이 되는 듯 했다. 자신이 본 그 '검은 것'도 아이가 보았다는 '쥐'와 같은 부류일 수 있다는, 아마 그럴 거라는 생각이 그 순간에는 꽤나 참신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쩌면 아이가 비디오를 볼 때 옆에서 흘려들은 '마우스' 라는 말이 잠재의식 속에 숨었다가 요술을 부렸는지도 모르지. 그러자 의식의 흐름이며 나아가 집단무의식, 신화 따위의 기억의 골방에 처박아 두었던 단어들이 차례로 떠올랐고, 자신이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그런 것들에 푹 빠져 지내던 때로부터 무심한 세월을 타고 너무 멀리 떠나온 것 같아 또다시 억울하고 무력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설거지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녀의 가슴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소리친 '마우스' 중에 몇은 TV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짜 쥐가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늑대'를 외치던 소년에게도 한 마리의 늑대는 진짜였으니까. 이제 그녀는 검은 몸뚱이 밑으로 가느다란 분홍빛 다리를 하고 작고 새카만 눈을 반짝이며 코를 발름발름 먹을 것을 찾는 쥐를 꼭 바로 눈앞에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쥐에게 함부로 짓밟히고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전씨의 아이디어를 곱씹으면서 무릎을 쳤다. 전씨는 최근에는 커피전문점도 햄버거가게처럼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면서 사먹을 수 있는 '두라이부 쑤루(Drive Through)'로 만드는 게 새로운 추세라면서, 우리는 거기 한 술 더 떠서 날로 수요가 늘어가는 보바와 과일음료, 게다가 아침 손님들이 즐겨 찾는 베글과 커피를 '두라이부 쑤루'로 팔아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과연 전씨는 업계의 동향을 앞서가는 베테랑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방면에 전문가인 당신과 내가 동업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전씨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한편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멋모르고 베글가게를 인수한지 넉 달만에 들은 전문가라는 말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어쩐지 명치 근처 어디쯤,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내부의 한 부분이 견딜 수 없이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그래서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사업가답게 냉정해지자고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다시 생각해보았지만 아이디어만은 탓할 게 없지 싶었다.
다만 전씨가 말하는 장소가 그에겐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임대료가 싸다지만 라스베이거스라니. 하긴 전씨처럼 일주일이 멀다고 오가는 사람에겐 그깟 네 시간 드라이브쯤은 별 게 아닌지도 몰랐다. 며칠 전에도 전씨는 딸래미 다섯 살 생일이라며 털털거리는 고물차를 몰고 라스베이거스로 달려갔던 것이다. 전씨는 그냥 한번 밟으면 엘에이고, 또 한번 더 밟으면 라스베이거스지요, 뭐, 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전씨의 아내와 두 딸과 아들은 그의 모친과 함께 모두 라스베이거스에 사는 모양이었고, 그래서 차츰 사업체도 그쪽으로 옮겨가려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라스베이거스라니. 장거리운전이라면 질색을 하는 그에겐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한 몸 편하자고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닌가 싶어 자신의 사업가로서의 자질과 가장으로서의 책임 따위를 모두 한 데 꺼내놓고 이리저리 자신을 굴리며 호되게 비판을 해보기도 했지만, 왕복 여덟 시간의 사막길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졌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수단으로 아내에게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떠보기는 했었다. 미국생활 이십 년에 라스베이거스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그녀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아니, 거절했다기보다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어머, 자긴 그런 데 가서 살고 싶어? 라스베이거스를 밤낮 술이나 퍼먹고 도박이나 하는 환락의 도시라고 못박아 생각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곳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살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고, 그런 걸 묻는 그가 무척이나 이상하고 낯설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런 아내를 더 이상 설득하고 싶은 의욕도 나지 않아서 그 일은 아쉬운 대로 접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전씨를 찾아갔다. 다 떨어져 가는 '보바' 재료도 얻을 겸, 몇 주 전부터 전씨가 소개해 준다면서 미루어온 냉장고 업자에 대한 정보도 알 겸해서였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던 전씨는 마침 일찍 가게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는지 실내등을 꺼놓은 채로 남은 손님에게 음료를 내주고 있었다. 전에 '우리 교회 권사님'이라고 소개하던 중년의 점원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손님이 가기를 기다려 우선 '보바' 재료를 달라고 부탁했는데, 전씨는 가게 안쪽을 흘끔거리며 잠깐 기다리라고만 했다. 안에 누가 있나, 무슨 일인가 생각하는데, 안에서 나던 물소리가 그치고 키가 작고 똥똥한 여자 하나가 구르듯 튀어 나왔다. 전씨가 재빨리 '우리 집사람'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악'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을 것이다. 여자는 터질 듯한 청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크고 넓적한 얼굴까지 온통 새빨갛게 칠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여자의 한쪽 눈 밑에는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하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월드컵 열기로 시뻘겋게 달아 있는 시절이긴 했다. 여자는 놀란 입을 막으며 인사하는 그를 째리듯 훑어보고는 다짜고짜 전씨에게 짜증을 부렸다. 자기 때문에 또 늦었잖아. 벌써 갔어야 제대로 자리잡고 월드컵이고 뭐고 볼 텐데, 여태 이런 작자나 상대하고 있으니...... 끝말은 들릴 듯 말 듯 흐렸으나 그의 귀엔 들리지 않았으면 싶을 만큼 선명했다.
