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 낙지와 새해 화두

2006.01.02 09:48

정찬열 조회 수:980 추천:44


광주에서 목포를 내려가자면 '일로' 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게된다. 행정구역상 무안군 일로읍이 되는데, 이곳이 바로 거지타령 "품바"가 탄생한 곳이다. 1950년대에 이 지방에 살았던 천장근 이라는 거지 대장의 이야기를 타령조로 꾸민 각설이 타령의 원산지다.
   "어허, 품바가 들어가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와았네."로 시작되는 걸죽한 각설이 타령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지만, 이 지방에서 나오는 고구마도 밤처럼 달고 영글어 '밤고구마'로 불릴 만큼 부근에서 알아주는 특산물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한 것은 일로 개펄에서 잡히는 세발 낙지이다. 세 낙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크지 않아서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다리를 쭈-ㄱ 훑어내어 그대로 씹어 먹는다. 낙지 발이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 맛이 술안주 감으로 일품이다.
  문제는 이 세발 낙지에서 비롯되었다. 한참 세상이 어수선하던 80년 5월. 그러니까 5.18광주의거 시절의 얘기다. 이 지방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멀쩡한 젊은이가 세 발 낙지를 먹다가 질식하여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타관 사람도 아닌 이 지역 청년이 세 발 낙지를 잘 못 먹어 죽었다는 얘기는 좀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가뜩이나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때라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얼마쯤 지난 후 이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내용인즉, 개펄에 나가 낙지를 잡아오던 한 어부를 협박하여 어떤 청년이 낙지 한 마리를 빼앗아 먹었다. 그런데 벌을 받았던지, 급히 먹으려다 체했던지 그만 낙지가 목에 걸려 그 사람이 질식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사망한 청년의 동생이 어부를 찾아가 "당신이 낙지를 잡아오지 않았더라면 내 형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이유를 대며 그 어부를 폭행했다. 억울하게 폭행을 당한 어부가 분을 참지 못하여 고소를 하겠다며 진단서를 떼러 의사에게 온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의사는 그 어부에게 말했다. "당신이 억울하게 맞은 것은 사실인 것 같소, 그리고 나도 진단서 하나를 끊어주면 삼 만원을 벌게 되어 있소. 그러나 생각해 보시오. 당신은 낙지 한 마리를 잃었지만, 상대방은 형을 잃지 않았소. 오늘 하루만 더 지내보시고 그래도 참지 못하시겠거든 내일 다시 오시오, 그땐 진단서를 떼어 드리리다." 이렇게 그 어부를 되돌려 보냈다. 다음날 그는 오지 않았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다음 그 어부가 낙지 한 접(12마리)을 싸 들고 의사를 찾아왔다. 집에 가서 곰곰 생각해보니 의사선생님 말씀이 옳더라는 것. 그리고 그 며칠 뒤엔 자기를 폭행한 그 젊은이가 찾아와 백배 사죄를 하고 돌아가더라는 얘기를 말하면서, 의사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왔노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결국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자칫 어려워질 뻔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말 한마디가 두 사람을 함께 구한 것이다. 낙지 한 마리와 사람 목숨하나를 비교하며 그 어부를 설득해서 돌려보냈다는 얘기는 두고두고 긴 여운으로 남았다.
  무안 일로에서 일어난 그 일을 말해 주신 의사 어른은 은퇴하여 이곳 오렌지카운티에서 사시다가 몇 년 전 돌아 가셨다. 어느 해 세배를 드리러 가서 들었던 그 분의 말씀이 새해 아침인 오늘 새삼스럽게 되살아난다.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꾼다. 지혜로운 생각이 깃든 말은 평화를 가져온다. 올해의 화두를 "상생하는 말"로 하면 어떨까. 한쪽은 이기고 한 쪽은 지는 삶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이기는 삶,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도 말로부터 시작된다. "상생하는 말", 새해의 화두가 될 만 하지 않은가.    
                   < 1월 4일 2006년 광주매일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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