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사 오던 날

2005.03.14 13:06

정찬열 조회 수:493 추천:32

    
                                                                
  밤이 이슥하여 뒤뜰에 나갔더니 달빛이 환하다. 마른 가지 끝에 망울을 터뜨리는 매화꽃이 달빛아래 새침하다. 대보름이 엊그제였다는데 어느새 달이 많이 기울었다. 구름사이로 흐르는 달을 보면서 까마득한 옛일이 엊그제 일인 양 떠올랐다.  
  이맘 때 쯤. 정월 대보름을 쇠고 나면 농촌에선 딸막딸막 농사 준비를 시작했다. 농기구를 꺼내어 고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미리 장만해 두느라 손길이 바빠졌다.
  30여 년 전, 바로 요맘때쯤의 어느 영암장날.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집안 아재를 따라 영암장에 지게를 사러 나갔다.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던 마을인지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읍내까지 20리 길을 꼬박 걸었다. 지게전엔 지게들이 장터를 꽉 메우고 있었지만 키가 작은 내 몸에 딱 맞은 지게는 없었다. '너맘 때는 옷이나 지게는 조끔 큰 것이 좋아야'하는 아재 말씀을 따라 내 몸에 조금 헐렁한 지게를 샀다. 낫과 괭이 호미 등, 농기구 몇 개와  씨감자 한 포대를 사서 지게 위에 얹었다. 제법 묵직했다.
  국밥집에 들러 순대국을 한 그릇 먹는 동안, 아재는 미리 와 있던 동네 어른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분 좋게 들이켰다. 얼큰해진 아재는 나더러 먼저 집에 가라고 하셨다.
  지게를 지고 터벅터벅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길은 아침보다 훨씬 팍팍하고 멀었다. 등에 진 지게가 자꾸 뒤뚱거렸다. 지게와 몸이 따로 놀았다. 처음엔 견딜 만 했던 물건들이 시간이 갈수록 어깨를 짓눌러왔다. 지게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길가 짚더미에서 지푸라기를 뽑아 둘둘 말아 어깨와 멜빵 사이에 끼웠더니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그도 잠깐, 집은 아직 멀었는데 짐은 무거워가기만 했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고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조그만 녀석이 큰 지게를 지고 낑낑대며 걸어가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어떤 사람이 가볍게 웃으며 지나쳤다. 오가는 장꾼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마침 쉴만한 곳이 보여 지게를 받쳐놓고 땀을 닦았다. 바로 그때, 친구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중학을 함께 졸업한 친구였다. 친구의 아버지도 함께 섰다. 쑥스럽고 난처하고 당황스러웠다.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광주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친구와 함께 서 있던 몇 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친구는 아버지를 따라 떠나고, 나는 지게를 짊어지고 타박타박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서러웠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지게를 내 팽개치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 집 장남이었다.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는 해가 길게 내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등에 진 짐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터벅터벅 얼마를 걸었을까. 나는 우리 집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지게를 받쳐놓고 얼른 세수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큰 소리로 "어머니, 수건 좀 주세요" 소리치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지게에서 짐을 내려놓을 때 거들어 주었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고 부엌에 들어가 보니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계셨다.
  지게를 사 짊어지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설음이 복 바쳐 올랐던 것이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고왔던 손은 거칠 대로 거칠어져 나무껍질이 되어 있었다. 교육자의 부인으로 살아오면서 농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머니. 공부대신 아들에게 지게질을 시켜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 것인가. 눈물이 핑 돌았다.
  뒤뜰 우물로 나와 대야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다시 세수를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어머니, 아들 배고파요, 어서 밥 주세요" 소리쳤다. 밥상 위에 고봉밥이 담겨왔다. 내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셨다. "달이 참 밝다, 달도 찼다 기울었다 하지 않더냐". 오늘밤처럼 둥근 달이 우리 집 초가지붕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2005년 3월 2일자 광주매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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