당황한 전씨가 눈을 내리깔며, 차 열쇠 주쇼, 내가 바로 실어드리리다, 하고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다면 그도 처신을 어찌해야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돌아선 여자의 뒤통수에 일갈의 시선을 던지고 돌아서던 그는 또 다시 여자의 구시렁대는 목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저 치는 빨간 티도 하나 없나? 대체 어디서 떨어진 사람이야, 허여멀건하게 생겨 가지고, 잘난 척 흰 놈들 상대로 영어 씨부렁거려 벌어먹으면서도 아쉬운 건 동족한테 얻어간단 말이지. 그는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 그 순간의 그는 빨간 티셔츠도 페인트도 필요 없는 붉은 악마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전씨를 따라 저녁바람을 맞으며 주차장에 들어설 즈음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뻔히 들었을 텐 데도 사과도 언급도 없는 전씨가 낯설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당황하고 창피해서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야속했다. 역시 저 사람과 나는 넘을 수 없는 골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학생시절 어머니가 사다 주는 대로 좋은 옷 입고 고시공부 한다고 도서관에만 들락거리던 그에게 쏟아지던 '부르주아'라는 지탄의 말이 새삼 가슴 한구석을 콕 쪼았다. 그 시절에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하며 섭렵했던 책들 속의 이름들, 체계바라, 마르크스, 엥겔스 ...... 그러다가 로자 룩셈부르크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어느 방향으로 밀어도 금방 일어서는 오뚜기 같았던 전씨 부인의 몸매가 생각나서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넘어뜨려도,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서는 동족의 고달픈 삶이 되바라진 그 여자의 똥똥한 몸을 통해 발현된 듯한 착각과 함께 알지도 못하는 그녀의 삶에 대한 어줍잖은 연민이 가슴 한구석을 채웠던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아내와 합동작전으로 기차비디오를 더 보겠다는 아이를 달래고 어르고 조금은 윽박지르기까지 해서 일찍 재운 다음,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가며 월드컵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처음엔 아이 깬다고 타박을 주던 아내도 후반전에 들면서부터는 드높은 목소리로 합세하는 바람에 그는 몇 번이나 아이가 자는 침실 쪽을 훔쳐봐야 했다. 4강 진출을 확인하고 환호하는 붉은 물결을 바라보면서 맥주병을 딸 때 그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아내는 아예 목을 놓아 엉엉 울고 있었다.
냉장고를 뒤져 없는 안주를 만들어 먹으면서 그들은 못하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새벽을 맞았다. 아내는 아이가 보는 기차비디오 얘기를 하더니 갑자기 무의식과 융과 쥐 얘기를 했고, 그는 전씨와 그의 오뚜기 부인 얘기를 하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계급의 상속과 유전이 어떻다고 기억 창고의 먼지를 후후 불어내며 떠들어댔다. 당신 아이 물건에 그려 넣지 못해 안달하는 귀여운 미키마우스도 쥐라는 걸 잊지 마라. 월트 디즈니가 가난한 시절을 쥐와 함께 살았기에 오늘날의 대기업 디즈니가 있는 것이거니와, 쥐도 우리처럼 새끼 낳아 잘 먹이며 살고 싶어하는 생물임에는 다름이 없다...... 체계바라도 마지막으로는 미망인이 될 아내에게 좋은 남자 만나 부디 잘 살라는 말을 남겼고, 로자 룩셈부르크도 모든 사회정치혁명 서적을 제쳐놓고 안나 카레리나를 추천도서로 꼽았다더라. 그러므로, 아아 그러므로, 역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를 몇 번이나 꼬옥 안아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가슴에 남은 말들이 더 있는 것 같아 꾹꾹 참으며 결론 없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횡설수설하는 중에도 술기운에 살짝 풀어진 아내의 눈동자가 가끔 놀란 듯 불꺼진 집안의 구석구석을 흘끔거리는 것이 조금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그는 그렇게 아내와 마주앉아 생각나는 대로 떠들 수 있는 그 자리를 떠나기가 싫었다. 전씨와 그의 부인에 대한 자신의 너그러운 태도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기분 나쁜 찬바람이 지나간 듯 허전하고 서늘했다.

