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1

2006.10.11 06:03

김혜령 조회 수:629 추천:107

1. 연지의 말
바람은 온종일 창 밖에서 홀로 부풀며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뭇가지를 더듬을 때 푸르르 깃을 세우는 나무만큼 부풀고, 소잔등 같은 언덕을 오르면서는 언덕만큼 부풀고, 쉬이 열리지 않는 기숙사건물을 한 바퀴, 두 바퀴 돌면서는 또 그만큼 부풀었을 것이다. 창문을 여는 순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거대한 몸체로 불쑥, 바람이 쓰러지듯 밀려 들어왔다.
나는 바람을 끌어안은 채로 그 자리에 서버렸다. 헐렁한 블라우스가 돛폭같이 부풀어오르고 바람에 딸려 들어온 하늘이 내 몸을 파랗게 적셔가기 시작했다. 새소리가 났다. 맑은 유리구슬들을 맞비비는 듯한 소리가 깊은 물 속 같은 적막을 흔들었다. 새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고 진초록 벤자민나무만 보일 듯 말 듯 무수한 혀를 떨고 있었다. 형체 없이 공중을 떠돌던 말들이 웅웅 내 귀를 채우고 내 몸을, 내 속의 돛폭을 찢을 듯 거세게 흔든다. 나를, 이 깊은 물 속에 잠겨버린 나를 몰고 날아오르기라도 하자는 걸까.
언니. 갑자기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기운에 방안을 돌아보았다. 초저녁 어스름이 고여들기 시작한 방 한 구석에 한 덩이 응고된 어둠으로 언니가 누워있다.
만 하루가 넘도록 언니는 눈 한번 뜨지 않고 잠만 잤으므로 나는 자꾸만 언니가 내 기숙사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문득 언니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의 전율이라니.
그건 어린 시절의 어느 한 순간, 몸을 흔드는 검은 나무 속에 무엇이, 이를테면 어떤 영혼 같은 것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소스라치던 느낌과 닮은 데가 있다. 뒷마당에서 혼자 놀다가 문득 나무의 영혼을 느꼈을 때, 그 형체 없는 설렘과 신음 섞인 손짓을 보았을 때, 나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환히 불 밝힌 방안으로 뛰어들곤 했었다. 그때 나무들은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전등을 끄고 자려고 누우면 다시 어둠 속에서 몸을 흔들던 나무 생각이 났다. 하긴 나무들만이 아닐 것이다. 바람도, 어둠도, 움직임 없는 허공마저도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지금 내 방에 잠들어 있는 언니의 존재를 깨달을 때의 느낌은 그것만이 아니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의 적막. 아마, 죽음은커녕 잠의 세계마저도 낯설기만 했던 어린 시절에 잠든 생물을 보면, 그것이 사람이건 강아지였건, 견디기 힘든 당혹감으로 소리쳐 깨우고 싶던 심정이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존재가 바람 빠진 고무풍선 마냥 순식간에 실물감을 잃어버리고, 감은 눈꺼풀로 덮인 빈 허물만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 위에서의 줄타기. 바람은 보이지 않는 혀로 그 경계선을 핥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소리나게 창문을 닫고 창가에서 돌아섰다. 바람의 허리가 뭉텅 잘리면서 나무들의 술렁임도 일시에 유리창 밖으로 사라지고 대신 종일 무거워진 방안의 적요가 달려들었다. 나는 싸울 듯이 번쩍 팔을 들어올려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리고 언니에게 다가갔다. 내 과장된 몸짓을 비웃듯 목조건물의 어디선가 틱, 틱, 나무들이 몸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일어나. 밥 먹자.
일어나, 일어나. 몸을 틀며 돌아누우려는 언니를 나는 제법 집요하게 흔들었다. 저녁바람에 차가워진 살갗을 지나 따뜻한 체온을 찾으려고 나는 언니의 겨드랑이와 옆구리에 손을 넣어 간지럼을 태웠다. 앙상한 갈비뼈가 손끝에 만져졌다. 일어나, 일어나. 제발...... 아까 목덜미를 휘감던 찬 기운은 이제 내 몸 속을 헤집고 다니는 모양이다. 나는 마른 나무등걸 같은 언니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밥 좀 먹자.

