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차를 좋아하는 아들녀석

2005.11.23 15:53

정찬열 조회 수:406 추천:34

올해 열 여섯 살 된 아들녀석이 자동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이곳에선 열 여섯 생일이 지나야만 운전면허시험을 볼 수 있는데, 작년부터 시험일자를 손꼽아 기다리더니 생일 바로 다음날 시험을 보았다.  
몇 개월 동안 엄마 아빠 차를 가지고 나가 이따끔 실습을 하더니 엊그제는 녀석이 차를 한 대 마련해 달라고 했다. 운전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 썩 믿기진 않았지만, 녀석을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된다는 홀가분함을 기대하면서 차를 마련해주기로 작정했다. 무슨 차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차나 괜찮다고 했다. 마침 아는 사람이 20년도 넘은 고물차를 그냥 쓰라고 해서 가져다 주었더니 요즘 신나게 운전을 하며 쏘다니고 있다.
이곳 아이들은 처음 운전을 배운 다음 대체로 중고차로 운전을 시작한다. 60년대에 생산된 머스탱은 남자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차종이다.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값은 비싸지 않다. 한국에서 건너온 상당수 유학생들이 비싼 스포츠카나 외제차를 선호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차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대체로 5년 이내에 새차로 바꾸게 된다는 어떤 분의 얘기를 듣고 속으로 놀란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멀쩡한 새차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바꾼다는 게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차를 한 번 사면 상당히 오래 사용하며, 필자 역시 10년 이상 타고나서 새 차를 구입 했었으니까.
한국에 있을 땐, 미국인들은 새것을 좋아하고 유행을 쫒아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실제 이곳에 건너와 그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편견임을 알게 되었다. 물건을 알뜰하게 아껴 쓰며, 쓰다 남은 물건이나 본인에게 필요 없는 것들은 '거라지 세일'을 통해 남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실용주의가 이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가게 간판이나 신문 광고를 보면 "SINCE 19xx년..... " 이라는 내용을 흔히 볼 수 있다. 얼마 전 "SINCE 1997, OO피자"광고를 보고선 7년밖에 되지 않는 피자집을 대단한 전통처럼 선전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10년이 넘게 일하고 있는 전기공이나 하수도수리공 등은 "SINCE 19xx, OOO' 이라는 명함을 자랑스럽게 가지고 다닌다. 집안에 오래된 물건을 부모님대부터 써 온 물건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이곳 사람들이 연륜과 전통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예다. 새것과 함께 오래된 것을 아끼고 존중해주는 이 사람들의 균형된 시각을 보게 된다. 시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반다지나 쌀뒤주를 아끼고 자랑하는 가정이 우리나라에 몇 집이나 될른지.
새 것과 옛 것이 공존하여 조화를 이루는 사회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흐뭇함, 그 이상이다.
우리 한국학교에 입학한 어린 학생이 예절이 바르고 한국말을 곧잘 하기에 그 이유를 알아봤다. 그 애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가정의 아이였다.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한국말과 한국의 뿌리와 예절을 배우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오륙도' '사오정' 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잃게되는 개인의 불행도 안타깝지만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인가를 생각하면 참담한 생각이 든다. 젊은이의 패기와 용기는 중요하다. 허나 나이든 사람의 경륜은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하다.  
오늘도 아들녀석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물차를 몰고 학교에 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래된 것을 아끼는 사회, 연륜과 경륜이 대접받는 사회. 청년과 장년, 노인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사회. 그런 사회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4년 5월 5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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