개수대 밑에서 세제를 꺼내려다가 그녀는 꽝 소리가 나도록 캐비넷 문짝을 닫아버렸다. 가슴이 북소리를 내며 쿵쿵 뛰었다. 오래 쓰지 않던 세제 옆에 뿌려져 있던 까만 그것. 검정 깨 같은 그것을 처음 발견한 순간의 직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높직한 찬장 선반에 놓여 있는 검정깨병에서 깨가 쏟아져 개수대 밑 캐비넷 깊은 구석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내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혹시 남편이 꺼내 쓰지는 않았나, 잘 쓰지도 않는 검정깨병이 잘 닫혀 있나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부터 그녀의 귀를 맴돌던 친정아버지의 목소리는 지워지지 않고 자꾸만 또렷하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글쎄, 꼭 쥐똥 같다니까. 아버지는 외할머니가 드시는 수많은 약들을 종종 그렇게 짓궂게 일컫곤 했다. 신경통에 소화불량에 고혈압에 약간의 노이로제 증상까지 보이던 할머니는 쥐똥, 염소똥, 또 무슨무슨 똥 같은 약을 차례로 드신 후에야 정상가동이 가능했다. 유난히도 사교생활을 즐겼던 할머니는 뉘 집 혼사, 돌잔치와 회갑연을 빠지지 않고 일일이 돌아와서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아 터질 듯 빵빵한 핸드백을 뒤져 고무줄로 묶어놓은 약병들을 꺼냈다. 누구야, 물 떠와라, 하고 부엌을 향해 분부를 내리신 다음에는 하얀 종이 위에 이런 저런 알약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으셨다. 약을 꿀꺽꿀꺽 다 드신 다음, 벗겨지지 않는 버선을 끙끙 소리내어 뒤로 나동그라지듯 벗고, 치마도 훌렁 벗어 벽에 걸고는, 속치마 바람으로 목침을 찾아 아랫목에 벌렁 누우실 때 할머니는 예외 없이 '에구 대리야' 하셨고 그것을 신호로 그녀의 고역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누구야, 대리 좀 밟아라. 그때가 몇 살 때였던가. 그녀는 모로 누운 할머니 다리를 밟으면서 하나부터 백까지 셌는데 어쩌다가 숫자를 더듬거나 건너뛰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부터 다시 세라는 분부가 떨어졌다. 겨우 내려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져 할머니의 다리를 내려올 때면 험준한 산등성을 타고 내려온 듯한 피로감에 온몸이 나른했었다. 할머니는 그런 그녀의 어깨에 허리가 휘청거리도록 무거운 당신의 다리를 얹어 놓으시며 내 새끼, 내 새끼 하셨는데, 그러다가 한숨을 몇 번 쉬고는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당겨 앉는 것이었다. 할머니 한도박(핸드백) 좀 가져오련. 거기서 할머니가 집어내던 배가 불룩한 수첩과 그것도 모자라 그 수첩에 고무줄로 결박지은 귀퉁이가 나달나달 해진 종이뭉치에는 전화번호와 이름들이 앞뒤로 가득가득 적혀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에게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마루로 뛰어나갔지만 할머니의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누구누구씨, 안녕허셨어요? 영감님도 여전허시지요? 지난 번 막내따님 혼사에서 뵙고...... 할머니의 전화는 늘 깍듯하고 인정이 철철 넘치는 것이었는데, 예외 없이 후렴처럼 들어가는 구절이 있었다. 에구, 그 딱한 사정 누가 모르나. 그래도 내 사정도 만만찮은 걸. 어떻게 좀 해봐줘요. 벌써 석 달이야, 석 달. 내 부탁하리다. 에휴, 나무아비타불.
그것이 이런저런 핑계로 일찌감치 일손을 놓고 할머니만 바라보고 있던 외삼촌의 올망졸망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방법이라는 걸 어린 그녀가 알았을 리가 없었다. 때로는 그래도 쉬이 버릴 수 없는 한창 시절의 남은 허세로, 아니, 당장 굶어서가 아니라 먹성 좋은 손주 녀석들 고기라도 한 점 더 사주고 싶어서 그러지, 하며 군말을 덧붙이기도 하셨으니까.
그렇게 할머니의 통통 부은 손가락 밑에서 수 없이 돌아가던 전화 다이얼을 따라 기억을 돌고 돌다가 그녀는 난데없이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에이, 어디 비유를 하실 것이 없으셔서, 하필이면......
생각할수록 하얀 종이 위에 놓여 있던 할머니의 알약과 그녀가 개수대 밑에서 발견한 그것의 유사성은 여실했다. 그녀는 쥐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든 자신의 기억이 견딜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전씨와의 관계는 그 후로도 별 다름 없이 이어져 갔다. 그는 계속 전씨에게서 물건을 샀고, 때로는 물물교환을 하고 때로는 수령인이 적히지 않은 수표를 써주었으며, 사업과 어린 자식들에 대한 사소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그에게 보이는 전씨의 태도는 그저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 두고 두고 사업가의 의리를 보여주리다, 하는 듯 변함이 없었다.