어제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는 오후에, 언니는 아무런 예고도 언질도, 하다못해 예감마저도 없이 찾아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아니, 어떤 기다림은 있었다. 언니가 아니라 그에 대한. 와주었으면 싶은 기대와 동시에 그가 오지 않을 하루의 끝에 얼른 닿아 찐득찐득 늘어난 시간의 막을 내려 버리고 싶다는 자포자기의 뒤범벅을 굳이 기다림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오래 전부터 내 방문에 매달려 수시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먼저 불쑥 가슴에 안기듯 한 덩이 바람이 뛰어들어왔고, 비도 오지 않는 화창한 날씨에 후줄근한 레인코트를 걸치고 허름한 여행가방을 든 여자가 지푸라기 같은 머리를 흩뜨린 채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가 그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여자의 얼굴보다는 그녀의 등뒤로 보이는 인적 없는 복도부터 살폈다. 직접 문을 두드렸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자는 넋이 나간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대부분 떠났기에 복도 양편의 방문들은 저마다 굳게 닫혀 있었고, 석양을 밀치며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복도는 여자의 어깨에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마침내 내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돌아와 더듬거리기 시작했을 때, 언니는 마치 그 긴 복도를, 아니 거기까지 오는 길 전부를 홀로 짊어지고 온 듯 지친 표정을 일순 허물며 허옇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을 열었다.
이젠 좀 들어가자.
마치 한평생을 문 밖에 서서 기다렸다는 듯한 말투였다.
생전 처음 와본 방이건 만도 언니는 침대를 감지하는 무슨 특별한 더듬이라도 달린 것인지 들어서기가 무섭게 곧장 강력한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마냥 침대로 돌진하더니 눕자마자 눈을 감고 잠이 들어 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 여자가 언니라는 사실을 깨달음과 거의 동시에 언니의 감긴 눈꺼풀 바깥에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남겨져 버리고 말았다.
잠송이. 송이 송이 잠송이. 잠만 자는 송아지, 우리 잠송이. 엄마라면 잠든 언니의 등을 그렇게 토닥토닥 두드렸을 것이다. 바람 탄 그네처럼 흔들흔들 몸을 흔들며 노래하듯 숨쉬듯 흥얼댔을 것이다.

내 언니, 이 수지는...... 노랑리본을 매단 머리를 까닥까닥 흔들며 피아노를 쳤고...... 그러다가 우레 같은 박수에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도도히 무대를 떠났고...... 더 자라서는 하얀 교복을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혼자 동네의 플라타너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 자전거를 배우는 것이 한창 유행이던 때였을 것이다. 어릴 적에 자전거에 들이 받혀 눈썹 위에 작은 흉터가 생긴 뒤 자전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언니는 어느 날 길에서 친척 아줌마와 마주친 뒤부터는 두 다리를 총천연색의 멍과 상처로 장식하며 자전거를 배웠다. 물론 언니는 강력히 부인했지만, 늘 언니에게 참한 규수라고 칭찬하던 그 아줌마가 그날 스쳐 가는 자전거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계집애들이 꼴사납게'하고 구시렁대지만 않았어도 언니가 그 후 몇 달 동안 구겨지고 흙 묻은 치마 밑으로 번쩍번쩍 다리를 들어올리며 교복소매를 걷어붙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찍부터 다리를 절었던 나는 자전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근소한 차이였으니 맘만 먹으면 못 탈 것도 없을 테지만, 나는 잠시도 일 인치가 짧은 왼쪽 다리를 내 의식에서 지우지 못했고, 마치 나 자신이 짧은 다리가 붙어 있는 반쪽의 몸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나머지 반쪽인 것처럼, 때로는 그 모자란 반쪽인 것처럼, 모든 움직임을 버거워했다.
그런 내게 자전거를 타는 언니의 모습은 경이를 지나 신비에 가까웠다. 나무그늘을 지날 때는 푸르게, 꽃그늘을 지날 때는 환한 보랏빛으로, 노을 속에서는 온몸으로 바알간 열기를 뿜으며 내 창 앞을 지나갔다. 나는 더러 낡은 시집이며 과학 책에서 보았던 '에테르'란 것이 바로 저게 아닐까 생각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무며 꽃 속에 숨어 있던 영혼들과 그것들의 두려움이나 망설임, 그 보이지 않는 혀들의 떨림까지도 모두 싣고 언니는 조금씩 내 손으로는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더 빨리 페달을 밟아 세상을 마취시키고 어느 순간 훅, 가벼운 기체처럼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언니의 얼굴에 저녁 어스름이 스칠 때부터 언니가 상기된 얼굴로 더운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나는 불안과 설렘으로 조바심을 치며 절룩거리는 두 개의 반쪽으로 방안을 서성댔다.

