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네 말도 옳다

2004.09.09 10:44

정찬열 조회 수:481 추천:14

                              

                                                          
  필자의 아들 승이 여름방학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 SAT II 시험준비를 위한 한국어 강의를 듣고 있다. 한국으로 말하면 대학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어가 미국 대학시험과목으로 채택된 이후 이곳 한국어 진흥재단에서 무료로 실시하는 수업이다.  
  주말학교에 나가 한글을 배우는데 방학까지 이렇게 수업을 해야 하느냐며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그동안 빼먹지 않고 잘 다녔다. 아빠 말을 따라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작은 사단이 일어났다.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 토요일 오후, 녀석이 한국어 수업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자 수고했다고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이게 다 네 장래를 위한 것이니 조금 힘들어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NOT FOR ME, BUT FOR YOU(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를 위해서요)" 하고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화가 나서 호통을 쳤다. "뭐, 아빠를 위해 공부한다고? 그런 정신상태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이 녀석 당장 공부 때려치우지 못해!" 녀석은 풀이 죽어 제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나대로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저녁에 혼자서 곰곰 생각해보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녀석이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쳐다보며 대꾸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말씀에 대꾸를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내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아들이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판단되어 기분이 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에선 대화 할 땐 항상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하도록 교육시킨다지 않던가. 녀석은 배운 대로 했을 것이니 나와 아들사이의 견해차이로 인해 빚어진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셈일 수밖에.
  그건 그렇다 치자. 허지만, 공부야 제 녀석 앞길을 생각해서 하라는 것이지 뭐, 아빠를 위해 공부를 한다고? 다시금 낮에 있었던 좋지 않은 기분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언뜻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모처럼 받은 백 점 짜리 시험지를 엄마에게 보이고 싶어 학교가 끝나자 집에까지 내달려갔던 일이 생각났다.  문간에서부터 "엄마 나 백 점..." 소리치며 들어가 시험지를 내보이자 "아이고 내 새끼, 참말로 백 점 맞았네"하며 나를 번쩍 들어올린 다음 꼭 안아주시던 우리 어머니. 더할 수 없이 흐뭇하고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음에도 또 백 점을 맞아야겠다고 맘먹었었다. 공부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던 어린 시절의 일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렇구나. 내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백 점을 맞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내 아들 승이가 아버지를 위해 공부한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겠구나. 그리고 녀석은 지금 한창 반항기인 사춘기를 벗어나지 않은 나이가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아들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내가 거기까지를 미쳐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느새 밤이 꽤 으슥했다.
   가만히 일어나 녀석의 방 쪽을 건너가보니 아직도 불이 켜 있다. 낮에 아빠가 화를 낸 것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가만히 거실로 불러냈다.
" 승아, 미안하다. 네 말도 옳다" 나는 낮에 화를 냈었던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백 점 짜리 시험지 사연을 말해주었다. 아들이 웃었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온 집안식구가 조용해졌다는 내 어린 시절의 한국 가정의 분위기도 얘기해주었다. 아빠 엄마가 온 가족을 위해 직장에 나가는 것처럼 승이가 아빠를 위해 공부한다는 말도 지극히 자연스런 생각이겠다는 말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공부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해주었다. 녀석이 말했다. "아빠, 미안해요."
  밤은 점점 깊어갔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2004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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