겨울이 되면서 가게에 들려도 전씨가 없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날이 많아졌는데, 대부분 새로 내는 점포에 가 있었다는 거였다. 그 때문에 재료를 구입하는 데 더러 애를 먹긴 했지만, 그 때마다 전씨는 물건값을 엄청 깎아주거나 뭉턱뭉턱 덤을 주는 식인 데다가, 어차피 겨울이라 찬 음료를 찾는 손님이 줄어들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일주일쯤 보지 못한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진 전씨가 그에게 자본만이라도 동업을 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그만한 자금능력도 없었거니와 스스로 경영에 참여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일에는 투자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에 아쉽고 미안한 대로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씨는 그런 그를 앞에 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놈의 점포공사가 길어져서 말이오...... 데자인을 좀 팬씨허게 했거든. 가게만 열면 몫은 그만인데, 예상보다 돈도 시간도 많이 들어가네. 여기 관리가 소홀해지니까 여긴 여기대로 매상이 떨어지고...... 하며 한숨을 쉬었다.
전씨가 그에게 돈 얘기를 꺼낸 것은 그런 얘기가 서너 차례 오고 간 뒤였다. 이제 점포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러 개업날짜 잡는 일만 남았는데 급히 쓸 일이 있어서 그러니 딱 삼천 불만 빌려줄 수 없겠느냐는 거였다. 마침 전에 가져간 물건값 삼백 불을 주어야 할 차례였는데, 전씨는 그건 천천히 받아도 되니까 급한 불이나 끄고 보자면서 넉넉히 잡아 스무 날 정도면 이자까지 섭섭하지 않게 쳐주겠노라고 했다. 허허, 글쎄 소매라는 게 이렇게 빡빡하게 돌아간다는 거 이젠 형씨도 알만하지 않수. 전씨는 처음엔 민망한 듯 붉어지던 얼굴에 어느 새 달관한 듯한 너털웃음을 띄우더니 끝에는 슬쩍 눈웃음까지 매달았다. 하긴 형씨도 햇병아리 벌이에 뭐 남는 게 있었을 라구.
입술 사이로 흘려보낸 그 마지막 말 때문이었을까, 동업을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밤낮 동분서주하며 얼굴이 더 까맣게 상한 전씨를 측은히 여겨 무언가 갚아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 분에 넘치는 인복에 상응하는 덕을 베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노는 돈 돌려 이자를 받고 싶은 단순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는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 계주 노릇을 하면서 일수놀이로 두 형제를 악착같이 키워낸 어머니를 기억했고, 동시에 돈을 위해 일하지 말라, 돈이 당신을 위해 일하게 하라는 말도 떠올렸다. 어쨌건 사업에 손을 댄 첫 해 수입이 예상 밖으로 짭짤했던 것이 탈이라면 탈이었다.
삼천 불을 빌려주기로 한 날 그는 전씨 앞으로 쓴 수표와 함께 차용증서를 써 가지고 갔다. 전씨는 그가 내미는 차용증서를 보는 순간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먹물 먹은 사람이라 다르시구만. 하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돈 문제는 확실히 해두는 게 좋지요. 다만 전씨는 처음 스무 날이라고 했던 기간을 만약을 위해 한 달로 늘려줄 것을 요구했고, 이자로 200불을 붙여 갚겠다고 했다. 둘이 번갈아 서명을 하고 돌아서 나오면서도 그는 행여나 자신이 야박했다는 생각이 들까봐 스스로 마음을 단속하고 있었다. 전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그가 다시 돌아서서 전씨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몰랐다.