나는 결국 언니를 놓아둔 채 혼자 방을 나섰다. 키 큰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검푸른 하늘에 머리를 담근 채 삐걱삐걱 몸을 흔들고 있었다. 치자나무들이 빽빽이 담을 두른 오솔길 끝, 가는 바람에도 바스스 몸을 떠는 부겐빌리아 이파리 사이로, 마치 이 세상의 유일한 목적지인 양 불이 환히 켜진 식당이 보였다.
부활절방학 동안 캠퍼스에 남은 기숙사생들은 모두 그곳에 가서 식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언니 같은 일반인들도 돈을 내면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어제도 오늘도 나는 언니와 함께 그곳으로 가지 못했다. 오히려 어제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언니를 기다리다가 나마저 식사시간을 놓쳐 방에 굴러다니던 과자부스러기로 저녁을 때워야 했다.
평상시에는 학생들로 시장바닥 같이 붐비던 식당에는 기껏해야 여남은 명이, 그나마도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신문이며 책으로 시선을 가린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헹구어낸 더운물이 지르르 흐르는 쟁반을 종이냅킨으로 꼼꼼히 닦은 뒤 차근차근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식대에 가득한 음식들은 저마다 여느 가정집의 부엌에서처럼 달콤하고 포근한 냄새를 풍기며 집어줄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 몸 속에 터질 듯 부풀어오르던 돛폭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더운 김이 오르는 음식이 놓여진 작은 식탁이 눈 속에 보였다. 한 사내와 아이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음식을 나누어주느라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창에 드리운 커튼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창밖에 선 채로 고개를 저어 거칠게 커튼을 닫았다. 내가 닫지 않으면 그 여자가 닫을 것이었으므로. 그래도 여자가 바라보고 있던 사내의 모습은 내 망막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쟁반 위에 야채수프와 닭고기튀김, 시금치를 섞어 넣은 달걀찜, 볶음밥과 구운 감자를 담고 삶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였다. 한가지씩 음식을 담을 때마다 뱃속에서 견딜 수 없는 시장기가 쏴아쏴아 몸을 틀며 꿈틀거렸다.
거들떠보아 주지도 않는 사람을 지키느라 온종일을 굶다니. 나는 괜히 혼자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내가 온종일 지킨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부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였거나 언니였거나 또는 나 자신이었거나.
나는 음식 하나 하나에 그간 소홀했던 예의와 의무를 다하려는 듯 샅샅이 일별하며 식대 사이를 돌았다. 바구니에서 빵을 두 개 꺼내 접시에 담고 버터만 집으려다 그 옆에 있는 잼과 꿀, 디저트로 먹을 초콜릿 무쓰와 딸기 요구르트까지 쟁반에 가까스로 자리를 마련하고 얹어 놓았다.
소다를 큰 컵에 하나 가득 따른 뒤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캄캄해진 유리창에 이쪽을 보고 있던 한 남학생이 황급히 시선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지난 학기 '신화와 상징' 시간에 어느 병약해 보이는 귀머거리 여학생을 위해 수화통역을 하던 남자였다. 저렇게 허공을 휘젓는 손짓이 뜻을 담아 내다니. 허공에는 저렇게 많은 이야기가 떠다니고 있는 걸까. 나는 강의시간 도중에 가끔씩 넋을 잃고 남자의 푸드득 날아오를 듯한 손짓을 바라보곤 했었다. 마치 허공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마술사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음식이 가득한 식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숨을 고른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며 다만 잠시 허기에서 구하옵소서. 허기와 고독과 구토가 영원토록 나의 것입니다.

