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께라우-"

2006.12.18 14:45

정찬열 조회 수:479 추천:38

  올해 첫 눈 내리던 날,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첫 눈이었다.
  눈을 맞으며 친구와 함께 상무지구 언덕배기에 있는 어느 찻집에 들렀다. 머리에 쌓인 눈을 털면서 “눈이 오네요” 하고 인사를 건네자, 종업원 아주머니가 “긍께라우-” 하고 맞장구를 쳐준다. 따끈한 차 한 잔을 들면서 ‘긍께라우’라는 말을 되풀이해보았다. 창 넘어 소나무 가지사이로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는데 ‘그렁께라우’ 대꾸를 하며 수줍게 웃던 감나뭇집 셋째 딸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무심코 던진 사투리 한 마디가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던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따뜻이 감싸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나 내가 썼던 글은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을까 스스로 물어보았다. 글은 무엇 때문에 쓰며 문학은 또 무엇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떠 올려보았다.
   마침 그 날은 필자가 써 두었던 글을 한데 묶어 놓은 자그마한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가 출판되어 나오는 날이었다. 막 인쇄되어 배달된 첫 책을 손에 쥐는 순간 산고의 아픔을 겪고 아이를 낳은 산모의 심정을 떠 올려보았다. 그러면서 이 작은 책자가 독자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낮 시간에 금남로 지하상가를 내려가는데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거지가 시멘트바닥에 엎드려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 로제 카이유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로제 시인이 어느 봄날 세느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는데 한 쪽 구석에서 눈먼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장님입니다” 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서있는 깡통에는 달랑 동전 몇 개가 들어있었다.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든 시인은 그에게 다가가 목에 걸려있는 팻말을 떼어내고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 다시 걸어주었다. “아름다운 봄이 오건만, 저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답니다.”
  산책을 마치고 되돌아온 길목에서 시인은 거지가 들고 있는 깡통에 동전이 아닌 지폐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은 미소를 지었다. 문학을 이해하는 파리시민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은 미소였다.      
   문학은 인간을 감동시키는 뛰어난 수단중의 하나라고 한다.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고 얘기들을 한다.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하고 있다. 독자들이 내가 쓴 한 줄의 글로부터 위안을 얻고, 거기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쓴다. 글을 쓴 다음에는 행여 내 글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은 없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이 늘 조심스럽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세상에 내 보내면서, 그 책이 ‘긍께라우’라는 한 마디말로 오랜 객지생활 끝에 고향에 돌아온 사람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거나, 거지에게 더 많은 돈을 적선하도록 마음을 써 주었던 로제 시인의 따뜻한 이야기처럼, 사람들에게 작은 감동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나에게 과한 욕심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눈은 밤에도 내렸다. 눈이 내려 소복이 쌓여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언덕배기 찻집에 다시 올라가 종업원에게 “첫 눈이 참 많이도 내리네요” 하고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면 그 아주머니는 이번에도 “긍께라우-”하고 똑 같은 대답을 해 줄 것만 같았다.
     <2006년 12월 20일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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