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의 “도전정신”

2007.12.13 08:26

정찬열 조회 수:543 추천:40


            
   집에서 사무실까지 출퇴근 하는데 약 20분이 걸린다. 그 중 15분 정도는 프리웨이를 달린다.
  지난해부터 프리웨이를 따라 구간별로 방음벽 공사를 시작하더니, 올해 초부터 높다란 벽을 따라 담쟁이를 심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삭막한 시멘트벽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바꾸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오던 터라 반가웠다.
  인부들이 파릇파릇한 어린 싹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은 다음, 그 옆에 담쟁이가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세웠다. 그런 다음 길고 가느다란 호스를 벽을 따라 늘어뜨리더니, 담쟁이 묘목 근처에 구멍을 내어 일정 시간마다 물이 나오도록 장치를 했다.
  제법 철저히 관리를 하는 듯 보였지만 워낙 햇볕이 강렬한 때문인지 심은 지 며칠 되지 않아 많은 어린 싹들이 죽어갔다. 더러는 줄기를 제법 뻗어나가다 시들어버리기도 했다.    
   말라죽은 어린 싹들을 보면서 낯선 땅에 건너와 살아보겠다고 고생고생 하다 주저앉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해직언론인이 된 다음 이민 와 마ㅋㅔㅌ을 운영 하던 중 강도의 총에 숨진 K씨, 페인트 일을 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불구가 된 잘생긴 후배도 떠올랐다.  
   담쟁이 일을 한참동안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그리 말라 죽어버린 줄 알았던 담쟁이가 듬성듬성 파랗게 벽을 타고 번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싹을 태워버릴 듯 쏟아지는 햇빛을 묵묵히 받아내며, 감질나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로 생명을 이어가며, 불에 달군 듯 뜨거운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누렇게 색이 바래 금방이라도 말라버리고 말 것처럼 보이던 어린 싹이 어느 틈에 기운을 회복했는지, 간당간당한 몸으로 벽을 움켜잡고, 제법 푸릇푸릇한 색깔을 자랑하며 우중충한 시멘트벽에 싱싱한 생명의 색깔을 입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뿌리 내리기위해 발버둥치는 담쟁이의 모습이 남의 땅에 와 힘들게 자리잡아 살아가는 이민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벽이 얼마나 많은가. 저것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미리 체념해 버린 것이 한 두 가지이며, 그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이라며 지레 포기해 버린 적은 또 몇 번이던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일 수 밖에 없다고 내가 털썩 주저앉아버린 바로 그 때. 담쟁이는 조용히 담을 넘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쟁이들은 켈리포니아의 불볕 뜨거움과 갈증을 이겨내며 그 높은 담장을 조금씩 조금씩 기어올랐다.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잎 열 개를 끌고, 담쟁이 잎 열개는 담쟁이 잎 백 개를 밀어주며, 담쟁이는 담쟁이끼리 손에 손을 잡고 꼭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담쟁이는 그 삭막한 세계를 푸른 생명의 물결로 덮으면서 결국은 그 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오늘 아침, 높은 벽을 제일 먼저 올라간 담쟁이 이파리 하나가 눈부신 아침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손을 흔들어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에 달린 아침 이슬이 반짝인다.  
   요즘, 파랗게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바라보며 출퇴근을 한다. 출근길에 바람이 불면 담쟁이가 살랑살랑 아침인사를 건네온다. 퇴근길에는 노을에 붉게 물든 담쟁이들이 온 몸을 흔들며 반겨준다. 머잖아 넓은 벽이 온통 푸르름으로 뒤덮힐 것이다. 실의에 빠져 주저앉은 사람들이 담쟁이를 보며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
      (2007년 10월 5일자 중앙일보칼럼)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30,269