남자의 시선이 아니라도 과연 내 쟁반에 담긴 것은 두 사람 몫은 충분히 될만한 양이었다. 싸 가지고 가면 되지 뭐. 나는 의식에 걸린 남자의 시선을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알루미늄포일과 종이봉지들이 놓여 있는 카운터 쪽에는 철 이른 수박 한 덩이가 색종이로 눈 코 입을 해 달고 얼음 위에 펑퍼짐하게 앉아 헤픈 웃음을 웃고 있었다.
닭고기부터 먹기 시작했다. 냅킨에 닦아도 자꾸만 소스와 기름이 묻어서 손끝을 쪽쪽 빨았다. '신입생 15파운드'라는 말이 생각났다. 처음 대학 기숙사에 들어오면 기름진 음식 때문에 살이 찌기 마련이라는 얘기였다. 그래, 그럴 테지.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허기진 하이에나도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리 만치 깨끗이 발라낸 뼈들을 접시에 소복이 담아 옆으로 밀어 놓았다. 나는 이미 십 년 전에 신입생을 면했지만 아직도 나의 몸무게는 15파운드 정도는 쉽게 빼고 더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 꼭 너만 했어, 내가 채워야 할 구멍이. 나는 귓속에서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 만한 크기에 바로 너 같은 모양이었어. 그는 나의 옷을 벗기고 기름진 음식 때문에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 나의 배와 가슴과 엉덩이를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그때 또다시 팩맨을 생각했다. 오래 전 언니가 보여준 책 속의 그림도 팩맨을 닮아 있었다. 언덕을 넘고 바다를 건너 잃어버린 제 조각을 찾아 헤매는 어느 동그라미가 그려진 책이었다. 그 동그라미는 넘어지고 밟혀서 구겨지고 찌그러지면서도 오매불망 한번도 보지 못한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그 그림을 본 뒤로 나는 한때 팩맨에 미쳐 지냈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를 저는 열 한 살의 여자아이에게 확실히 전자오락은 그런 대로 해볼 만한 놀이였다. 나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거나 소프트볼을 하러 가려는 아이들을 꼬드겨서 껌껌한 전자오락실로 갔다. 싫증내는 아이들에게 내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털어 주며 나는 나의 잽싼 손놀림을 따라 아작아작 화면을 먹어 가는 팩맨의 허기를 조금이라도 더 채워주려고 기를 썼다. 그렇지만 모니터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팩맨은 항상 벌리고 있는 입만큼 배가 고팠고, 끝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지 못한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그의 품에 안길 때마다 짧은 왼쪽 다리가 뻣뻣해졌다. 그가 아무리 부인해도 그가 채우려던 구멍도 내 한쪽 다리의 모자란 일 인치 때문에 결코 완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시장에서 과일장수가 썩 썩 썩 세 번 칼집을 낸 뒤 칼끝에 찍어내는 삼각뿔 모양의 수박조각과도 같은 얘기다. 나는 누군가의 시험에 들어 끝이 부러진 삼각의 수박조각처럼 다시 박아 넣어도 영영 수박의 중심과는 닿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초콜릿 무쓰와 이미 질척하게 녹아버린 딸기 요구르트까지 다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새 식당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서 음식은 다 치워졌고 식대에는 언니에게 가져갈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바구니에서 바나나와 오렌지만 두어 개 봉지에 담아 들고 잔뜩 부른 배를 내밀며 뒤뚱뒤뚱 식당 문을 나섰다. 저만치 수화하는 남자가 가고 있기에 나는 그를 피해 뒷길로 들어섰다. 들리지 않는 말을 허공에서 집어내는 사람과 마주치면 내 안에 감춰진 혀들이 무슨 말을 할까 두렵기도 했다.

그새 더 차가워진 바람이 어둠을 몰며 목덜미에 달려들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몸을 뒤척이고 까마귀 두 마리가 악악 소리를 지르며 가로등 위로 날아올랐다. 잠이 깬 거위가 첨벙 연못 속에 들어가면서 왝왝 짜증을 부렸다. 연이어 푸드득거리는 날개 소리와 오리며 거위들 울음소리로 연못 주위가 잠시 소란스러웠다.