차에 타려는 그를 불러 세운 전씨는 수표에 쓰여진 이름은 자신의 가명일 뿐 법적 이름이 아니니 수표를 다시 써 달라고 했다. 후에, 그쯤에서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대와의 거래는 그만 두었어야 한다고 그는 두고두고 생각했지만, 그날 그는 무엇에 씌었는지 전씨에게 실례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그는 수표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으모 집까지 가기도 번거로워 근처의 직장에 있는 아내에게 가기로 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워낙 급해서 그런다 면서 아내의 직장까지 함께 따라간 전씨는 빙 둘러선 건물들을 휘둘러보며, 마치 그것이 바로 그와 아내의 재산이기라도 한 양, 좋겠시다, 형씨는 걱정 없겠구려, 하며 그의 등을 아프도록 철썩 쳤다. 빈정거리는 듯한 전씨의 말투에 언뜻 오뚜기 생각이 났지만, 자기 말대로 못 배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한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래봐야 월급쟁이가 별 수 있나요, 하는 말로 받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이제 집안 곳곳에서 쥐똥을 보았고 쥐 소리를 듣게 되었다. 식탁 밑에 떨어진 김 부스러기며 아이가 먹다 흘린 초콜릿 조각, 동그랗게 뭉쳐진 까만 실밥이건 무엇이건 간에 까맣고 조그만 것이면 팔에 소름을 돋우며 질색을 했다. 바닥에 뒹굴며 노는 아이 몸에 닿기 전에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다가설 때마다 근시인 자기 눈을 탓하면서도, 그녀는 번번이 속고 번번이 질색을 하면서 상상 속에서 점점 더 크고 얄밉고 뻔뻔스러우리 만치 징그러운 쥐를 키워냈다. 25전 짜리 동전 만한 구멍이면 쥐가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집안의 모든 모퉁이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게 되었고, 어둔 모퉁이에 시선이 멎는 순간마다 그 속으로 쥐꼬리가 막 사라진 듯 했으며, 집안은 곧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양 옆집이 붙은 연립주택에 살았는데 남편이 늦는 밤이면, 조그만 소리에도 아이는 아빠라고 눈을 빛냈고, 그녀는 쥐라고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집안의 모든 음식물들은 풀 때마다 짜증이 날 만큼 겹겹이 싸놓았고, 혹시 쥐가 지나갔을 까봐 식기들도 소독해가며 씻고 또 씻어 썼다. 뿐만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생각에 독한 마음을 먹고 쥐덫과 쥐약까지도 구했지만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놓았다가 아이가 깨기 전에 치워야 했으므로 그녀의 신경은 늘 잠들지 못하고 곤두서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텼지만 쥐는 잡히지 않았고, 밤이면 보이지 않는 쥐가 어디선가 갉작 갉작 그녀의 정신을 긁어댔다.
처녀시절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보모로 일했다는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선교사에게 간밤 잘 잤느냐고 물었더니, 잘몬 자서요, 천장에서 쥐님이 오셔다 가셔다 하셔서요, 하더라 면서 할머니는 옆에 앉은 그녀의 등을 철썩철썩 치며 웃었었다.
몇 번이나 꿔준 돈을 떼이고 몸져누웠던 할머니의 말년은 초라했다. 당신의 돈은 거의 다 날려버렸고, 며느리에게 이혼 당한 무능했던 아들마저 일찍 저 세상으로 앞세우고 난 뒤, 할머니는 생활이 빡빡한 두 딸의 집을 오가면서 어설픈 병치레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새벽에 어디선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면 옆방에서 주무시던 할머니였다. 나 물 좀 다구. 요강 좀....... 등등의 말을 하다가 언뜻 정신이 든 듯이 눈을 반짝이며 묻곤 했다. 그런데 넌 누구냐. 묘하게 억울한 기분으로 누구라고 말씀드리고 나면, 자식들과 손주들 이름을 줄줄이 외면서, 난 또 누군가 했지, 누군가 했지, 했고, 그러다가는 또 생각난 듯, 핵교는 졸업했냐, 물으셨다. 학교라니요, 중학교요, 고등학교요? 하고 물으면 여핵교지 무슨 핵교는 무슨 핵교야, 하시며 되묻는 그녀를 오히려 타박하셨다. 그렇게 한참을 타임머쉰을 타고 기억을 헤매는 할머니가 성가셔 못들은 척 돌아설라치면 언제나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는 말씀이 있었다. 에그, 이쁘기도 해라, 내 새끼, 배고프쟈?
누가 그렇게 배가 고팠던 걸까? 누가 그렇게 배가 고프리라고 할머니는 믿었던 것일까? 무얼 그렇게 먹이고 싶으셔서 불편한 몸을 끌고 수없이 속으며, 이번만은 속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이며, 동분서주하셨던 걸까? 할머니의 기억으로부터 그녀의 몸으로 옮겨온 근원을 모를 시장기는 곧 갉작 갉작 그녀의 내장과 신경을 긁었고, 마침내는 온 집안을 쏘다니면서 겹겹이 싸놓은 음식물을 풀어헤쳤다.

약속한 날짜에서 사흘이 지났을 때, 그는 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통화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연결이 된 전씨는 사소한 장난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허허 웃으면서, 지금 바빠서 길게 말 못하는데 내 다음 주에 해줄게, 했다. 그 다음 주가 되었을 때는 수표를 마누라에게 받아 와야하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까지 가야한다면서 말끝을 흐렸다.
어쨌건 약속 날짜에서 두 주가 지난 뒤에 이자까지 합친 삼천 이백 불 짜리 수표를 받았으므로 그는 그 동안 조렸던 마음을 풀고 아내에게 은행에 입금하라고 한달 반만에 저절로 액수가 불어난 수표를 의기양양하게 전할 수 있었다.
