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속에

2006.08.31 15:14

김혜령 조회 수:752 추천:136

요즘 나는 매일 노천에 서서 사람을 기다린다. 그늘도 변변치 않은 나무 밑, 풀밭에 서서 길 건너 열리지 않는 문을 눈이 가물거리도록 하염없이 바라보며 오후 한때를 보낸다. 사람들이 하도 밟고 다녀서 쓸쓸한 갱년기의 머리 마냥 듬성듬성한 풀밭 속에도 생명이 살기에 가끔 찰싹 발등을 치게 한다. 그 따끔한 통증을 제외하면 머리 위의 햇빛은 나의 모든 감각과 주위의 풍경을 녹여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하다. 내 눈 속에선 푸른 하늘과 그에 닿은 나뭇가지들이, 또 그에 닿은 흙과 풀과 풀 위에 선 사람들의 형체와 색깔이 한데 섞여 흘러간다.
그 물결 너머로 문은 아직도 닫혀 있고 창살 문 저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림처럼 조용하다. 가물가물한 감각 저편 한 귀퉁이에서 목 쉰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And the saddest thing under the sun above...... 마른 강바닥을 힘겹게 훑으며 끊어질 듯 가는 물줄기가 다가온다. 그 노래를 들으며 찻집에 앉아 맛없는 커피를 홀짝였던 때가 언제였던가. 햇수로 따지면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감각으로 따지면 그저 지금 내 눈 속에 섞여 흘러가는 저 물결의 어느 한 점이겠지만.
햇빛 아래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굿바이라 말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그 노래 구절에 "해"라는 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환하고 조용한 대낮의 한 복판에 서면 종종 멜라니 사프카의 목 쉰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건. 그때마다 햇빛 속에 녹아버린 물결 그 어느 한 점, 지금은 닿지 않는, 번지고 녹아 또렷이 떠오르지도 않는, 잃어버린 기억의 한 점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되는 것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망연히 선 나라는 존재를 태우고 녹이며 흘러가는 물결이 가는 곳을 감히 가늠해 보게 만드는 것까지도. 내가 만났던 사람들, 순간들, 그 순간들에 점점이 박혀 있던 나라는 존재와의 끊임없는 이별, 슬픈 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그 이별들까지 햇빛 아래 서면 목쉰 소리로 다가와 흥얼흥얼 가슴을 두드린다.
마침내 뿌우, 낮은 뱃고동 소리 같은 게 들리고 문이 열린다. 백팩을 맨 아이들이 스무 명 남짓씩 무리를 지어 문 저편 햇빛 아래 하얗게 굳어져 가던 풍경을 뚫고 걸어나온다. 아이들과 함께 나오는 선생들 목에는 제각기 반짝이는 교실 열쇠가 달려있다. 그것으로 저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 어떤 존재를 열어 보이고 내일 또 열어 보이기 위해 닫았을까. 잘랑거리는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 그 소리가, 햇빛 아래 녹아 허물어지던 내 청각을 간질인다. 주차 안내를 하는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 웃음소리, 서로를 부르고 잘 가라 인사하는 소리도 들린다. 모두들 이 거센 햇빛 아래 서서 하나도 슬프지 않게 굿바이를 말한다.
그 중에 내 아이도 섞여 있다. 아침에 입혀 보낸 공룡 티셔츠에 반바지, 내가 챙겨준 백팩에 도시락 가방도 들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아침과 다르다. 약간 햇빛에 바랜 듯도 하고, 먼지가 묻은 듯도 하고, 지친 듯도 하고 그새 통통한 뺨의 아기살이 빠졌는지 조금 작아진 것도 같다. 아이도 조금은 쑥스러운 듯 나를 보고 웃는다.
잘 지냈니? 재밌었니? 점심은 잘 먹었어? 궁금해 안달이 난 엄마에게 연상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문득 묻는다. 엄마, 우리 이제 도서관 가는 거야? 아니, 오늘은 집에 가서 씻고, 숙제하고...... 왜애? 왜 오늘 도서관에 못 가? 수영은 갈 수 있어? 아이는 새 학교, 새 교실에 신나 깡총거리면서도 아직 아무런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흐르던 유년기의 저 자신과 이별을 못한 눈치다.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시절, 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나른히 나를 감싸오던 몸살기운 같던 그것, 더러는 이불 속에 꼭꼭 숨어버리고 싶게 하던 그것, 이유 없이 마음을 서럽게 하던 그게 바로 저 물결이었나 보다. 내게 익숙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내 존재를 끊임없이 녹여 태우고 어디론가 가려는 물결. 내가 아는 그것들을 닿지 않는 점들로 흩어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섞어 버리는 물결. 가끔 멜라니 사프카를 닮은 목쉰 소리로 나를 찾아오는 물결. 흥얼흥얼 이별을 따라 부르게 하는 물결.
나는 내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아이의 작아진 얼굴을 다시 본다. 그래, 익숙한 것들, 그 속에 담긴 제 존재, 제 존재의 일부라 믿었던 것들과 이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그렇지만 그 수많은 이별을 겪으면서 그 모든 것을 흩고 섞는 물결을 타고 이 자리까지 흘러왔기에, 이제 나는 매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잖니. 이 눈부신 햇빛 속에 기쁨과 슬픔을 섞으며 너와 함께 살고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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