언니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언니의 어릴 적 별명은 왜가리였다. 아무 때나, 아무 일에나, 왜, 왜, 끝도 없이 물어댔다. 대답이 궁하고 성가셔 쩔쩔매다가도 언니를 향해 '우리 왜가리 새끼'라고 부를 때의 엄마 목소리엔 다른 땐 들을 수 없던 정겨움이 넘쳐흘렀다. 삶과 병고에 지친 엄마가 아니라 춥고 바람 부는 날 새끼를 위해 깃을 들어올리는 어미 새의 온화함이었다. 아이고, 내 새끼, 고 귀여운 주둥이를 이 속에 묻어라. 언니는 왜, 왜, 물으면서 엄마의 미소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수박덩이의 속살로 돌아가는 완벽한 삼각뿔처럼, 동그라미를 찾아가는 조각처럼, 자물쇠 통에 찰칵 소리를 내며 꽂히는 열쇠처럼 언니는 엄마의 굳어진 얼굴을 열어 보이곤 했다.
나는 왜가리가 어떻게 생긴 샌지도 몰랐으면서 '우리 왜가리 새끼'라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속이 그득해 오는 포만감을 느꼈다. 그래서 왜가리는 아주 우아하고 행복한 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건 내겐 손으로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바람 같은 거라서 그런 포만감이 지나간 뒤엔 더 무서운 허기로 밤이 깊도록 뒤척여야 했다.
하긴 언니가 왜가리 새끼여서 고통받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에 언니는 왜, 왜, 거리다가 어처구니없게 퇴학을 당할 뻔했다. 왜, 꼭 귀 밑 1센티여야 하는가, 왜, 그것이 학생다운가, 왜, 1.5센티나 2센티는 학생답지 않단 말인가. '학생다움'을 누가 어떻게 정의하는가. 왜, 물어서는 안 되는가, 왜, 당신은 때리고 나는 맞아야 하는가, 왜, 피해서는 안 되는가, 왜, 내 머리카락 길이가 당신에겐 그렇게도 중요한가, 왜, 물어서는 안 되는가, 왜, 욕을 하는가, 왜, 물어서는 안 되는가...... 무엇이 그날 따라 언니를 그렇게 격렬한 의문의 쳇바퀴에 휘말려들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 있었던 선생들 중에 아무도 바퀴를 멈추고 언니를 도와 미친 돌림틀처럼 날뛰는 바퀴에서 내려서게 할 만한 대답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대답을 찾는 대신, 그들은 언니를 탕, 탕, 때려야 제대로 작동하는 고장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정도로 착각했던 게 분명하다. 언니는 그날 모여선 선생들 손에 뺨을 맞고 무수한 출석부 세례를 받은 뒤 스스로 의문의 바퀴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바퀴의 방향을 돌려 그 길로 교무실 문을 열고,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복도와 아침에 실내화를 갈아 신었던 현관을 꿈꾸듯 지나, 햇빛에 하얗게 표백된 운동장을 혼자 타박타박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마 그때 교문을 지키던 수위는 언니의 슬프고도 당당한 기세에 넋이 빠졌던가 보다. 언니는 수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똑바로 교문을 통과해 거리로 나갔다. 그것이 언니가 왜가리 새끼였던 최후였다. 적어도 언니가 소리내어 '왜'라고 묻는 일은 그날 이후 다시는 없었다.

거위들은 어느 새 다시 제 가슴에 부리를 박고 잠이 들어 연못가는 우단같이 조용한 어둠으로 포근히 덮여 있었다. 절룩거리는 내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 어둠 속에 찌걱찌걱 흠집을 냈다. 내 몸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자꾸만 물이 차는 구멍난 배처럼 어둠을 담고 기우뚱기우뚱 힘겹게 가고 있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의 화단을 지날 때 자동물뿌리개가 잠을 떨치듯 고개를 흔들며 깨어나 세차게 물을 뿜기 시작했다. 희푸른 물줄기 사이로 가로등이 켜진 언덕길이 보였다. 거기 언덕 꼭대기에 누가 내다놓았는지 언제부턴가 강의실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언젠가 그 의자에 수화하는 남학생과 귀머거리 여학생이 포개지듯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작은 의자라 그들의 얼굴은 거의 하나로 겹쳐 보였고, 얘기를 하고 있는 그들의 손은 서로 날개를 스치며 푸드득거리는 두 마리의 새 같았다. 석양이 여자의 얼굴과 목을 붉게 물들일 때 그들은 함께 일어나 서로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버드나무 밑으로 사라졌다. 버드나무 밑 짙은 그늘 속에서도 그들의 손이 보일까? 그들의 들리지 않는 말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비상연습을 계속하고 있을까?