삼 주 후에 가게에 있는 그에게 아내가 벌벌 떠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을 때도 그는 에이, 그 친구 정신 꽤나 없군, 하고 제법 여유 있게 받았다. 전씨의 수표가 현금부족으로 돌아왔고, 그 바람에 전씨의 수표를 입금하고 아내가 발행한 수표들이 줄줄이 부도가 났다는 것이었다. 내 그 친구한테 가서 다시 받아오면 되지 뭐, 장사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그는 별일 아닌 듯이 아내에게 말했지만, 평생 부도라는 건 상상도 못하고 살아온 아내는 펄펄 뛰고 있었다. 그 사람 때문에 벌금만 얼만 줄 알아? 게다가 우리 신용은 또 뭐가 되는 거야? 벌금고지서 다 내게 줘. 그것까지 다 받아내야지, 뭐. 그는 전씨가 괘씸했지만, 아내를 달래느라 발딱발딱 일어서려는 자신의 감정을 아직은 꾹꾹 눌러두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아, 그 구좌를 얼마 전에 닫은 거라...... 난 또 벌써 입금하고 꺼내 간 줄 알았죠. 전씨는 태연했다. 어쨌건 그 때문에 물게 된 벌금까지 계산해 줘야겠다는 그의 말에 전씨는 그럼요, 그럼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게 바로 다시 써주겠다던 전씨의 수표는 이번에도 마누라에게 받아야했고, 라스베이거스에 있다는 마누라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그래서 잡으러 가야한다는 둥,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다시 보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그 날은 마음먹고 아침부터 전씨의 가게로 찾아갔지만, 전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며가며 얼굴을 익힌, 전씨가 나가는 교회 권사라는 점원으로부터 며칠째 가게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고, 라스베이거스에 새로 낸다는 가게는 금시초문이라는 말도 들었으며, 그 가게의 주인은 전씨가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전씨로부터 재료를 구입하고 건네주었던 돈은 모두 전씨가 주인 몰래 가게 물건을 팔아 챙긴 것이었다. 전씨가 부도를 낸 수표의 구좌는 전씨 말대로 없어진 지 오래였고, 그 수표에 적힌 주소도 어느 옛날의 거주지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의미가 없는 거였다. 물론 전씨의 핸드폰도 끊어져 있었다. 전씨는 그의 현실에서 요술을 부리듯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보니 그는 전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전씨와의 만남은 늘 전씨의 가게를 근거로 이루어졌던 것인데 전씨가 그 가게의 주인이 아니고 보니 그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씨의 자동차 번호도 적어둔 바가 없었고, 운전면허 번호 역시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전씨가 서명한 차용증서가 있긴 했지만 공증인이 없었을 뿐더러 고소를 해도 소장을 보낼 주소가 없으니 억울한 기념품이나 될까, 별 쓸모 없는 종이쪽지일 뿐이었다.
그는 며칠을 들락거리며 캐물은 끝에 겨우 세탁소를 한다는 전씨 형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전씨 형수와 친구이기도 하다는 점원은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전화번호를 알려주긴 했지만, 눈치가 보이는지 더 이상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며칠만에 전씨 형과 통화가 이루어져서 사정을 말하자 전씨 형은 오히려 그를 나무랐다. 아, 그러기에, 왜, 뭘 안다고 돈을 꾸어줘요? 난 동생이라도 돈 안 꾸어줘요. 당신네만 당한 게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책임이 있소? 내가 댁더러 돈 꿔주라고 보증이라도 섰오? 우리 어머니요? 공장 다니는 불쌍한 노인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당신네 돈까지 다 갚아주겠소? 부도가 나서 신용이 떨어졌다고요? 처음 사기 당해 보고 놀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우리 어머니, 형제들 다 그놈 때문에 신용 엉망된 지 오래예요. 나도 그놈 지금 어딨는지 몰라요. 사과는커녕 오히려 호통을 치며 화를 내더니, 그래도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혹시라도 연락이 닿으면 그의 것만이라도 꼭 돌려주라고 말은 전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통화에서 전씨의 형은 사적인 일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전씨가 요즘 집안에 큰일이 터져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누굴 잡으러 다닌다는 말을 했고, 또 전씨가 막노동판으로 나섰다는 말도 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것만은 꼭 해주겠다 하더라는 말도 했다. 그를 달래서 입을 막으려는 수작이겠거니 싶으면서도 당사자도 아닌 형을 붙잡고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그는 법률사무소며 은행, 무슨무슨 상담센터에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며 호소해봤지만 별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삼천 불이란 금액은 잊어버리기엔 억울하고, 찾으려고 발벗고 나서기엔 자칫 손해가 더 커질 수도 있는 액수였다. 돌이켜보면, 고국에서 어머니가 보내주는 돈으로 살았던 유학생 시절에는 교육비라는 명목으로 그깟 삼천 불쯤 별 생각도 없이 써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말썽 많은 점원 아이들과 하루하루 씨름해가며 직접 베글 하나 하나를 굽고 음료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지금, 어머니가 그때 그 돈을 어떻게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을까를 생각하니, 그의 억울함은 어머니의 몫까지 합쳐 순식간에 삼천 불의 몇 배로 불어나는 것이었다.
