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마음
2007.04.24 00:28
비가 내린다. 고향에 가던 날도 비가 내렸다. 다음날 벚꽃이 우르르 다투어 피어났다. 남도산천이 벚꽃으로 환했다.
고향 땅 이곳저곳 발길을 옮길 때마다 봄 흙이 부드러워 마치 맨살을 맨발로 밟은 듯한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산 속 군데군데 핀 산 벚꽃도 아름다웠지만, 신작로를 따라 터널을 이룬 벚꽃 길도 장관이었다. 길고 긴 길이 꽃으로 이어졌다. 강산이 꽃 속에 아늑했다.
누가 저 꽃을 벚꽃이라 이름 지었을까. 벚과 어울려 누구라도 보고 즐기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누가 저 꽃에 내 것이라는 이름표를 달아놓았을까. 사람들은 이상하다. 꽃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맘대로 이름을 붙혀 놓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티걱태걱이다.
해방직후, 완도 어느 섬에서는 벚꽃이 일본 국화라는 이유로 벚나무란 벚나무를 모두 잘라내 버렸단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근본을 따지자면 벚꽃은 우리 꽃이다. 접 벚꽃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라고 한다.
꽃을 꽃으로 좋아하면 그 뿐이 아닐까. 벚꽃 터널을 걷던 때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나비처럼 흩날리던 그 꽃길이 눈에 선하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 그러나 꽃은 환한 자태와 향기를 통해 내 속에 저를 각인시킨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 이파리가 수만 마리 나비가 되어 나풀거린다. 나비들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난분분 난분분 춤추는 저 자태, 저렇게 목숨 버려 내 품속을 파고드는 꽃을 품어 반기지 않을 남정네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벚꽃이 길 따라 피어있는 영암 땅. 그 초입에서 인상적인 풍경 하나를 목격했다. 자동차 수리소 건물 지붕위로 벚나무 둥치 두개가 솟아 있었다. 집을 지을 때 나무를 차마 베어내지 못하고 살려 놓은 채 집을 지은 것이다.
까짓 나무 한 그루쯤 싹둑 잘라내고 편리할 대로 집을 지을 수 있었을 텐데 저렇게 집을 지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가지마다 꽃을 피워 지붕을 환히 밝혀놓은 벚꽃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 목숨을 사람 생명인양 소중히 여기는 저 집 소유주는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다.
꽃이 피어 강산이 아름답다. 강산이 아름다우면 그 속에 사는 사람도 산천 따라 선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아름다움의 진수는 겉모습이 아니라 속 모양에 있는 것 같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고 자연까지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집 주인은 조용히 가르치고 있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월출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 언저리에 구름 한 자락 한가롭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저 집주인을 가슴에 담고 싶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곳 버지니아공대에서 32명의 학생을 총으로 쏘아죽인 참극의 범인이 한국인이란다. 나무 한그루조차 베어내길 삼가는 한국인의 피를 이어 받았단다. 이 부끄러운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사람들은 “지금은 누구를 탓 할 때가 아니고 서로의 슬픔을 위로해야 할 때”라며 살인자의 이름까지 희생자들과 나란히 33개의 추모의 돌에 새겼다. 미워해야할 살인자의 위패 앞에 “고통 받을 때 도와주지 못해, 친구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꽃다발을 놓고 갔다. 아, 나는 울면서 달려가 너무 밉지만 또한 불쌍한, 어린 영혼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고마운 악수를 청하고 싶다. 살인자까지도 따뜻이 품어 안아 용서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떨어지던 벚꽃이 생각난다. 아름답게 피워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버지니아의 꽃들에게 미안하다. 삼가 숨진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빈다. <2007년 4월 25일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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