언니는 흔들어 깨우는 나를 한번 흘끔 쳐다보았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 동그랗게 구부리고 잠든 언니는 그대로 물음표의 형상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날 찾아온 걸까? 평생 미국 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을 듯이 돌아서 가던 사람이. 게다가 와서는 본 척도 않고 잠만 자고. 이 사람이 내 언닌 건 맞는 사실일까?
나는 깨어나지 않는 언니의 눈꺼풀 밖에서 잠시 맴을 돌다가, 혼자 바나나와 오렌지를 모두 먹어치우고 담요를 깐 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다. 전화기 옆의 자동응답기에는 빨간 불빛이 변함없이 '0'을 그리고 있었다. 포만한 배에서 거북스런 트림이 올라왔다. 빈 기숙사건물이 하루를 버틴 고단한 몸을 틀며 또 틱틱 소리를 냈다. 온종일 울리지 않던 전화와 역시 소리 없던 언니가 저만치 하루만큼 더 단단해진 어둠으로 응고되어 있었다.
기다리지 마. 지난 번 헤어질 때 그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나는 종일 또 뭘 기다렸던 것인지. 어쩌면 아무 것도 기다린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여러 번 자신의 말을 뒤엎고 다시 나를 찾았어도, 언제부턴가는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커져 가고 있다는 걸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를 연결시키는 감정이 고무줄 같은 거였다면, 우리는 어느 한쪽도 먼저 놓아버릴 수 없는 그 고무줄을 잡은 채로 조금씩, 조금씩 더 서로에게서 멀리 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줄이 끊어질까 봐 어느 만큼 갔다가는 돌아와 보고, 기다리지 말라며 돌아섰다가는 늘어난 고무줄이 그대로 총이 되어 상대를 또는 자신을 다치게 할까봐 차마 놓지 못하고 엉거주춤 줄에 매달려 되돌아오는 연습. 그렇게 그가 내게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그 끈이 얼마나 탄력성을 잃었는가, 얼마나 느슨해지고 길어졌는가를 말없이 확인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닷새쯤, 이제는 열흘쯤, 그 다음엔 한 달쯤, 언젠가는 일년이나 어쩌면 한평생 되돌아오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길어질 것인지.
내가 무엇을 기다렸든, 그게 무엇이라고 믿었든, 그 '무엇'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이 언제였던가. 나는 창으로 새어든 가로등 불빛이 부옇게 떠있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 우리가 만났던 날의 분위기. 그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불과 보름 전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도 꽤 긴 시간과 정신집중이 필요했다.
그래, 비가 오고 난 아침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 길이 젖어 있던 건 그저 새벽 내내 고개를 저으며 물을 뿜어댔을 자동물뿌리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무어라 말하는 동안 나는 한 손으로 껍질이 너덜너덜한 유칼립투스 나무 기둥을 잡고 내 앞을 기어가는 달팽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길은 말라 가는데 달팽이는 몸을 고무줄처럼 길게, 길게 늘이며 힘겹게 제 집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임신을 했고, 그가 하늘같이 두려워하는, 목사라는 그의 양아버지가 동부에서 다녀갔다던가. 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걸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핑계처럼 말했는데, 그게 앞으로 내게 해야 할 더 어려운 말까지 대신해 주길 바라는 듯이 말했는데, 나는 그저 그에게 달팽이를 조심하라고, 길을 내어주라고만 말했다.
달팽이같이 느리게 열흘이 지나간 뒤에 그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식사 거르지 마.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과식하지도 말고.
열흘만큼 늘어난 고무줄의 한끝을 놓지 못한 채 그는 조금은 성가신 기색이었다.
......
아, 지겨워. 나는 너를 만나는 동안 너무 여러 개의 똑같은 생을 되풀이 사는 것 같아. 감춰진 그의 또 다른 혀가 조용한 수화기 속에서 낮게 속삭였다.
......
또...... 또, 뭘 하지 말까?
나 역시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풋......