며칠 고심 끝에 다시 전씨의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어려우면 매달 백불 씩이라도 갚으라고 하시오. 이번 달 말까지 내게 연락을 해주거나 백 불이라도 보내주면 내가 믿고 기다리리다. 아니면 나도 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더 있겠...... 알았으니 내게 더 이상 전화하지 마시오. 딸깍. 무얼 근거로 믿었는지는 몰라도 믿었던 사람에게 속고 싶지 않다는 그의 안간힘과 자신만은 속을 수 없다는 자존심을 한껏 비웃듯 전화는 그렇게 매정하게 끊겨버렸다.
분한 생각 같아서는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전씨의 얼굴을 지나가던 장님도 놀라 눈을 뜰만큼 커다랗게 확대해서 가로수, 가로등, 전봇대 할 것 없이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고 싶었지만, 그에게 전씨의 사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동차를 몰며 거리를 달리다가도 이놈이 어느 구멍에 숨었을까, 고개를 뽑으며 보이지 않는 창안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거리에는 '보바' 간판이 난무했고, 세상은 온통 전씨가 숨어 있을 만한 음식점, 음료수 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계주로 돈을 모아 돈놀이를 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돈을 떼인 것을 알자 팔을 걷어 부치고 그 사람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주인은 옆방에 전세 든 사람들만 놓아둔 채 집을 비운 뒤였다. 작전 상 후퇴한 어머니는 다음 날 벌써 여러 해 중풍으로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를 삼촌 등에 업혀 그 집으로 진군했다. 어머니는 비어 있는 안방에 할아버지를 눕히고 함께 기거하며 집에서 그랬듯이 지극한 간호를 계속했다. 마침내 환자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배설물의 냄새, 밤낮으로 이어지는 들락거림과 신음소리에 진저리를 친 옆방 사람들이 돈을 떼어먹고 달아난 집주인을 찾아 전셋돈을 내놓으라고 할 때까지 장장 보름 가까운 날들을 어머니는 그 집에서 어느 특공대원보다도 용감하게 버텨냈다.
할 수 없이 달려온 집주인은 가택침입죄로 고소하겠다며 길길이 뛰었다. 수시로 그의 망막에 재상영되는 어린 시절의 그날, 어머니는 경찰과 동네사람들에 둘러싸여 웬 남자와 멱살잡이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인상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의 어린 몸을 관통하듯 날카로운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와 오토바이가 달려올 때 반짝이던 그 남자의 작고 까만 두 눈만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또렷이 박혀 있었다. 내 돈 내놓으라고 악을 쓰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놀란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다시 깨어난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누구였는지, 아마도 오래 연락 없이 지내던 외가 친척 중의 하나였을 그가 그때 군사정권의 어디쯤 위치했는지는 몰라도, 곧 수화기를 건네 받은 경찰은 빳빳한 차려 자세로 두세 번 척척 소리가 나도록 경례를 붙이더니 몰려선 동네아줌마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것 봐요, 아주머니들, 여기 아픈 사람 안 보여요? 이 아주머니 쓰러지셨는데 다들 그냥 보고만 있을 거요? 그제야 알뜰살뜰 모아 계 부은 돈을 떼일까, 찾을까, 잡혀가지는 않을까, 마음 조이던 동네 아줌마들이 에구, 에구 내 정신, 어쩌구, 하면서 홀로 용감하게 싸운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사태의 급전을 넋 놓고 바라보던 집주인은 어, 어, 외마디 소리만 남긴 채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차를 타고 사라졌다.
어머니라면,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이라도 전씨 형의 집을 찾아가 차고 앞에 드러누워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래서 경찰이 오면 얘기를 멋지게 반전시켜 줄 그 누구도 그에게는 없었고, 머릿속에는 꺼지지 않는 경보장치 마냥 사이렌소리만 길게 꼬리를 끌며 울려 퍼질 뿐이었다.

봄이 오고 다시 기온이 올라가면서 쥐는 일단 거처를 옮긴 것 같았다. 잡히지는 않았어도 지난 두세 달 동안 먹을 것이라고는 가루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게 철저히 단속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옆집이 이사를 떠난 뒤 벌써 보름 가까이 비어 있어 그리로 이사를 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쥐약을 먹었거나 쥐덫에 걸린 쥐를 마주했을 걸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고, 때맞춰 전근을 떠나준 옆집사람들이 고맙기도 했다. 하긴 양옆이 붙어 있는 연립주택의 구조상 언제 쥐가 다시 옛집을 찾아올지는 몰라도 우선 두 달 가까이 쥐가 그녀의 눈앞을 횡단하거나 외할머니의 약 같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봄날 얼음이 풀리듯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나고 보니 내가 왜 그리 긴장하고 살았나, 조그만 쥐 한 마리에게 무엇을 그리 침범 당했다고 벌벌 떨며 정신을 잡히고 살았나, 스스로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쥐도 생명일 뿐인데, 그 쥐똥이 무슨 시지프스의 바위라고 그렇게 버거워했나, 생각하니 마음이 봄날 양지처럼 기분 좋게 넉넉하고 푸근해질 뿐 아니라, 어느 새 쥐가 정말 있었나 의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봄날 마른나무에 물오르듯 그의 가게 매상도 다시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따로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소문을 타고 '보바'음료를 찾는 손님도 제법 많아졌다.
