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에게 (1)

2005.11.23 15:46

정찬열 조회 수:492 추천:44


                                
                                                                                
단풍나무야, 나는 첫눈이란다. 작은 물방울로 하늘을 떠돌다가 찬 공기를 만나 나도 모르는 사이 하얀 눈이 되어 이렇게 높은 산봉우리에 내려앉게 되었단다.
내가 이 세상에 내려온 때는 깜깜한 밤이었지. 어렴풋이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동이 트고, 세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넋을 놓고 넓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라보았단다.
세상에서 처음 바라보는 것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지. 찬이슬을 털며 숲 속 둥지를 차고 날아오르는 새 떼들, 물안개 피어오르는 맑은 호수,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과 눈을 마주쳤어. 그리고 첫눈이 왔다고 소리치는 엄마의 들뜬 목소리에 단잠을 깨어 '어디 어디' 하며 창문을 열어재치고 '와! 눈이다' 손벽을 치며 기뻐하던, 그 초롱한 눈망울들과 반가운 첫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때 내 이름이 첫눈이 것을 처음 알았지. 아이들이 저렇게 좋아하다니! 틀림없이 이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사랑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너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난 널 지켜보고 있었지.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때의 너의 눈길,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그리고 당황스러워 하던 그 눈길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면서 당황했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어.
너에게 편지를 쓰기 전, 나는 많은 시간을 망서림에 소모했단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마다 온 몸을 떨며 불안해하던 너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몸을 떨 때마다 낙엽을 털어 내며 조금씩 야위어 가는 너를 바라보면서, 낙엽이 무리를 지어 거리를 쏘다니며 첫눈 때문에 겨울이 이렇게 빨리 왔다고 소란 떠는 광경을 마음 아파하면서, 아무래도 이렇게 소식을 보내어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단풍나무야, 눈이 녹으면 저 하얀 색은 다 어디로 갈까. 그런 생각을 해 보진 않았었니. 그래, 난 원래 하얀 색이 아니었어. 내 몸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거든. 내가 이 산 정상에 내려앉게 된 것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지.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하늘에서 곤두박질을 쳤어. 어떤 친구는 바람에 밀려 계곡에 나뒹굴고,  어느 친구는 겁도 없이 강물로 뛰어 내렸어. 다른 친구는 바다로 떨어져 파도에 묻히고 말았지.
  파도는 파도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파도가 파도를 끌고, 먼길을 함께 달려가더군. 긴 여행이 끝나고, 모래밭에 나뒹구는 순간 파도의 생이 끝나는 것이었어. 잠깐 거품이 일었지만. 모래사장엔 남아 있는 건 모래뿐이었어. 파도는 파도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었어.  
햇빛은 높은 봉우리부터 비추어 오더군. 빛이 내 몸에 닿아 찬란히 부서질 때, 산 아래 있는 것들이 부러움과 선망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어. 나는 참 우쭐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 건너편 봉우리에 쌓인 눈들이 햇볕에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내 이마에 반짝이는 바로 그 빛 때문에 어느 날 내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게 될 운명임을,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단다.
단풍나무야, 겨울이 오는 건 첫눈인 나 때문이 아니란다. 지난 해 겨울, 맨 살로 추위에 떨던 너를 찾아가 가만히 봄을 불러 푸른 옷을 지어 입히고, 다시 노랑 빨강 옷으로 철 따라 바꾸어 치장을 해 주신, 그 분이 누군지 넌 알고 싶지도 않니.
<2004년 3월 7일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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