그의 김빠진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가 비틀고 있을 곱슬머리를 생각했다. 마침내 엉켜버린 머리카락에서 손을 뗄 때쯤이면 가느다란 밤색 머리카락이 서너 가락 어깨 위에 떨어져 내릴 것이다. 너 그러다가 대머리 되겠다. 나는 그의 길어지는 침묵 앞에 흐흐 웃으며 중얼거렸다. 시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어진 침묵을 자르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지 마.
그는 정색을 하려고 꽤 애를 쓰고 있었다.
...... 그래.
그래, 내일 만나, 그래, 그럼 잘 자, 그래, 그럼......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을 지도 모른다. 끝이라고는 믿지 않았던 끝이었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절망적이었다. 나의 기다림과 기다림으로 버텨온 나를 통째로 지워버리려고 거대한 어둠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 몸뚱이 위로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밤새 어둠의 물결을 타고 조각난 동그라미가 되어 멀미가 나도록 흘러 다녔다. 조각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때로는 입이 되어 몸이 터질 듯 부풀어오를 때까지 어둠을 꿀꺽꿀꺽 삼키고, 때로는 눈이 되어 어둠의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때로는 귀가 되어 멍멍한 침묵 속을 소리 없는 물결에 얻어맞으면서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어둠의 물결 속에서 힐끗 힐끗 그의 모습이 보였다가는 사라지고 했다.

언젠가 그와 함께 해수욕을 간 일이 있었다. 울퉁불퉁한 모래밭과 갯벌을 서로 허리에 팔을 두르고 뒤뚱뒤뚱 걸어서 바다로 들어갔다.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에서 내 걸음걸이가 그와 비슷해지는 것이 신기하고 좋아서 나는 그에게 내가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새들이 파도를 넘으며 흰 날갯죽지로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밀려오는 파도를 맞을 때마다 그가 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서 살짝살짝 나를 들어올려 주었다. 그때마다 내 입술이 저절로 벌어져 웃음이 새어나오고, 나의 살갗이 열려 그 속에서 한없이 가볍고 아름다운 지느러미 같은 것이 펼쳐져 나오는 듯 했다. 나는 그와 함께 비로소 세상의 물결을 맞이하고 세상의 리듬을 탈 수 있는 온전한 무엇이 된 것 같았다.
목까지 물에 잠기는 곳에서 큰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를 놓았다. 허옇고 퍼렇게 덤벼든 파도에 휩싸여 곤두박질치면서도, 그래서 턱, 숨이 막혔던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내 살갗에서 비어져 나오던 기쁨의 지느러미를 생각했다. 물 밑바닥에 아롱진 지느러미의 찬란한 빛깔을 본 것도 같았다. 그걸 그도 보았을까 생각했고, 그가 다시 보기 전에 찢어질까 걱정스러웠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저만치 몇 겹의 물결 너머에 있었다.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그의 입술이 웃는 모습을 아까운 듯 살짝 허물며 그렇게 물었던 것도 같다. 그와 나 사이의 물결이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잔물결을 만들고 잔물결들은 곧 집채만한 파도가 되어 솟아올랐다. 파도가 솟아오를 때 물빛이 비친 푸르스름한 그의 얼굴은 낯설었다. 파도와 구분이 가지 않는 모습. 언제라도 물결과 하나가 되어 사라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앞으로 어디서 왔는지 하얀 물새 한 마리가 환영처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파도에 묻혔을 때 나는 생각했다. 저 밑바닥, 소리 없이 평평한 그 바닥에 편안히 누워 버리고 싶다고. 그 속에서 모든 말과 생각을 버리고, 몸뚱이도 버리고, 산산이 해체되고 싶다고. 나도 잡히지 않는 물결처럼 흘러가 버리고 싶다고.
