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사 가는 길

2004.04.13 13:04

정찬열 조회 수:525 추천:21

다보사(多寶寺) 가는 길

다보사는 전남 나주시에 있는 자그마한 절이다. 나주는 광주와 목포사이에 있는 고을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우물가에서 아가씨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더니 물위에 버들잎을 띄워주었다는, 그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부인으로 맞아들여 유씨 부인이 된 이야기로 유명한 바로 그 고장이다.
광주에서 아침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나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오래 만에 찾아온 고국은 봄이 흐드러져 있었다. 길가엔 개나리가 활짝 피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바람이 불면 춘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산수유가 그 야들야들한 몸매를 바람결 따라 흐느적거리며 교태를 부리고 있다.
광주시내를 빠져 나와 남평 들판을 지난다. 이곳을 지나며 유흥준은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주평야의 넓은 들 저편으로는 완만한 산등성이의 여린 곡선이 시야로 들어온다. 들판은 넓고 평평한데도 산은 가깝게 다가오니 참으로 이상스럽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여인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의 강약이 있는 리듬을 느낀다." 오늘 이 들판을 지나며 나 또한 그 끊길 듯 이어지는 남도의 육자배기가락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20년 세월을 멀리 떠나 살아온 때문일까.
30여분을 달리니 나주다. 나주 향교 담벼락을 끼고 산길로 접어드니 자그마한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위로 나 앉은 작은 마을이 평화롭다. 저수지를 휘돌아 난 작은 길을 천천히 올라가는데 저 만치서 갖 피어난 연분홍 산 벚꽃이 수줍게 우리를 맞이한다. 골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랑 간간히 들리는 산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손바닥만한 빈터에 심어놓은 싱싱한 마늘잎까지도 그 풋풋한 잎을 꼿꼿이 세워 우리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저 좁은 땅에다 저토록 알뜰히 마늘을 가꾸는 농부의 정성 때문에 이 골짜기가 이렇게 따사로운가.
멀리 배 밭이 군데군데 보인다. 봄이 더 익으면 온 동네가 배꽃 천지가 되고, 하얀 배꽃이 바람에 날리면 마치 수만 마리 흰나비가 떼지어 나는 것처럼 장관을 이룰 것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산림이 울창해진다. 인가는 없고 인적도 끊어진다. 갑자기 딴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다. 여기부터 절 소유의 땅이라고 한다. 골짜기를 따라 계단식 논이 보인다. 천수답이다.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안 오면 그만인 하늘만 바라보는 논이다. 나무들이 파릇파릇 잎파리를 피워내고 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온 산에 자자하고, 새싹들이 움트는 소리로 봄기운이 천지에 가득하다.
갑자기 하늘이 탁 트이는 듯 싶더니 절이 한눈에 들어왔다. 절 입구에 세워진 굴뚝이 특이한 모습이다. 기와와 흙을 번갈아 쌓아서 만들었는데 멀리서 보니 첨성대 같기도 하고 벌집을 크게 확대하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다. 사찰이 아늑하다.
다보사 현판이 보인다. '보배가 많다'는 의미에서 多寶寺라 이름 지었는데 고매하고 훌륭하신 보배로운 스님이 많이 나오신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오랜만에 댓돌을 본다. 황토흙 토방에 큼직한 돌을 가져다 댓돌을 놓았다. 그 위에 신발을 벗어 놓고 우리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이 따뜻하다. 장판이 군데군데 까맣게 타 있는걸 보니 산중이라 장작이 많은가 보다. 아랫목 까상까상한 누비이불 속에 발을 넣었다. 누렇게 바랜 벽지랑 횃대를 만들어 옷을 걸어놓은 모습이랑 윗목에 놓여있는 두꺼운 바둑판이랑 모두가 낯익은 풍경들이다. 옛날 모습 그대로다. 맷방석이니 황토방이니 하며 건강에 좋다고 요즈음 호들갑을 떠는 그것들이 바로 이렇게 황토로 바닥과 벽을 바르고 나무로 불을 땐 이런 방이다. 생각할수록 조상님들의 삶의 지혜가 놀랍다. 봉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봉창을 이렇게 열고 호통 치시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싶다.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을 절에서는 해우소라 부른다 했던가. 땅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재래식 변소지만 선운사나 해남 대흥사의 그것처럼 아득히 깊지는 않았다.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있자니 어릴 적 대흥사 해우소에 이렇게 앉아 변소가 하도 크고 깊어 다리가 다 부들부들 떨렸던 기억이 되살아나 혼자서 피식 웃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바람소리 새소리, 그리고 간간이 풍경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참 편하다. 인간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때는 바로 자연 속에 있을 때인가 보다.
돌로 만든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찰을 구경했다. 작고 소박하지만 어느 큰 사찰에 비길 바 없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왔다.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 '보살행'을 하며 중생을 위해 살다갔다고 생각하니 새삼 옷깃이 여미어진다. 영성만 가진 성직자는 진정한 성직자가 아니고, 영성이 실제 이웃을 향한 행동으로 구체화 될 때 진정한 성직자가 된다는 어떤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누 백년 세월을 지켜온 '다보사' 현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봄 햇살을 받으며 일없이 피어있는 민들레 한 송이가 조용히 미소를 던진다. 어, 저 녀석은 우리 마을에도 있던 꽃이 아닌가. 그래서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냈을까. 물망초는 언제 보아도 애처럽다. 저기 저 수국,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오곤 했던 저 녀석도 조금 있으면 환하고 탐스럽게 피어나겠지. 그때 그 아가씨처럼.
온갖 꽃을 저렇게 예쁘게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씨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고운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오는 성싶다. 그래,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운 거야.
그 절 방, 장작불로 달구어진 설설 끓는 온돌방에서 그냥 하루저녁 푹 쉬었으면, 밤새워 친구랑 얘기도 나누고 바둑도 한 판 두면서 지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오던 길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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