오랜만에 넉넉한 마음으로 일찍 가게를 나선 그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장에 갔다가 전씨가 일하던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겨우내 도둑이 한탕 털고 간 자리처럼 텅 비어 있던 매장은 산뜻한 모습의 은행으로 새 단장을 하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그로써 그의 눈앞에 남아있던 전씨의 흔적이 온전히 사라졌구나, 생각하니 꿈에서 깨어난 뒤처럼 세상이 낯설고 허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하기도 했다. 비로소 전씨의 존재가 그의 마음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난 듯 마음이 가볍기도 했다. 속은 일은 물론 나는 전씨라는 사람을 만난 일도 없다고 시치미를 떼어도 그만일 것 같았다.
그는 비로소 봄을 맞은 즐거운 기분으로 아내에게 줄 장미 한 다발과 포도주까지 한 병 사들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갔다. 식탁을 물리고 난 저녁 창가에는 아슴아슴 꽃향기가 몰려들었고, 멀리 마주 보이는 언덕에는 배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저녁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한때 그들의 거실에까지 밀려왔던 붉은 악마의 물결은 잠든 지 오래였고, 그 열기를 타고 뜨거워져만 가던 모국의 대통령 선거도 끝나버렸기에, 그들은 잠시 멀뚱한 얼굴로 앉아 술잔만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말야, 전씨 그 치가 말야. 딸기를 한 입 베어 물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게 처음 '보바' 가르쳐 줄 때 그거 자기가 삼천 불인가 얼마 주고 배운 거라고 했거든. 결국 그걸 챙겨갔다고 봐야 되겠지? 그는 말없는 아내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다시 아내의 입장이 되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정정당당하게 수업료를 요구하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갚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거 아냐...... 근데 말야, 그 치가 나한테 재료를 말도 안되게 싸게 넘긴 것도 있고, 거저 주다시피 한 것도 있고...... 도와준 것도 많긴 한데...... 미리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을까? ...... 액땜이라고, 사업 첫 발에 따끔한 교훈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근데, 오뚜기는 어떻게 된 걸까. 도박을 했나, 아니면 정말 바람이라도 나서 도망을 친 걸까? 쳇, 제가 무슨 안나 카레리나 라고. 그가 취기가 오르는 머릿속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빨간 오뚜기를 잡으러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전씨의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킬킬거리고 있는데, 여태까지 먼 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딸기만 집어먹던 아내가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어머, 자긴 오뚜기라고 순정도 없는 줄 알아? 그러더니, 그 사람들 아이들이 셋이라고 했던가? 하고 물었다. 그래, 그랬던 것 같아, 제일 큰애가 그때 다섯 살 생일이라고 했었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내는 길게 한숨을 쉬었을 뿐, 전처럼 아이가 셋이나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며 긴 말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 밤은 푸근히 익어갔다. 그들은 각자 단단하게 자신들을 옥죄던 마음의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녹아 스스로 넉넉해지는 것만 같았다. 속았던 억울함이나, 세상과 멱살잡이를 하며 벌어들인 어머니의 돈을 함부로 쓰고 남에게 맥없이 속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쥐똥 같은 약을 들고 아픈 다리로 허술한 빚의 그물 위를 전전하던 할머니를 성가셔 피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끝내 쥐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한때 그녀의 의식과 무의식을 종횡무진 넘나들던 쥐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이에 침범 당한 그 무엇에 대해서도, 곳곳에 숨어 보이지 않는 수많은 구멍에 대해서도 이젠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늦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부엌 바닥에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야 말았다. 개수대 앞 매트 위에 떨어진 한 무더기 검정 깨 같은 그것. 그녀는 저도 모르게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에구, 대리야.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 신음소리와 함께 천근같던 할머니의 퉁퉁 부은 다리, 남과 자신을 수없이 속이고 속는 그 삶의 무게가 철렁, 그녀의 어깨 위에 실리는 것만 같았다.

신문을 집으러 신발을 끌며 현관 앞에 나섰던 그는 상습사기 어쩌구, 하는 대문짝 만한 기사제목에 눈이 멎었다. 기사를 읽어보려고 시선을 모으는데 마침 어디서 무슨 일이 났는지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청각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갑자기, 아물던 상처를 찔린 듯 가슴에 통증이 전율처럼 지나갔다. 사이렌 소리를 따라 또다시 어린 시절로 달려가려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실내에 눈이 익지 않은 그의 시야 한 구석 저 만치에 주저앉은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금 쳐진 듯한 어깨와 웅크린 그녀의 등에 고운 아침햇살이 업혀 어리광부리듯 칭얼칭얼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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