저만치 헤엄쳐간 그가 손을 흔들었다. 벙긋벙긋 입을 벌려 뭐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파도와 허공에 지워지고, 나는 그에게 다가서려던 몸짓을 문득 멈춰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가 소리쳐도, 아무리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만 같았다. 너는 누구니? 어느 세상 사람이니? 그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왜 갑자기 저렇게 수화를 하는 걸까? 마치 한 순간에 그와 나 사이의 허공이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버린 듯 그는 내게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 한번 파도가 나를 삼켰고, 나는 그대로 물 속에 잠겨 버렸다. 물 속은 편안했다. 말도 소리도 없이 팔과 다리가 천천히 풀어지고, 해초 마냥 춤을 추는 머리카락을 따라 내 정신이 너울너울 풀어지고, 내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도 어둡고 더러운 물결 마냥 풀려나가는 듯 했다. 이렇게, 이렇게 나를 해체시켜 버리면 물결처럼 부드럽게 되어서, 기체처럼 가볍게 되어서...... 나는 물 속에서 풀려져 가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푸른 물결 속에서 나는 내게서 풀려 나와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어린아이처럼 거침없이 웃으면서, 웃음마다 완벽하게 동그란 공기방울을 뿜어내면서, 놀랍게도 전혀 상하지 않은 두 다리를 물고기같이 흔들고 있었다. 해초를 열며 흰 물새 한 마리가 다가왔고 이번에는 그 물새의 깃을 열며 언니가 나왔다. 우리는 한 쌍의 즐거운 인어가 되어 뻐끔뻐끔 공기방울을 주고받으며 물결을 헤치고 다녔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가득한 동굴을 지나고 바위틈을 지날 때, 바위에 얹힌 난파선 뒤에서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는 그림자같이 빠르고 표정 없이 다가와서 내게 난파선을 가리켰다. 커다란 구멍들이 퀭한 눈처럼 뚫린 난파선을 마주보는 순간, 고막을 찢는 경적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신없이 팔다리를 버둥댔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서 헤어나야 했다. 발버둥칠수록 더욱 거세게 팔다리를 묶고, 가슴을 묶고, 어느 새 심장에까지 찌르듯 파고드는 그 소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숨이 찼다. 소리는 내 귀에 가득 차서 나는 마치 소리에 머리를 관통 당한 채 소리를 담은 컵에 빠진 벌레 같았다. 나는 소리로 가득 차 자꾸만 무거워지는 몸을 하릴없이 버둥거렸다. 어떻게든 이 무서운 소리의 컵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지만 소리는 이미 묵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날, 날...... 살려줘.
마지막 몸부림 끝에 가느다란 호루라기 소리가 감겨들었다. 그제야 몸을 조이던 묵이 깨어져 나갔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낯선 얼굴도 몇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었다. 이 바보야. 그는 입을 열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 있던 얼굴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덮어 줘. 날 좀 덮어 줘. 나는 나의 일그러지고 보기 싫은 몸을 두 손으로 가리고 짧은 다리를 모래 속에 묻으며 그에게 사정했다. 네 속살까지는 닿지 못하더라도 제발, 제발 날 좀 덮어 줘.

새벽에 일어나서 전날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시큼한 요구르트와 초콜릿 물에 섞여 소화되지 않은 오렌지 속껍질이 엉킨 실뭉치들처럼 멍울멍울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울컥울컥 짙은 갈색 액체가 쏟아져 나오고, 팽팽한 관자놀이를 부술 듯 울리며,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기숙사식당의 남학생과 어둠 속의 수초와 난파선의 퀭한 눈과 또 수없이 많은 레터스 이파리들이 상한 지느러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음식들을 다 토하고 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상체를 변기 위에 구부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토하고 또 토했는데도 뭔가 내 몸 안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냥 두면 무언가 남은 것이 있어 불어나고 또 불어나서 요동을 치며 꺼내달라고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벽을 짚으며 좁은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맨발바닥이 얼음을 딛는 것처럼 찼다.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웠다. 어느 새 푸른 새벽빛이 복도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그 끝에 내 방문이 찌그러진 사각형으로 열려 있었다.
방바닥에 깔아둔 내 자리에 다시 들어가 누웠지만 몸이 오그라들도록 추웠다. 담요를 둘둘 말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써도 물 속처럼, 아니 얼음 속처럼 추웠다. 할 수 없이 이불을 들고 언니에게로 갔다. 침대가 좁아서 나도 언니처럼 상체를 동그랗게 구부려 언니를 껴안듯이 해야만 누울 수 있었다. 창 밖에서 웬 새가 부우 부 부 부 소리를 내며 느리게 울었다. 웅크리고 잠든 언니의 숨결이 부옇게 어둠을 밝히며 내 몸으로 전해져 왔다.
부우, 부 부 부, 우는 새 소리를 서른 번쯤 센 뒤에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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